1
나는 수백 명의 인간이 한순간 우주공간으로 튕겨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빛이 번쩍이더니 함체 외벽이 통째로 떨어져나가며 발생한 괴물 같은 기압 차가 인간들을 갈퀴처럼 끌어 모아 사방으로 던져버리기 시작했다. 우주에 내던져진 동시에 얼어붙은 수백 명의 사람들은 폭발 영향권에서 수백 미터 가량 떨어진 데크에 고립되어있는 한 명의 장교에게 목격되던 순간에는 이미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든 미라 상태에 불과했다.
시신의 팔과 다리가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방향으로 비틀려 있었다. 멀리서 보면 등에서부터 날개가 솟구친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 그것은 팔이 정반대로, 혹은 그에 준하게 꺾인 몸에 불과했다. 드문드문 흰 제복을 입은 것들 때문에 그 광경은 마치 징벌을 위해 강림한 천사 무리처럼 보였다.
폭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30초 간격으로 각 데크에서 폭발이 있었다. 불꽃과 함께 발생한 그 거대한 힘이 함체를 짓누를 때마다 파편과 함께 산산조각 난 인간들이 터져 나왔다. 버둥거리던 몸들은 사방이 번쩍이다 순식간에 어두워지기를 반복할 때마다 허공을 향해 발을 걷어찬 채로, 몸부림치며 팔을 뻗은 채로, 울부짖으며 입을 벌린 채로 그곳에 얼어붙었다. 8세대 대형 함체가 대가리를 잘린 뱀처럼 서서히 아래로 쳐지더니 마침내 완전히 붕괴했다.
모든 장면은 무성영화처럼 침묵과 어둠속에서 서서히 벌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뜨거운 불에 타 죽어가는 비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신속한 박제의 과정에서 얼어붙어가는 사람들이 내지르는 공포의 아우성과 살려달라는 고함소리…… 잊을 수 없는 죽음의 공포와 거대한 충격. 그리고 배신감. 결코 눈감거나 고개 돌릴 수 없는― 그것은 어떠한 힘으로써 나를 자리에 꼼짝없이 못 박아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목소리의 형태로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폭발 지대로 들어서기 시작한 데크 바깥으로 참상이 펼쳐졌다. 수백 구의 시신이 서서히 가까워지는 동안 파편이 외벽을 긁거나 충돌하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나는 숨을 쉬려고 애쓰며 얼굴을 젖혔다. 시신 한 구가 외벽에 부딪쳤다 퉁 소리를 내며 튕겨져 오른 건 그때였다. 바로 다음 순간, 수백 구의 시신이 일제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2
콘스탄틴이 사망한 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sns와 메신저 계정을 살리는 것이었다. 정확히 무어라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지만, 나와 콘스탄틴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크게 동요하고 있지는 않다는 사실을 알리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대다수의 동기들은 나와 콘스탄틴이 지난 일주일 간 특별한 관계로 발전해 시간을 보냈음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종종 대기실 소파에 나란히 앉았는데, 그때마다 나는 거리낌 없이 콘스탄틴의 어깨에 기대거나 격식을 차리지 않고 말을 걸면서 손장난을 치고는 했다. 콘스탄틴이 구금되었을 때, 그를 걱정하는 것만큼이나 나를 걱정하던 동기들이 있던 건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부 동기들은 콘스탄틴의 운명이 곧 나의 운명이 될까봐 염려하기도 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콘스탄틴이 완전히 죽기 직전까지 나 역시 감시와 심문을 피하지는 못했다. 직접 콘스탄틴을 심문하기 위해 심문실에 자원했을 때에도 감시 인력이 동원되었다. 심문실은 회색 방음벽으로 세 면이 막혀 있고, 나머지 벽 전면은 특수 유리로 코팅되어 있었다. 그래서 안쪽에서는 그저 까맣게 보이지만 바깥에 선 사람들은 안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훤히 볼 수 있도록 되어있었다. 콘스탄틴을 심문하러 들어섰을 때, 제라스 부함장과 두 명의 대위가 유리창 바깥에 뒷짐을 지고 서서 나의 심문을 지켜보았다. 그들이 자리를 비웠을 때에는 AI가 자신이 거기 있음을 알리는 불을 깜빡였다.
그곳에서 이틀 간 쉬지 않고 콘스탄틴에게 폭력을 행사해 신체 일부를 훼손하는 방식으로 제국에 대한 변치 않는 충성심을 증명했다. 그가 의무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는 사흘 간 나는 콘스탄틴이 피를 흘리던 의자에 앉아 제라스 부함장으로부터 직접 심문을 받았다. 콘스탄틴과 똑같은 취급을 받으며 진행되지는 않았다. 비록 테러가 있기 직전까지 그와 각별히 가깝게 지냈다는 이유로 심문실에 앉기는 했지만, 당장 반역자 신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얼마 뒤 콘스탄틴이 죽었고, 나는 풀려났다. 내가 콘스탄틴을 죽였기 때문에 풀려난 것이다. 콘스탄틴의 사인은 폭행치사였다.
그 직후 짧은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개인실로 돌아와 sns와 메신저 계정을 모조리 살렸다. 콘스탄틴의 계정이 삭제되지 않고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를 차단해야했다. 제국이 그 계정을 남겨둔 건 아마 다른 공모자를 색출하기 위함이었던 것 같다. 지난 5년은 물론이고 생도시절에 주고받은 연락 하나하나 꼼꼼히 확인했을 것이다. 제라스 부함장이 나를 심문할 때 그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그가 콘스탄틴에게 보낸 내 5년 전 메시지 내용을 읊으며 웃었던 기억이 난다. 제라스 부함장은 가르강튀아가 로에 정박했을 당시, 내가 콘스탄틴에게 서운한 감정을 드러내며 작성하다 만 메시지 내용까지 알고 있었다. 끝내 콘스탄틴에게 보내지 못하고 임시 저장함에 남겨진 메시지였으므로 나조차도 오랫동안 잊고 있던 것이었다. 콘스탄틴을 심문할 때에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는데 그때에는 표정을 관리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갑자기 제라스가 내 제복을 갈기갈기 찢어발겨 맨몸으로 의자에 앉혀놓는다고 해도 그토록 수치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성적으로 희롱 당하거나, 마취되지 않은 상태에서 손톱을 뽑히는 편이 그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내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심지어 나의 고통을 충분히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콘스탄틴의 죽음에 대한 반응을 숨기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한 건 아마 그 심문에서 느꼈던 강렬한 감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불에 달군 인두로 등을 지지는 것 같은 수치심이었다. 나는 매번 간신히 얕은 잠에 들었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깨어나곤 했다. 두 손은 식은땀으로 축축했고 얼굴은 타는 듯이 뜨거웠다. 혐의에서 풀려난 뒤에도 수치심은 가시지 않았다. 복도를 걷다 말고 얼굴이 홧홧해지거나 목구멍이 막히면 걸음을 멈추고 내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애썼다. 그때마다 손과 발이 수시로 차가워졌다가 뜨거워졌다. 언젠가부터 나는 콘스탄틴이 애초부터 내 인생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포스트를 작성해 하루 일과 중 그나마 의미 있고 즐거웠던 순간을 sns상에 기록으로 남기는가 하면 메신저에 꼬박꼬박 답장하고 동기들의 안부를 성실하게 궁금해 하는 식이었다. 달린 댓글에 이모티콘을 남기거나 다른 동기들의 포스트에 댓글을 달기도 했다. 마르벨르와 슈리파의 해변, 스카디의 깎아지른 절벽과 눈보라, 보라색 대기층이 아름다운 나니아 행성, 진급한 동기의 금색 오각형 뱃지 사진을 통해 위안을 얻는 것처럼 행동했다.
내가 sns와 메신저를 번갈아가며 콘스탄틴의 죽음에 거의 영향 받지 않은 것처럼 구는 동안, 지난 5년은 물론이고 생도시절을 통틀어서도 전례가 없을 만큼 많은 연락을 받았다. 아마 지난 5년은 물론이고 생도시절을 통틀어서도 전례가 없을 만큼 내가 온라인상에서 활발히 얼굴을 보였기 때문이겠지만, 또 꼭 그렇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나를 염려하거나 감시하는 이들이 나의 생존과 안녕을 끊임없이 물어왔다. 내 상태를 걱정하는 동기들도 있었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안부를 묻는 동기들도 있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답장하며 연락을 주고받았다. 그때에는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편이 옳다고 강하게 믿었다.
중요한 건 정작 우리 모두 콘스탄틴에 대한 이야기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메시지에는 이름은 물론이고 그와 관련된 그 어떠한 것도, 심지어는 오로지 우리만이 알고 있을 법한 생도시절의 우스꽝스러운 별명이나 소소한 사건들조차 암시되지 않았다. 우리는 메시지가 중간에 검열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언제든 그럴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때로는 그 믿음이 우리 스스로를 지나치게 검열하고 감시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서로를 의심하고 미워하게끔 하는, 제국이 우리에게 심어놓고 마침내는 우리 스스로 그것이 살아있다고 믿게 된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콘스탄틴의 이름이 가진 영향력을 모조리 흡수해버린 것 같았다. 또한 그 과정은 힘겨루기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콘스탄틴의 이름이 가진 영향력과 우리의 삶을 통제하는 그 힘은 성질이 동일하지 않았다.
콘스탄틴의 이름이 가지고 있기에 그것을 떠올릴 때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던 그 긍정적인 힘은 우리가 그와 함께 살아오며 축척한 삶의 재료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 힘은 그의 말투, 버릇, 다정한 행동과 표정에서 우러나오는 애정을 느꼈던 우리의 역사로 우리 자신이 사유할 때 얻어지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 내부에서 비롯되어 외부를 향해 뻗어나가는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반면 제국이 심어놓은 힘은 아주 어릴 적부터 은밀하게 계획되었으나 삶의 파편적인 외피를 구성할 뿐 우리 자신과 함께 숨 쉬거나 소통하지 않았다. 우리는 제국이 우리를 매순간 감시하고 통제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종종 그것을 잊은 것처럼 일상을 영위하고 행동했다. 그 힘은 외부로부터 왔으나 우리 내부를 강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했다. 그 힘에는 사유가 없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일상 곳곳에 스며있음에도 일상이 되지 못한 어떤 것이었다. 그것은 권력이었다. 따라서 콘스탄틴이 애초부터 삶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굴고 있는 우리의 태도는 거꾸로 콘스탄틴의 존재를 강력하게 인식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증거했다. 우리는 콘스탄틴이 제국의 안전을 위협했기 때문에 마땅히 기억에서 지워낸 것이 아니라, 제국의 안전이 콘스탄틴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삭제한 것처럼 행동했다. 따라서 콘스탄틴의 그 힘은 힘겨루기에서 패배해 지워진 게 아니었다. 콘스탄틴의 존재는 제국의 권력 밑바닥에 깔려있는 잠재된 기억이었다. 내가 ‘삭제’가 아니라 ‘흡수’라고 표현한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제국이 콘스탄틴이라는 이름에 남겨놓은 유일한 한 가지는 반역자라는 죄목뿐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경고로써 우리 삶에 남겨졌다. 특히 나에게는 뚜렷하고 구체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는데, 콘스탄틴이 사망한 후에도 종종 감시 인력이 따라붙은 게 한 예라고 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회담장에서 콘스탄틴과 단둘이 시간을 보낸 적 있던 동기들은 적어도 한 두 번은 비슷한 일을 당했다. 심문실에 여러 번 불려간 동기들도 있었다. 콘스탄틴이 지난 5년 간 우리들과 거의 연락을 주고받지 않았기 때문에 대다수는 이러한 혐의로부터 금방 풀려났다. 나는 콘스탄틴이 졸업 이후 내 연락을 성의껏 받지도 않고, 심지어는 제대로 응답하지 않았던 사실에 줄곧 깊은 유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도 그 일을 생각하면 무척 유감스럽다. 회담장에서 다시 만난 콘스탄틴이 용서를 구하며 늘어놓았던 변명들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했다. 하지만 느세파 콘스탄틴 소위가 라리사 정거장 폭탄 테러 사건의 유일한 가담자로 정리되면서, 나는 콘스탄틴이 지난 5년간 보여 온 무정함이 어느 정도는 계획되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콘스탄틴은 죽었지만 우리는 살아있었고, 한때에는 모두 콘스탄틴을 조금씩은 사랑했었다. 제국도 그 사실을 알았다.
나는 콘스탄틴의 이름은 물론이고 그와 관련된 아주 사소한 추억 하나조차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나 되살릴 수 없었다. 심지어는 콘스탄틴의 죽음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할 기회를 갖지도 못했다. 어떤 날은 얕은 잠에 들었다가 꿈에서 콘스탄틴을 보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강력한 공포가 잠든 나를 깨워 일으키곤 했다. 침대에 누워있다가도, 벽에 기대어 졸다가도,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다가도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그런 후에는 반드시 눈을 비비거나 손등으로 뺨을 훑어 손이 축축하지 않다는 걸 확인해야만 안심이 됐다. 콘스탄틴으로 인한 고통이 예기치 못한 순간 관측되는 게 두려웠다. 매순간 AI, 복도에서 마주치는 장교들, 심문실 복도를 지키는 부사관들의 시선을 느꼈다. 그들이 나를 꼼꼼히 뜯어보고 내 고통의 징조를 판단한 뒤 애국심에 수치를 매길 거라는 강한 확신에 사로잡혔다. 나의 고통이 매순간 데이터화 될 거라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 어느 때보다 나를 감시하는 시선을 의식했다. 나는 제국의 권력이 나의 일상에 자리 잡았음을 알았다. 그 권력이 콘스탄틴을 위한 추모로부터 나를 밀쳐낸 뒤 일상을 은밀히 파괴해버렸음도 알았다. 그러나 달리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 역시 잘 알았다. 내게는 저항할 최소의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그 힘이 행사되지 않도록 빈 곳을 대체할 존재도 더는 곁에 없었다.
수치심으로 가득 찬 나날이 이어졌다. sns상에서 나는 세상 누구보다 바쁘고 열정적인 사람이었지만 가르강튀아에서는 볼품없이 고개를 숙인 장교에 불과했다. 아무도 내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나 역시 그 누구도 돌보지 않았다.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면 매번 얼굴이 뜨거워졌다. 그때마다 상대에게 내가 얼마나 볼품없고 주의를 기울이기에 아까운 존재인지 어떻게든 피력하고자 구석으로 걷거나 시선을 피했다. 아무하고도 대화하지 않고 며칠, 때로는 몇 주를 보냈다. 타인의 응시는 공포를 불러일으키기 이전에 내게 깊은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 그들이 나를 발견하게 된다면 더는 견딜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러한 수치심이 제국의 감시로부터 비롯된 공포와 크게 관련이 없음을 알게 된 건 함선 요나로 감사를 나갔을 때였다. 콘스탄틴이 죽은 지도 반년이 넘게 흘러 따로 감시 인력이 따라붙지는 않았다. 감찰선에는 중위인 나를 포함해 고타 대위와 룬진 중위, 클로체 중위와 이름을 외우지 못한 소위 한 사람이 타고 있었다. 우리는 마더십으로부터 분리된 중형 감찰선을 타고 은하계 단위로 이동했다. 함선 요나까지 17시간 43분이 걸렸다. 요나는 슬쩍 분홍빛이 도는 흰색 함체를 가진 대형 병력수송선으로, 가르강튀아가 감찰선을 보낸 건 요나로부터 내부고발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왼쪽에는 총을, 오른쪽에는 곤봉을 차고 있었다. 사살할 때는 왼손, 상대의 기를 죽이거나 천천히 심문할 때는 오른손을 썼다. 연행할 때는 양손을 번갈아 썼지만 주로 오른손을 더 자주 썼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는 한 함선을 감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발의 진위여부를 파악하고 고발대상을 연행하기 위해 그곳에 당도한 것이었다.
요나의 장교들은 예고도 없이 들이닥친 가르강튀아 감찰선을 보고 창백하게 굳었다. 도킹하는 동안 요나의 통신장교는 연거푸 “가르강튀아 말씀이십니까?”라고 물었는데, 나는 그 태도로부터 통신장교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고 싶어 하거나, 비리에 무지해 가르강튀아가 함선 요나에 당도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 생각하는 순진한 장교의 입장을 피력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우리는 요나의 장교들이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룬진 중위와 나를 제외한 나머지가 함선 DB 열람을 위해 AI 요나의 관제실로 직행했다. 룬진 중위와 나는 연행을 위해 장교 거주 구역으로 흩어졌다. 넓은 보폭으로 서두르지 않고 복도를 걷는 동안 감찰 결과를 실시간으로 보고 받았다. 고타 대위가 내부고발이 유효하며, 연행대상이 다섯으로 늘었다는 사실을 전달했다. 우리는 연행대상의 개인실 코드를 전송받고 두 섹터에서 쪼개졌다. 요나의 장교들은 낯선 장교의 등장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팔뚝에 찬 내 헌병대 완장을 발견하고 빳빳하게 멈추어 섰다. 나는 곤봉을 빼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고한 셈이었다. 나와 룬진 중위는 각각의 개인실을 박차고 들어가 다섯 명의 장교를 차례로 끌고 나왔다.
특히 마지막으로 끌고 나온 중위가 반항이 무척 심했다. 키가 190cm쯤 되는 거구였는데, 연행 통보를 듣고 순순히 따르는가 싶더니 문간에서 갑자기 내 멱살을 틀어쥐었다. 나는 그대로 벽에 집어던져졌다.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눈앞이 순간 새하얗게 물들었다. 기절하지는 않았다. 나는 이미 그 고통에 익숙했다. 바닥에 엎어지자마자 고개를 쳐들고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달리는 동안 이마에서 축축한 두 갈래의 피가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시야가 여전히 군데군데 새하얗고 흐릿했다. 오로지 육감을 발휘해 얼기설기 복도를 달려 나갔던 게 어렴풋하게 기억난다. 빠르게 멀어지는 발소리를 순식간에 따라잡자 헐떡이는 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들렸다. 그대로 몸을 날리면서 반사에 가까운 속도로 곤봉을 쳐들었다. 휘두르는 순간 전원을 올렸다. 귓가를 스칠 때 곤봉에서 전기가 퉁겨져 오르며 머리카락 몇 올이 구부러졌다. 그 다음에는 아주 깜깜해졌다. 발아래에서 누군가 묵직하게 쓰러지는 게 느껴졌다. 그제야 멈추어 섰다. 기절한 몸뚱이가 내 왼쪽 발등을 짓누르고 있었다.
뒤늦게 이마가 화끈거리면서 간지러웠다. 나는 피를 닦아내면서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눈에 곰팡이가 핀 것처럼 털 달린 밝은 잿빛 구멍 여러 개가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특히 왼쪽은 아예 잿빛으로 얼룩져 사물의 형태조차 구분되지 않았다. 얼마 후 등 뒤로 넓은 보폭의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룬진 중위의 목소리가 들렸다.
“느세파 중위, 왜 거기 서있지?”
나는 우두커니 서서 대답했다.
“앞이 안 보여.”
룬진 중위는 침묵하는가 싶더니 곧 지시했다.
“거기서 대기해.”
그런 뒤 그녀는 나를 지나쳐 쓰러진 거구의 중위를 물건처럼 질질 끌고 사라졌다.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펼치기를 반복하며 계속해서 피를 닦아냈다. 몇 분 정도 꼼짝없이 서서 연거푸 눈을 깜빡이자, 수명이 거의 다한 전구에 힘겹게 빛이 오르듯 암전되었던 시야가 차차 밝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제대로 보이지 않아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자리를 지키며 나를 회수할 보충인원이 도착하기를 기다렸지만, 몇 분이 지나도 소식은커녕 비슷한 통신조차 받지 못했다. 통신은 내가 복도를 달릴 때부터 끊긴지 오래였다. 더듬거리며 벽을 짚고 비스듬하게 서서 소위 한 사람에게 연락을 시도해보니 이미 소집명령이 떨어진지 오래였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관제실에 모여 심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가르강튀아의 장교들이 내 존재를 잊었다는 확신이 들자, 더는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니었다. 나는 드문드문 핏방울이 흩어진 복도를 되짚어 심문실까지 홀로 돌아갔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한 명의 심문이 끝난 뒤였다. 뒤늦게 얼굴을 비추자 뒷짐을 지고 있던 룬진 중위가 나를 한 번 흘끔거리다 고개를 돌렸다. 고타 대위는 나를 때리지는 않았지만 그에 준한 얼굴로 나를 깔보듯 응시하기는 했다. 그러더니 소집명령조차 지키지 못하는 무능을 거듭 모두에게 증명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나는 대답 대신 룬진 중위를 응시했는데, 그녀가 동요하지 않아서 금방 그만두었다. 고개를 숙이고 죄송하다고 말하자 고타 대위가 세 명의 심문을 한꺼번에 떠넘겼다. 심문은 한 번 진행될 때 최소 세 시간은 진행되는데다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무척 힘에 부치는 일이라 가르강튀아의 장교 대부분이 꺼리는 작업이었다. 많은 이들이 가르강튀아에 대해 오해하는 게 있다면 헌병대원 전원이 가학적이고 폭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점이다. 하지만 우리들 역시 사람을 학대하거나 죽이는 것을 즐기지는 않는다. 단지 명령을 받으면 충실히 따를 뿐이다. 가르강튀아와 타 함선에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우리가 포기하거나 실패한 폭력을 반드시 그대로 돌려받을 거라는 믿음 하에 움직인다는 것이다. 일단 심문 인원으로 선발되면 우리는 시작하기도 전부터 깊은 피로감을 느껴 눈에 보이는 하급자에게 주먹을 휘두르거나 신경질을 내는 방식으로 고통을 드러냈다. 대위가 중위를, 중위가 소위를, 소위가 부사관을, 부사관이 일반 병사를 폭행했다. 나는 종종 본보기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제라스 부함장에게 얻어맞고는 했다.
고통에 익숙해지고 증오가 쉬워질수록 가르강튀아의 헌병단은 강력해졌다. 우리는 폭력으로써 우리를 다스린 후에야 비로소 명령에 따를 수 있었다. 심문을 진행한다는 것은 이러한 절차를 축소해 반복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내부고발이 들어오면 감찰선에 탄 직후부터 장교 간의 눈치싸움이 시작되었다. 누가 심문실에 들어설 것이냐는 질문이 암묵적으로 깔린 대화가 반복되다가, 운 나쁜 쪽이 폭탄을 떠맡았다. 그런데 고타 대위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무려 세 명의 장교를 심문하는 일에 나를 떠밀어 넣은 것이었다. 운이 나쁜 쪽은 대체로 나였기에 이번에도 군말 없이 따를 생각이었지만, 당시 혼자 심문실에 남겨졌을 때에는 잠깐이지만 깊은 분노를 느꼈다.
함선 요나의 심문실에서 거의 72시간을 깨어있었다. 마지막으로 심문한 장교는 나를 벽에 집어던진 바로 그 거구의 중위였다. 그의 이름은 레안드로스였다. 그는 모든 혐의를 인정하지도 않고, 심지어는 누명이라고 거세게 항의해 여러 번 곤봉을 사용하게 만들었다. 거의 막바지에 치달았을 때에는 나도 그도 지쳐서 하는 말이 전부 뭉개져서 나왔다. 레안드로스가 입에 고인 피를 뱉어내며 입술을 달싹였다. 너무 작은 소리라서 고개를 숙여야만 간신히 들릴 정도였다. 레안드로스가 빠르게 두 번이나 반복해 속삭였다. “오스 총독님께 여쭈세요. 제 결백을 아실 거예요.” 레안드로스는 피로와 고통으로 정신이 나가 눈빛이 탁하고 어딘지 멍해보였다. 내가 무슨 소리냐고 캐묻자, 레안드로스의 눈동자에 일순 빛이 돌더니 돌연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에게 다시 한 번 말하라고 소리쳤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그를 계속해서 때릴 수밖에 없다고 분개했다. 나중에는 거의 호소에 가까운 목소리로 헐떡여 요나의 AI가 내게 휴식을 권고할 정도였다. 나는 쉽사리 진정하지 못하고 심문실을 빠져나왔다. 레안드로스는 그 직후 기절해 의무실로 보내졌다.
심문실에서 장교가 정신을 놓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실제로 레안드로스를 포함해 심문을 받던 일부 장교가 기절 직전 총독이나 제국을 들먹이며 내 화를 돋우곤 했었다. 대체로 끝까지 결백을 주장하던 이들이었다. 내가 레안드로스에게 유독 거칠고 격양된 태도를 보인 건 아마도 연이어 진행된 심문으로 인한 깊은 피로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부당하다고 느껴질 만큼 많은 업무를 홀로 떠맡은 데서 온 분노 역시 그 태도에 일조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레안드로스를 감정적으로 몰아붙인 원인이 내 자신에게만 있지 않다는 걸 무의식중에는 분명하게 인지했던 것 같다. 레안드로스가 직접적으로 총독님의 이름을 언급했을 때, 분명 그의 얼굴은 정신이 나가있었지만 그 태도만큼은 명백한 조롱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것은 나를 깎아내리기 위한 목적이라기보다 나를 동정하는 태도에 가까웠다. 그의 목소리는 냉소적이면서도 어딘지 미적지근하고 체념적인 부분이 있었다. 그때, 나는 레안드로스의 속삭임을 들으며 탐탁찮은 무언가가 있다는 예감을 받았다. 미처 살피지 못한 일이 코앞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강력한 확신이 나를 붙들었고 그 확신이 피로에 의해 쇠약해지기 전에 어떻게든 붙잡아야 한다는 조급함에 사로잡혔다. 눈앞의 레안드로스는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안배된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를 어떻게든 발언시켜 사실관계를 직접 듣고 판단해야만 한다는 강력한 의지가 솟구쳐 올랐다. 그를 몰아붙이기 전에 보다 침착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결국 나는 레안드로스를 기절시켰고, 그는 의무실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나는 레안드로스의 최후를 함께했다. 그의 곁을 지키지는 않았다. 레안드로스의 곁을 지킨 건 다름 아닌 헤로 대위였다. 그녀는 구불구불하고 짧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고 레안드로스가 누운 침대 곁에 무릎을 접고 앉아 몇 시간을 보냈다. 레안드로스의 가슴에 얼굴을 베고 누운 헤로 대위의 머리카락이 갈색 털 뭉치처럼 보였다. 나는 의무실 구석에 서서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었다.
한 가지 기묘했던 건 함선 요나의 내부 고발자가 바로 헤로 대위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헤로 대위가 처음부터 작정하고 레안드로스를 고발한 건 아니었다. 최초에 그녀가 고발한 건은 함선 내부의 승급 비리였고, 거기 엮긴 건 ICOTS 출신인 두 명의 장교들뿐이었다. 레안드로스는 가르강튀아 헌병단이 함선 요나에 도착한 직후 고발 사실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DB를 점검하다 말고 새롭게 색출한 세 명 중 한 사람이었다. 헤로 대위는 자신이 벌인 일로 의도치 않게 연인을 심문실에 몰아놓은 입장이 되어 괴로워하고 있었고 그 감정을 거리낌 없이 드러냈다. 레안드로스는 이제 제국의 정의와 질서를 위협한 자로서 가르강튀아에 연행될 예정이었고, 그런 그를 폭행한 헌병대원이 의무실 한 구석에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 헤로 대위는 레안드로스의 곁에 웅크린 채로 그와 함께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고 말했다.
그녀는 관광명소로 유명한 나니아 몇 군데의 이름을 나열하며 마치 그곳에 오래 머무른 경험이 있는 것처럼 풍경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슈리파, 마르벨르, 이오타의 해변까지 나왔다. 레안드로스 중위는 천장을 보며 누워있었지만 주의 깊게 그녀의 말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이따금씩 작게 “응.”하고 대답했다. 헤로 대위는 레안드로스에게 어떤 곳이 가장 좋겠냐고 질문하기도 했다. 마치 정말로 레안드로스가 의무실을 빠져나가면 그 직후 셔틀을 빌려 타고 그곳으로 떠날 수 있는 사람처럼 굴었으므로 헤로 대위가 정말로 그 일을 실행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레안드로스는 헤로 대위가 늘어놓는 비현실적이고 아름다운 미래에 침묵하며 누워있었다. 그러다 헤로 대위가 이 모든 걸 자신과 함께 하겠다고 약속해달라고 말했을 때, 비로소 입을 열었다.
그때, 나는 레안드로스와 헤로 대위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특히 레안드로스가 헤로 대위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의도치 않게 나를 상처 입혔던 것 같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나는 의무실에 누운 레안드로스와 그 곁을 지키는 헤로 대위에게 나와 콘스탄틴을 대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레안드로스와 헤로 대위가 처한 상황과 그 상황을 대하는 모습은 헤어지기 직전의 우리 두 사람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그래서인지 나는 헤로 대위에 지나치게 이입하고 있었다. 헤로 대위가 얼토당토않은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레안드로스에게 매달릴 때에도 그녀를 전혀 비웃을 수가 없었고 오히려 마음 깊이 이해하고 동정했다. 나는 헤로 대위가 정말로 그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믿고 그런 이야기를 늘어놓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 레안드로스와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 망상적 태도를 보인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오히려 헤로 대위는 레안드로스와 다시는 만날 수 없고 또 의무실에서 벗어나면 범죄자 신분의 장교와 깊게 접촉했다는 이유로 자신이 다음 심문 대상으로 고려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인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로 대위가 레안드로스에게 미래에 대한 약속을 거듭하여 늘어놓은 건, 그녀 자신을 위한 게 아니라 반대로 막 미래를 상실한 연인을 위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또한 레안드로스가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있을 지라도 자신은 변함없이 레안드로스와의 미래를 그릴 수 있고 또 그것을 위해 앞으로 닥칠 위험을 감수하고 있음을 알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벌어진 유감스러운 상황은 헤로 대위의 의도가 아니었지만 동시에 그녀의 선택으로 발생한 일이기도 했다. 나는 헤로 대위가 내부 고발자의 신분으로도 레안드로스를 찾아온 건 사실상 그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내가 그때 결국 콘스탄틴을 찾아갔듯이. 나는 헤로 대위에게 지나치게 이입하는 바람에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건 오로지 나뿐일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헤로 대위가 레안드로스에게 설령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할지라도 용서를 구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으나 당장 내뱉지 못할 그 말에 도달하기 위해 약속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건 헤로 대위도 레안드로스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헤로 대위가 레안드로스에게 정말로 전하고 싶었던 마음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건 오로지 나뿐이라고 믿었다.
나는 죽음을 앞둔 레안드로스가 불안과 고통으로 헤로 대위의 마음을 전혀 헤아리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설령 헤아린다고 해도 그 나름대로의 배려로 그녀를 거절할 거라고 예상했다. 두 사람 앞에는 지키지 못할 약속밖에는 남지 않았고, 레안드로스에게 주어진 미래로는 헤로 대위를 데려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헤로 대위는 끔찍하게 고통 받겠지. 마지막 순간에 거절당할 테니까. 그것도 모자라 그 거절을 이해해야만 할 테니까. 거절당한 헤로 대위가 받을 충격에 동화될까봐 두려워 그때까지 강력하게 몰입하다 말고 퍼뜩 정신이 들었을 때였다. 레안드로스가 힘겹게 손을 올리더니 헤로 대위의 뺨을 문지르면서 입을 열었다.
“응, 그럴게.”
레안드로스가 대답했다.
오랜 시간, 나는 절망적인 상황 앞에서는 어떤 대화를 나누던 간에 결국 그 순간은 의미를 잃게 되는 거라고 생각해왔다. 레안드로스가 그때 어떻게 대답했던 간에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그가 죽는다는 것, 헤로 대위가 함선 요나에 혼자 남겨진다는 것은 불변의 미래였고 아주 작은 기적을 기대할 수조차 없었다. 두 사람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콘스탄틴 역시 그 사실을 알았다. 내가 콘스탄틴을 찾아갔을 때, 콘스탄틴이 나를 거절한 건 그 때문이었다. 그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 사과는 당장 그 상황에 대한 암시만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 당시에 나는 그의 사과를 이해했다. 마찬가지로 나와 콘스탄틴에게는 지키지 못할 약속밖에는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콘스탄틴은 이미 내 약속을 대부분 저버린 상태에서 마지막까지 내게 그런 짓을 저지를 수는 없다고 제 나름 판단했던 것 같다.
아마도 콘스탄틴은 내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를 남겨놓고 떠나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불가능성을 약속하지 않는 일이야말로 나를 남겨놓는 상황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매사에 충실하고 정직한 성품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일이었을 것이다.
콘스탄틴이 오독한 게 있다면, 내가 그를 찾아간 진짜 이유가 사실 약속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가 나에게 약속하던 하지 않던 간에 우리는 더는 미래를 낙천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러므로 그 약속은 별반 의미가 없었다. 우리가 마지막에 나누게 될 대화는 상황을 바꿀 힘을 갖지 못한 이상 언젠가는 무의미한 무언가로 남을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콘스탄틴을 찾아가서 어떤 말이든 지껄인 건 그냥 그의 곁에 오래 남고 싶어서였고, 동시에 콘스탄틴에게 이런 상황이 됐을 지라도 나는 그와 함께 하고 있는 중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어쩌면 나는 콘스탄틴이 내게 불가능성을 약속해주기를 정말로 바랐을 지도 모른다. 만약 콘스탄틴이 미안하다는 말 대신 다른 이야기를 하기로 선택했더라면 나는 좀 더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럼 그에게 용서를 구하거나 위로할 보다 직접적인 말을 찾아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쩌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낼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콘스탄틴은 나를 거절한 동시에 내 언어가 뻗어나갈 모든 가능성을 앗아가 버렸고, 그런 후에는 영영 내 곁을 떠나고 말았다. 콘스탄틴은 나를 위안하기 위해 내가 그에게 용서를 구하거나 위로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콘스탄틴은 나와 대화하는 게 마지막이 될 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내가 정말로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혹은 알고 있더라도 듣지 않기로 결정했다.
레안드로스가 헤로 대위에게 불가능성을 약속하던 순간 바로 그 사실을 깨달았다. 콘스탄틴이 나를 거절한 건 배려가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 두 사람이 저지른 아주 치명적인 실수였다. 설령 결과는 똑같았을 지라도 그 순간이 갖는 의미는 대답에 따라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었다. 헤로 대위가 어떤 순간에서든 레안드로스와 함께 하겠다고 말했으므로 레안드로스 역시 그렇게 대답했던 것이고 나와 콘스탄틴은 그 비슷한 대화조차 나누지 못 했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콘스탄틴이 나를 거절하던 바로 그 순간부터 내가 그에게 호소한 모든 것들이 그를 원망하는 언어로밖에 남지 못했다는 사실을 아주 뒤늦게 깨닫고 말았다.
레안드로스의 대답을 들은 헤로 대위의 태도가 아직도 생생히 떠오른다. 그녀는 결코 울거나 그 비슷한 소리를 내며 흐느끼지도 않았다. 헤로 대위는 오히려 확신 속에서 결연해보였고 고개를 숙여 레안드로스에게 어떤 말을 속삭였다. 아주 작은 소리였기에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던 내게는 들리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가 레안드로스에게 건넨 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와 콘스탄틴과는 전혀 닮은 바가 없었다. 그들은 성공했고 우리는 실패했다. 두 사람을 지켜보며 우두커니 서있던 내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른 건 바로 그때였다. 그것은 지난 몇 달 간 나를 지독하게 괴롭혔던 강렬한 한 가지 감정이었다.
다음 순간 나는 레안드로스와 헤로 대위를 바라보면서 끔찍한 수치심에 사로잡혔다. 두 사람에게 이입했던 내 자신에 대한 깊은 혐오와 분노가 솟구쳐 오르더니 손발이 차가워지고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온몸이 후들후들 떨리더니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어 제대로 서있을 수조차 없었다. 지난 몇 달 간 나를 괴롭힌 수치심이 다름 아닌 콘스탄틴과의 마지막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우리의 마지막 대화는 콘스탄틴의 죽음 이후 퇴색된 게 아니라 오히려 강력한 하나의 의미로써 자리 잡아 나를 끊임없이 수치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 수치심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것은 다름 아닌 내가 콘스탄틴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콘스탄틴에게 개인적인 호감을 품은 이후 줄곧 그에게 그 마음을 표현하고자 거듭 시도해왔었다. 생도시절부터 사관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그 시도는 변함이 없었고 비록 점점 우리 둘 다 힘든 상황에 놓이기는 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우리 관계를 유지하고자 노력해왔었다. 콘스탄틴에게 모질게 굴 때도 있었지만 결국 항상 되돌아와 그를 용서하고 말았고 콘스탄틴 역시 그 사실을 알았다. 콘스탄틴이 그런 내 노력을 알고 있었기에 나 역시 그를 좋아하는 걸 포기할 수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콘스탄틴과 나의 관계는 서로 직접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무의식중으로나 의식적으로나 알고 있던 마음을 바탕으로 유지되어온 면이 있었다. 사실, 더 많이 좋아한 쪽은 항상 나였다. 더 많이 노력하고 싶었던 쪽 역시 항상 나였다.
그렇기 때문에 콘스탄틴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 수치스러웠던 것 같다. 그렇게나 노력했는데도 콘스탄틴에게 버림받은 존재가 되었다는 생각이 결코 지워지지 않았고 그것이 착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지점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이러한 수치심이 극대화된 건 가르강튀아에서 내가 처해있던 특수한 상황 때문도 있었을 것이다. 장교로 임관한 뒤 나는 단 한 번도 어딘가에 진실 되게 소속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이는 내 개인적인 감상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 업무에서의 차별로까지 이어졌다. 나는 종종 동료들이 의도적으로 누락한 소집명령을 지키지 못해 상관 제라스 부함장에게 따귀를 얻어맞거나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업무를 떠맡았다. 헌병단 내에는 태생과 출신학교로 형성된 파벌이 존재했는데, 다수를 이루는 ICOTS 출신들은 정확히 알 수 없는 이유로 나와 같은 ACOTS 출신들에게 깊은 유감을 느꼈고 그것으로 거리를 만들었다. 가르강튀아는 함선 중에서도 초대형 규모에 속했지만 나는 그곳에 소속된 수많은 헌병대원들과 단 한 번도 진실한 관계를 쌓아본 적이 없었다. 함선 요나에서 있었던 일은 지난 5년 간 장교 생활을 거치며 빈번히 겪어온 일상적인 사건에 불과했다. 나는 가르강튀아에서 종종 그 어떤 헌병대원보다 많은 업무에 시달렸지만 그것을 사적으로나 공적으로나 보상받아본 적이 거의 없었다. 나보다 늦게 임관한 풋내기 장교들이 나를 재치고 대위로 진급하는 것을 지켜보는 일도 빈번했다. 나는 노력에 보상받지 못하는 삶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고 그 이상으로는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굴었다. 가르강튀아의 헌병대원들, 특히 나의 상관 제라스 부함장은 이러한 상황을 무척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불안해하는 내 진취적이면서 불안정한 성향을 눈치 채고 있었고 종종 그것을 이용해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필요이상으로 나를 몰아붙였다. 다른 장교들 앞에 본보기로 세워 내 복부를 걷어차거나 주먹을 휘둘러 어깨를 골절시키는 방식으로 가르강튀아에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모두에게 알렸다. 그가 나를 주시하고 있고 나를 어떻게 다룰지 결정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거듭하여 인지시켰다.
그가 나를 심문하던 와중 콘스탄틴에게 보내려다 만 내 5년 전의 메시지를 들먹인 건 단순히 제국이 콘스탄틴과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알고 있으며 알아낼 거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제라스 부함장은 바로 이런 상황, 가르강튀아에 소속되지 못 하고 겉돌고 있는 내 상황을 꼬집기 위해 콘스탄틴이라는 존재를 끄집어낸 것이었다. 콘스탄틴은 내 실패의 역사였다. 나는 내가 임관해 몸담고 있는 함선에 제대로 소속되어 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곳에 소속되기 위해 공들인 노력을 인정받지도 못했고, 심지어는 사적인 관계에서조차 매달리다 버림받은 존재였다.
제라스 부함장이 일깨워준 건 아주 큰 조직에서부터 지극히 사소한 관계에서까지 내가 필요 받지 못 했고 결과적으로 아무 것도 해내지 못 했다는 사실이었다. 돌이켜보면 그 심문은 콘스탄틴과 나의 관계에 얽힌 테러 혐의를 파악하기 위해 진행되었다기보다 나의 고립된 상황을 거듭 확인시키고 인정하게 만드는 과정에 가까웠다. 나는 제라스 부함장이 콘스탄틴에게 마음을 다했던 내 사적인 노력들을 모조리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콘스탄틴에게 보냈던 모든 메시지들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그에게 닿지 못한 마음들까지도 제라스 부함장이 알고 있다는 사실을 도저히 버텨낼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나는 철저하게 발가벗겨져 의자에 앉아있었다. 옷을 모조리 벗는다고 해도 결코 느낄 수 없는 수치스러움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외피, 내 피부와 살을 보이는 행위가 아니라 내가 지켜온 내 이름이 가진 힘을 해체하는 일이었다. 나의 이름은 그 순간 철저하게 파괴당했고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상황으로 이끌렸다. 심문실을 나오는 그 순간부터 수치심은 나와 함께했다. 매순간 AI, 장교들, 부사관들의 시선을 느꼈다. 그들이 나를 응시할까봐, 나의 고통을 관측할까봐, 그래서 실패하고 버려진 내 모습을 발견할까봐 두려웠다. 제국의 권력이 아니라 그 수치심이 나를 두렵게 했다.
특히 동기들이 이런 내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동기들이야말로 내가 콘스탄틴을 어떤 존재로 생각했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집단이 아닌가. 동기들은 제라스 부함장과 달리 사관학교에서의 지난 5년을 함께하며 내가 얼마나 콘스탄틴을 소중히 여겨왔는지 직접적으로 목격한 존재들이었다. 그러므로 콘스탄틴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에 어떤 식으로든 동요한다면, 아주 미약한 행동일지라도 그들이 곧바로 알아차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콘스탄틴으로부터 버림받은 사실이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는 것처럼 행동했던 것이다. 콘스탄틴을 향한 배신감이 너무 커서 한순간에 그를 내 삶에서 삭제할 수 있는 것처럼 굴면서 sns와 메신저로 명랑함을 꾸며냈던 것이다. 그러니까 콘스탄틴을 떠나보낸 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나는 콘스탄틴으로부터 버림받은 나 자신을 숨기기 위해 그토록 애써온 것이었다.
요나에서 돌아온 후 개인실로 돌아가 패드를 켜놓고 지난 반 년 간 꾸며온 일을 돌이켜보았다. 동기들의 sns 포스트마다 내가 남긴 이모티콘과 댓글이 있었다. 화면을 아무리 내려도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명랑함이 아니라 강박으로부터 비롯된 안쓰러운 노력처럼 보였다. 콘스탄틴이 애초부터 삶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굴고 있는 나의 태도는 거꾸로 콘스탄틴이 떠난 뒤 남겨져 고통스러워하는 내 모습을 증거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sns 포스트와 메신저마다 남겨진 이모티콘이 고통을 숨기는 일조차 실패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이 나를 발견하고 있었다. 나는 패드 앞에서 벌거벗은 기분을 느끼며 sns와 메신저 계정을 모조리 삭제했다. 망상적인 모욕감이 자존심을 사정없이 짓밟았고 뜨거운 기운이 목구멍으로 차올랐다. 패드 전원을 내리는 손바닥이 식은땀으로 흥건해져있었다.
3
그 날 레안드로스와 헤로 대위의 모습은 내게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나는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불행에 대처하는 두 사람의 태도, 특히 레안드로스를 찾아와 끝까지 그 곁을 지켰던 헤로 대위의 결정으로부터 무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단호함을 느꼈다. 이때 단호함이란 그녀 자신과 레안드로스를 제외한 모든 것을 배제시키는 의지, 단순히 사물이나 사람을 배타하는데 그치지 않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말과 행동, 이성, 욕망, 다시 말해 우리를 강제하는 사상과 사유까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배제시키는 강한 의지를 의미한다.
헤로 대위의 확신에 찬 몸짓은 의무실에 누워있던 레안드로스를 한순간에 다른 존재로 바꾸어놓았다. 그 순간 레안드로스는 부정을 저지르고 발각되어 처분을 기다리는 범죄자가 아니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은 의무실을 나서 슈리파나 마르벨르, 이오타의 해변으로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어떠한 요소도 그들을 그 이외의 존재로 격하시킬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자신들이 보여 지기를 원하는 바로 그 모습대로 그곳에 존재했다.
한동안 두 사람에 대한 생각으로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수면시간이 지나면 개인실이 자동으로 소등되었지만 나는 캄캄한 방 안에 누워 천장을 노려보면서 레안드로스가 죽기 직전 의무실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차분히 복기했다. 특히 마지막 순간 헤로 대위가 위로를 가장하고 레안드로스에게 달콤하게 늘어놓았던 그녀의 희망을 머릿속에 문장으로 되살려놓고 속으로 읽어보았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콘스탄틴에게 버림받았다는 수치심과 절망으로부터 달아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처럼 느껴졌다. 헤로 대위의 말은 이제 그 어조나 목소리의 높낮이, 그녀가 골랐던 세부적인 단어들조차 기억나지 않을 만큼 희미했지만 끊임없이 복기된 탓에 머릿속 문장으로 재구성하면 놀랄 만큼 또렷해졌다. 아니, 그녀의 언어는 이제 낱말과 보어, 조사로 구성된 문장이 아니라 이미지처럼 내 속에 각인되어 있었다.
그것은 하얀 바탕에 까만 글씨로 또렷하게 쓰여 있었다. 때로는 너무나 선명해서 내 기억을 통째로 그 아래에 묻어두게 될 것만 같았다. 나는 콘스탄틴과 내가 할 수 없었던 일들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단둘이 손을 잡고 아이오워스 중앙공원의 산책로를 걷거나 분수대 앞에 멈추어 서서 동전을 던지는 장면을 상상했다.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벤치에 앉아서 몇 시간 뒤에 보게 될 영화나 공연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날아가는 새 무리를 보기도 했다. 나는 아이오워스 공원에 서식하는 새들의 종류를 몰랐지만 그것들이 물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얀 깃털을 가진 새들은 때가 되면 바닥에 깔린 원판에서 물이 솟구쳐 오르는 분수대 위를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니다 물이 분사되기 직전 날개를 펼치고 날아갔다.
새들은 사람들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날아가기도 했다. 언젠가 콘스탄틴과 공원을 걷다가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뒤뚱거리고 있는 새를 발견하고 일부러 빠른 걸음으로 그 곁을 지나쳐 새를 날려 보낸 적이 있었다. 내가 날려 보낸 새가 깜짝 놀랐다가 이내 진정한 것처럼 분수대에 불시착하는 바람에 근처에 모여 있던 다른 새들이 한꺼번에 푸드덕거리며 날아올랐다. 통통하고 하얀 새들이 일순 하늘로 솟구치자 공원에 있던 모든 시민들이 고개를 들거나 손가락질을 했다. 새들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높이 솟아올라 한동안 창공을 배회했다. 우리는 벤치에 앉아 텅 빈 분수대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야기에 열중해 서로의 얼굴을 길게 응시했는데 패티가 돌아오는 바람에 그 마법이 깨져버렸다. 고개를 돌리니 그새 분수대가 꽉 차있었다. 새들은 다시 물놀이를 즐기고 있었다. 패티가 콘스탄틴에게 점을 보러가자고 했다. 그런 뒤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들은 영원히 어딘가로 떠나지는 않는구나.”
분수대 옆을 지나면서 말했다.
“쟤넨 언제든 돌아올 수 있지. 그런 점에서 새들은 우리보다 나은 삶을 사는 걸 수도 있어.”
방금 전까지 우리가 주고받았던 긍정적인 에너지에 기대어 콘스탄틴이 밝게 대답했다.
“둘이 무슨 이야기하고 있었어?”
패티가 끼어들었다.
“장교가 된 뒤 동기들과 우연하게 재회할 가능성을 퍼센트로 계산하기.”
참고로 자긴 3%쯤 될 거라고 추측했다며 콘스탄틴이 덧붙였다.
“싸샤는 1%밖에 안 될 거라고 장담하더라.”
“새들만큼은 아니지만 어쨌든 우리도 때가 되면 돌아오잖아.”
나는 황급히 내가 한 말을 수습하려고 했다.
“언제? 죽은 후에 묻힐 때?”
콘스탄틴이 실실거렸다. 우스갯소리라는 걸 알아차렸지만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침울해져서 그 의도를 흘려들었다.
“아니. 진급식이 있다면 돌아올 거 아니야. 운 좋게 시기가 겹치면 얼굴을 볼 수도 있어.”
“얼른 점을 보러가자.”
패티가 조바심을 숨기지 못하고 말했다.
그 날 패티와 콘스탄틴 셋이 함께 한 외출에서 콘스탄틴과 단둘이 있던 순간은 분수대 앞에서가 전부였다. 패티는 쉴 새 없이 종알거리며 끊임없이 나와 콘스탄틴에게 말을 걸었다. 때로는 그 지나친 명랑함이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이기도 했다. 패티는 내가 보는 앞에서 콘스탄틴에게 팔짱을 껴 끌어당기기도 하고 동전을 나누어주고 앞장서 분수대에 던지기도 했다. 그러다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며 단호하게 파라솔 아래로 걸어가 노점상 주인에게 바 아이스크림을 사서 나누어줬다. 나는 패티가 콘스탄틴과 나를 단둘이 남겨놓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그 외출이 끝나갈 쯤에 깨달았다. 그때는 그녀가 소외감을 느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 이유가 있긴 했겠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패티는 콘스탄틴을 좋아해서 그렇게 행동했던 것이다. 나와 콘스탄틴의 관계를 단단히 오해했다. 그때까지 나는 콘스탄틴과 사적인 목적으로 단둘이 외출한 적이 거의 없었다. 손을 잡고 걷거나 팔짱을 끼거나 아이스크림을 나누어먹은 적도 없었다. 영화나 연극을 보러갈 때도 항상 다른 누군가와 함께였다.
나는 패티의 존재를 지우고 콘스탄틴과 단둘이 그 모든 일을 다시 하는 것을 상상했다.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앞장서서 걷는 것도 나였고 동전을 나누어주는 것도 나였다. 영화와 연극 이야기는 상상의 과정에서 덧붙여진 새로운 전개에 불과했다. 그 상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나와 콘스탄틴을 제외한 모든 걸 치워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식으로 나는 헤로 대위와 레안드로스가 경험했던 순간을 복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콘스탄틴의 얼굴은 레안드로스로 바뀌었다. 그리고 내 곁에는 어느새 패티가 서있었는데, 눈을 깜빡이는 순간 그녀는 헤로 대위가 되어있었다. 두 사람은 내가 곁에 서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것처럼 다정하게 팔짱을 끼고 사랑의 말을 속삭이면서 셔틀 정거장으로 떠났다.
나는 전보다 더 괴로워졌다. 불면증은 깊은 늪처럼 나를 극도의 피로상태로 끌어당겨놓고 내가 위로 기어 올라갈 수 없도록 단단히 옭아매고 있었다. 끔찍하게 피곤할 때는 생존을 위해 잠들었지만 항상 꿈속에서 콘스탄틴을 보았기 때문에 화들짝 일어나곤 했다. sns를 지운 후 상황은 더 나빠졌다. 나는 아예 잠들 수 없었다. 헤로 대위와 레안드로스의 생각만 병적으로 해댔다. 그들의 어떤 부분이 그토록 특별해보였는지 집착적으로 생각했다. 어째서 그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지도. 어째서 그들을 떠올리면 콘스탄틴이 떠오르는지도.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지만 헤로 대위의 어떤 부분은 콘스탄틴과 닮아있었다. 적어도 그렇다고 느꼈다.
불면증이 지속되는 동안 두 눈 아래는 시꺼멓게 변하고 표정도 어두워졌다. 가지고 있던 헤어오일이 바닥나서 어느 순간부터 머리카락 결도 점점 나빠지는 것 같았다. 나는 품위를 유지함으로써 내가 받은 상처를 어떻게든 감추고 싶어서 헤어오일을 충동적으로 3박스나 주문한 다음, 그 날 식당에서 마주친 동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테이블에 앉아있던 장교들이 깜짝 놀라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내 인사가 불편해서 어색하게 눈을 굴렸다. 나와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있던 소위가 만들어진 미소를 지어보였다. 눈이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나니아를 위하여. 진급 축하드립니다, 느세파 중위님.”
“진급이라니?”
“대위로 진급하시잖습니까?”
그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되물었다. 자신이 잘못 알고 있냐는 듯 조심스럽게 주변을 둘러보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중위 한 사람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부함장님께서 축하메시지를 남기셨다고 들었습니다.”
각종 메신저며 sns를 지운 이후 나는 한동안 패드 내역이 얼마나 쌓여있는지조차 확인하지 않았다. 개인실로 돌아와 패드를 켜보니 부함장 제라스로부터 직통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그의 메신저 말투는 대면할 때와 달리 사무적이고 딱딱했다. 가르강튀아의 귀국 예정일, 진급식 참석인원, 진행을 맡을 대표자의 이름이 상세히 적힌 메시지 끝에 경례가 붙어있었다. 나니아를 위하여.
메시지를 처음부터 다시 꼼꼼하게 읽었지만 내용이 머리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정신이 어딘가에 붕 떠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일까. 왜 여태껏 나를 버려두다가 느닷없이 대위로 진급시켜주는 걸까. 그것도 중위로 진급한지 겨우 일 년이 막 지난 참이었는데 말이다. 게다가 나는 콘스탄틴과 너무 깊게 연관되어 있던 예의주시 중인 인물이 아니었던가. 비록 물리적으로 따라붙는 감시자들이 사라졌을지라도 시선은 어디에나 있었다. 아니다. 내가 콘스탄틴과 깊게 연관되어 있다고 믿는 건 나와 제국뿐이고 실상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그때 콘스탄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아직도 모르지 않은가. 그래서 그의 선택지에조차 들지 못한 것이 아닌가.
콘스탄틴에 대한 생각을 의식적으로 떨쳐버리려고 애쓰면서 패드를 침대 한 구석으로 던져버렸다. 다음 날 AI 가르강튀아가 항로가 에오르로 변경되었음을 알렸다. 귀국소식을 접한 장교들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휴식시간이 되면 귀국하자마자 누구를 만날지 떠들면서 웃어댔다. ICOTS 출신들은 본국 친구들을 많이 두고 있었다. 반면 나는 연락할 사람이 마땅치 않았다. 대다수의 ACOTS 출신들이 그랬다. 아는 사람들은 전부 우주 전역으로 뿔뿔이 흩어져 바쁘게 생활하고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고민하던 나는 나나스몬에게 연락을 넣었다. 그녀는 중앙 기술 개발 연구소에서 몇 년째 근무 중이었는데 나처럼 상관을 잘못만나 고생하고 있었다.
5년 만에 회담장에서 재회한 이후 나는 나나스몬과 뜸하게 연락을 이어가면서 그녀의 기발한 상관 욕을 읽으며 대리만족을 느꼈다. 나나스몬은 자기 상관의 뇌를 폭죽으로 개조해서 공중으로 쏘아 올릴 거라고 했다. 폭죽에는 빨간색과 주황색, 노란색 불꽃을 쓸 거라고 했다. 언젠가 반드시 그 비슷한 일을 해내고 말 거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호언장담한 게 마지막 답장이었다. 나는 진급소식을 일부러 말하지 않고 간만에 본국으로 돌아갈 일이 생겼는데 괜찮으면 만나자고 함선 통신기를 이용해 메시지를 보냈다. 나나스몬은 바빴는지 이틀 만에 답장을 주었다. 날짜 상으로 이틀 전이지만 은하계 단위로 이동 중인 내게는 일주일 만에 도착했다.
‘난 또 패드를 우주쓰레기랑 같이 배출해버리신 줄 알았지.’
나나스몬은 특유의 빈정거리는 투로 내가 계정을 모조리 지워버린 사실을 꼬집었지만 메시지 끝에 귀국하면 연락하라며 개인패드 코드를 짤막하게 덧붙였다.
나는 진급식 전날 휴가를 받고 중앙공원으로 나왔다. 초봄의 햇살은 아직 서늘하고 창백하게 느껴졌다. 분수대는 작동하지 않았고 메마른 돌바닥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벤치에 앉아서 나는 새들이 어디로 간 건지 생각했다. 어쩌면 정원으로 갔을지도 모른다. 아이오워스 도심 인근의 잘 관리된 주택가는 둥글게 수도를 감싸고 있었다. 단지마다 정원이 있고 정원에는 스프링클러가 도니까 새들은 그곳에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름이 되면 물놀이를 즐기기 위해 중앙공원으로 몰려들 것이다. 새들은 어딘가로 영영 떠나지 않는다. 반드시 돌아온다.
나나스몬은 제복 대신 펑퍼짐한 버건디색 점퍼를 걸치고 흰 티에 어두운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나나스몬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나나스몬이 벤치로 다가오는 동안 등 뒤에 매달린 매끈하고 찰랑찰랑한 주황색 머리카락이 살아있는 뱀장어처럼 마구잡이로 물결치며 흔들렸다. 나나스몬이 내 앞에 멈춘 후에도 머리카락은 관성을 유지하며 한동안 진자운동을 했다. 나는 나나스몬의 점퍼에 찍힌 연구소 로고를 보았다.
“너 얼굴이 팍 죽었네. CF는 물 건너갔어.”
나나스몬은 인사를 생략하고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곧장 다리를 꼬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빗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여유로우면서도 만사가 지독하게 피곤하고 귀찮아보였다.
“너도 여전히 피곤해 보인다.”
내가 말했다.
“근래에도 그 프로젝트 계속 하고 있는 거야?”
“그건 벌써 끝냈지. 정확히 네가 계정 터뜨린 지 3시간 만에.”
나나스몬은 텅 빈 분수대를 바라보며 하품을 하더니 작게 김소장에 대한 저주를 퍼부었다. 그러다 내 쪽은 보지도 않고 무슨 일로 불렀냐고 했다.
“그냥 심심해서.”
“아나렉샤가?”
나나스몬은 차갑게 웃다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래, 모처럼 나왔는데 간만에 놀자. 근데 너 노는 법은 알아?”
내가 반박하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나나스몬이 재빨리 말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괜한 걱정이었네. 우리 중에 제일 인생을 즐길 줄 알던 아가씨였는데.”
순간적으로 그 말을 알아듣지 못 했다가 무법자처럼 다녔던 고학년 시절이 떠올라 얼굴이 빨개졌다. 시범근무지에서 진탕 술을 퍼마시고 어두운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던 내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나는 마치 영화를 보는 관객처럼 탈선을 일삼는 내 모습을 타인의 시선으로 보고 있었다. 지안카를라와 팔짱을 끼고 낄낄거리거나 술을 마시고 시트에 엎어져 흐느끼듯 숨을 헐떡이는 내 모습이 낯설었다. 까마득한 정도가 아니라 내 인생에서 통째로 잘려나간 과거처럼 느껴졌다. 마지막 학기에 나는 음주와 흡연을 그만두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다녔다. 하지만 동기들 대부분이 지난 몇 년 간 내가 학교 밖에서 무엇을 해왔는지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나스몬조차 알고 있었다.
“사실 난 술을 잘하는 편이 아니었어.”
수치심에 사로잡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냈다. 그건 지난 몇 달 간 나를 괴롭게 만들던 수치심과는 달랐지만 순간적으로 자기반성에 빠지게 만들었다. 나나스몬은 내 귀가 빨개진 걸 보고 재미있다는 듯 이죽거렸다.
“그래? 나는 오늘 네가 분위기 좋은 바에 데려가 줄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냥 이야기를 하러 온 거야.”
나나스몬은 웃기지도 않는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일어났다.
“그래, 그럼 카페라도 들어가자고.”
우리는 천천히 걸어서 공원을 빠져나왔다. 나나스몬은 근처에 아는 카페가 있다면서 발걸음을 옮기다 우뚝 멈추어 서더니 다른 곳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연구소 근처에 있는 카페라서 재수가 없으면 동료들의 죽어가는 낯짝을 보게 될 것 같다고 했다.
“너네 헌병단은 피곤하면 험상궂게 보이는데 우리 연구소 직원들은 이미 죽은 것처럼 보여. 뇌를 어딘가에 버려두고 움직이면 그렇게 돼. 한손에는 반드시 커피를 들고 있지.”
“내 얼굴 많이 피곤해보여?”
나나스몬은 멈추어 서더니 굳은 표정으로 내 얼굴을 응시했다.
“너 정말 시시해졌구나.”
잠시 후 나나스몬이 말했다.
우리는 아이오워스 중앙 사관학교로 이어지는 대학가 근처에 새로 개업한 것처럼 보이는 카페에 들어갔다. 발코니에 차양이 쳐져있었다. 우리는 테이크아웃으로 커피를 시키고 차양 아래에 앉아 지나다니는 시민들을 구경했다. 이번 달에는 휴양지가 연상되는 이국적인 꽃무늬가 큼지막하게 프린팅 된 원피스가 유행인 것 같았다. 다섯 명에 두 명 꼴로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다. 나는 갑작스럽게 예전으로 돌아가서 콘스탄틴과 패티와 함께 거리를 걷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는 다섯 명에 두 명 꼴로 새파란 점프수트를 입은 시민들이 거리를 걸으며 여름휴가를 계획하고 있었다. 패티도 유행에 따라 새파란 점프수트를 입고 달랑거리는 은색 귀걸이를 했는데 돌이켜보니 그때 그녀가 무척 예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불면 얇은 점프수트의 천이 패티의 까만 살결에 감겼다가 돌아왔다. 그럴 때마다 패티는 날씨가 좋다며 고개를 젖히고 웃었다. 나는 속으로 패티가 평소보다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애써 그 느낌을 무시하려고 평소보다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하지만 결국은 침울해졌고 내가 입고 있던 옷이 신경 쓰여 자꾸만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다른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콘스탄틴이 패티에게 다정하게 건네는 말이나 패티의 명랑한 대꾸 말고 다른 곳에 억지로 정신을 집중해보려고 했다. 차양이 쳐진 카페들과 ICOTS 생도복을 입은 한 무리의 남자들과 풍선을 들고 빠르게 걷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며 내가 도시의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기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나를 지나치는 시민들이 한순간 내 모습을 훑어보고 미소를 짓는데서 작은 안도감을 느꼈다. 나는 어깨 부분에 프릴이 달린 민소매로 된 하얀 셔츠와 걷으면 짧은 반바지가 드러나는 진녹색 치마바지를 입고 있었다. 유행을 따르고 싶어서 파란색 점프수트를 입으려다 외출하기 직전 마음을 바꿔 갈아입은 것이었다. 쨍한 파란색이 내 피부 톤과 맞지 않다고 생각했다. 머리는 하나로 높게 묶고 귀에는 오팔로 된 귀걸이를 했다. 콘스탄틴이 신입생도 시절 직접 귀를 뚫어주기 전에 골라준 것이었는데 그 뒤로 나는 줄곧 그 귀걸이를 내 몸의 일부인 것처럼 하고 다녔다. 심플한 디자인이라서 어떤 옷에도 잘 어울렸다. 그 날도 다른 걸 끼려다 결국 늘 하던 오팔 귀걸이를 꼈다.
그날따라 내 자신이 아주 예뻐 보였다. 하지만 ACOTS 정문 앞에서 모습을 드러낸 새파란 점프수트와 그 쨍한 빛깔이 절묘하게 어울리는 패티의 까만 피부를 보고 기가 죽었다. 보통 나는 예쁘게 차려입은 사람들을 보면 기운이 나고 절로 들떴는데 그 순간에는 어쩐지 속이 상했다. 패티가 이 외출을 아주 고대하고 있던 것처럼 느껴졌다. 콘스탄틴은 우리 중에 가장 먼저 나와서 한 사람씩 등장할 때마다 “3분이야.” “8분이야.”하고 지각한 사실을 장난스럽게 꼬집었다. 패티가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콘스탄틴의 어깨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보통 15분까지는 지각으로 치지 않는 거 몰라?”
“그렇지만 약속시간이 지나면 지각이잖아?”
콘스탄틴이 어리둥절하게 대꾸했다.
“늦어서 미안해. 옷을 갈아입는다고 그랬어.”
내가 말했다.
콘스탄틴은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그런데 지금부터 뛰는 편이 좋겠다. 시티레일 도착까지 5분밖에 남지 않았거든.”
우리는 쏜살같이 역사를 지나쳐 계단을 두세 칸씩 뛰어올랐다. 몸이 바람처럼 가벼웠다. 나는 손쉽게 도약해 스프링처럼 탄력적인 다리로 한 번에 세 칸씩 이동했다. 단숨에 열차 안으로 들어서자 에어컨 바람 때문에 이마와 허벅지에 맺힌 땀이 차갑게 굳는 게 느껴졌다. 뒤따라 콘스탄틴과 패티가 차례로 들어왔다. 패티는 귀걸이 때문에 제대로 뛸 수 없었다고 투덜거렸다. 콘스탄틴은 뛰는 동안 엉망이 된 머리모양을 다듬는다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요리조리 만져댔다. 그러다 습관이 도진 것처럼 머리카락을 오른쪽 귀 뒤로 넘겨놓고 스스로 당황해서 다시 옆머리 모양을 점검했다.
패티가 나를 보며 웃었다.
“끼워줘서 고마워. 갑자기 같이 가자고 해서 당황했을 텐데 싸샤 네가 흔쾌히 허락해줘서 기뻤어.”
“너 오늘 정말 예쁘다.”
내가 말했다.
“맞아. 그 옷 너랑 정말 잘 어울려.”
콘스탄틴이 맞장구쳤다.
패티가 수줍은 것처럼 미소 지었다.
“고마워. 싸샤 너도 아주 예뻐.”
“응. 알고 있어.”
소리 내어 말하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패티는 당황했다가 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응시하자 다시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리는 정부청사를 지나 아이오워스 중앙 공원에서 내렸다. 공원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대학로가 ICOTS 정문까지 길게 뻗어있었다. 지금으로부터 8년도 더 전이었는데도 그때 풍경과 현재가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양쪽으로 차양을 친 분위기 좋은 카페들이 쭉 늘어져있고 사이사이 고급 향수가게나 레스토랑이 입점해있었다. 카페 발코니마다 ICOTS 생도복을 입은 사람들이 패드를 번갈아보며 과제를 하거나 저들끼리 모여 수다를 떨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우리가 평소처럼 생도복을 입고 나왔더라면 분명 저들 중 하나에게 시비를 걸렸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입고 오길 잘했네.”
콘스탄틴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중얼거리듯 말했다.
커피를 홀짝이며 멍하니 거리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나나스몬이 자세를 바꿨다. 불만을 온몸에 두르고 거침없이 자신의 적대심을 표출하려는 것처럼 다리를 꼬고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나는 나나스몬을 따라 거리 한 구석으로 시선을 옮겼다. 가로수 그늘 아래서 두 남녀가 우리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ICOTS 생도복을 입고 있었는데 졸업학년으로 보였다. 나도 모르게 빳빳하게 긴장해서 나나스몬과 같이 경계태세에 들어갔다.
두 사람은 저들끼리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시선을 교환하더니 발코니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머릿속으로 한 인간을 덜컥 겁에 질리게 만들 수 있는 극악무도한 욕설이 뭐가 있을지 고민하며 당장에 싸울 태세를 갖췄다. 두 사람이 우리 앞에 섰다. 발코니가 높아서 우리는 그들을 올려다볼 필요가 없었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이 나를 향해 뻣뻣하게 몸을 돌리고 가슴 위로 공손하게 손을 얹으며 경례했다.
“나니아를 위하여.”
“나니아를 위하여. 혹시 가르강튀아 헌병단 소속 장교분이신가요?”
여자는 내 팔뚝에 찬 자주색 완장을 흘끔거리며 그것이 실례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표정으로 불안하게 내 눈치를 살폈다.
“맞아.”
내가 대답했다.
“느세파 중위님이시지.”
긴장이 풀린 나나스몬이 의자에 몸을 기댔다.
“중위님, 실례가 안 된다면 함선과 관련된 소문에 대해 여쭈어볼 수 있겠습니까?”
“무슨 소문?”
의도치 않았는데 다소 날카롭게 반응한 것 같았다. 여자가 흠칫거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분위기가 지나치게 딱딱하다는 말을 들어서요.”
나를 응시하는 나나스몬의 시선이 느껴졌다.
“큰 조직일수록 분위기는 수직적이기 마련이야. 게다가 가르강튀아는 헌병함선이잖나.”
내 모호한 대답에 남자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여자는 뭔가를 좀 더 물어보고 싶은 눈치였지만 남자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중위님. 답변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더는 시야에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졌을 때, 나나스몬이 빈 컵을 쓰레기통에 던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내가 생도들에게 사용한 묘하게 권위적인 어투를 흉내 냈다.
“다른 데로 옮기든가 간식거리를 더 시키는 게 좋겠어. 카페에선 원래 그런 법이잖나.”
“직설적으로 말했다가 내 상관 귀에 들어가면 난 끝장이야.”
나나스몬이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나는 변명하듯 말했다. 나나스몬이 나를 흘겨보았다.
“뭐래? 간식 먹을 거냐고.”
“싫어. 그냥 걷고 싶어.”
“안 피곤하냐?”
“피곤해.”
거리는 벌써 한낮의 기운으로 물들어있었다. 창백하게 느껴졌던 햇빛이 아까보다 훨씬 부드러운 태도로 피부를 쓸어내렸다. 귀국했다는 게 실감났다. 아이오워스의 계절감을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여덟 달 동안 우주를 떠돌면서 이 함선에서 저 함선으로 옮겨 탔다가 되돌아오는 것을 반복했다. 발끝이 붕 떠오른 채 중력조정장치가 적당한 수준의 무게로 나를 다시 바닥에 붙여줄 때까지 기다리는 감각에 익숙해져있었다. 가르강튀아에는 정원도 조성되어있지 않았다. 감찰선 두 곳에 작게 조성된 정원이 있기는 했지만 따로 방문한 적은 없었다. 그럴 시간 없이 바빴다.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연녹색 빛깔의 그림자를 보는 것도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내가 나고 자란 나라에 있다는 사실이 갑자기 벅차오를 만큼 좋았다.
대학가를 벗어나 조금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서자 나나스몬이 아직 담배를 피우냐고 냉소적으로 농담을 던졌다. 나는 발이 가는 데로 걷고 있을 뿐이라고 대꾸했다. 담배는 끊은 지 너무 오래 되어서 햇수도 헷갈릴 지경이라고 했다. 나나스몬은 나를 놀리는 재미가 아직 남아있어서 다행이라고 아까 했던 말은 취소하겠다며 이죽거렸다. 우리는 골목을 빠져나와 다시 거리로 들어섰다. 건물 그림자에 가려져 지나온 곳에 비해 주변이 어두웠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강이 보였다. 잔잔하게 흐르는 수면 위로 희미하게 황금색을 띤 햇볕이 부서져 사방으로 튕겨져 오르고 있었다. 나는 강이 있는 방향으로 걸어 가다보면 다리가 나오는 걸 알고 있었다. 난간이 보라색으로 칠해진 다리였는데 바닥에 나무가 깔려있어서 구두를 신고 걸으면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우리 중 유일하게 구두를 신고 있던 콘스탄틴이 그 위를 지나가며 일부러 자기 발소리를 듣기 위해 걸음걸이를 다르게 했다. 나는 콘스탄틴이 발끝으로 바닥을 찍고 단숨에 발바닥을 내리는 식으로 걷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고 다리를 건넌 후에 그에게 은근슬쩍 말을 걸었다.
“나도 구두를 신었을 땐 그렇게 해.”
“티 났어?”
콘스탄틴이 멋쩍은 듯 웃었다.
패티는 자기 앞을 쌩 지나친 2인용 자전거를 향해 작게 욕지거리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어떤 대화를 나누는 중인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패티를 살펴보고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그냥 내가 알아차린 건가봐.”
강 건너편에는 정부청사와 식당가가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두 구역 사이로 구불구불한 골목이 이어졌는데 우리가 갈 곳이 바로 거기였다. 각종 나니아산 약초들과 민간요법에 쓰이는 말린 동물들, 격식을 차리지 않은 식당들과 패티가 가고 싶다던 점집이 빽빽하게 밀집된 구역이었다. 입구에서부터 비리고 미묘하게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상인들은 호객을 위해 바깥으로 나와 있거나 가게 앞에 걸터앉아 고개만 내밀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거침없이 물건을 권할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우리는 조금 두려워하면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패티는 그 점집을 우연하게 발견했다고 했다. 전에도 호기심에 혼자 이곳에 발을 디딘 적이 있는데 그때는 겁에 질려서 상점 하나하나 제대로 살피지도 않고 빠른 걸음으로 그곳을 지나쳤다고 했다. 그러다 지나가듯 그 집을 발견했는데 한눈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껴 다음에 꼭 친구들을 끌고 와보고 싶었다는 것이다. 패티는 의료부 화학시간에 콘스탄틴에게 나와 외출할 거라는 소리를 듣고 불현듯 그 점집이 떠올랐다고 했다. 어떻게 여태껏 그 집을 잊고 있었을까? 그녀 스스로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긴 정말 범상치 않은 곳처럼 보였기 때문에 중요한 고민까지도 손쉽게 털어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패티는 우리도 분명 그 집이 마음에 들 거라고 강조했는데 어찌나 들떠보이던지 처음엔 심드렁하던 콘스탄틴도 점점 기대하는 눈치로 변했다. 말린 도마뱀이 처마에 줄줄이 늘어진 상점을 지나자 패티가 말하던 그 점집이 나왔다.
지붕은 빨간색이었고 입구에 문 대신 삼색으로 엮은 종이 줄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매달려 있었다. 암막커튼이라도 친 건지 내부는 깜깜해서 잘 보이지 않았다. 패티 말대로 뭔가 있어보였다. 음습하고 위험한 기운이 사방에 도사리는 것 같았다. 입구 위에 큼지막하게 점집임을 알리는 고대문자가 붙어있었다. 강의시간에 배워서 그게 한자라는 걸 알았다.
노파가 테이블에 두 손을 모으고 앉아있었다. 보라색 옷감으로 손수 지어 입은 투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제국 복식은 아니었다. 갑자기 나는 긴장해서 의자 가장자리에 앉아 패티의 눈치를 보았다. 이제부터 뭘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패티는 별로 겁먹지 않은 것 같았다. 나와 콘스탄틴 사이에 앉으려다 마음을 바꾸어 맨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그러더니 테이블에 직불카드를 얹어놓고 점을 봐달라고 부탁했다. 노파가 입을 열기 전에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것처럼 패티가 손뼉을 쳤다.
“이 친구들 둘이 궁합 점부터 봐주세요.”
콘스탄틴과 나 둘 다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궁합 점이 정확히 뭔데?”
콘스탄틴은 방금 떠오른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려고 했다.
“왜 나랑 콘스탄틴이 그런 걸 봐야 되는 거야?”
내가 시큰둥하게 물었다.
패티는 우리 두 사람의 반응을 보고 테이블을 두들기며 웃더니 노파를 향해 장난스러운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봤죠?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노파는 웃지 않았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입술을 쭉 내밀더니 나와 콘스탄틴과 패티의 행색을 꼼꼼하게 뜯어보았다. 그 얼굴이 어쩐지 동화에 나오는 마귀 같았다. 입술 아래쪽에 큼지막한 사마귀가 나있었다. 대체 저 얼굴로 우리의 무엇을 꿰뚫어보려고 하는 것일까. 나조차도 발견하지 못한 비밀스러운 버릇이나 미래의 실마리라도 찾아볼 속셈인 걸까. 잠시 후 노파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테이블 아래에서 카드 한 뭉치를 꺼내더니 성의 없이 늘어놓았다.
“두 사람 다 세 장씩 뽑아보세요.”
콘스탄틴은 어깨를 으쓱이다 확신 없는 표정으로 카드 세 장을 뽑았다. 패티는 방긋 웃고 있었다. 나도 카드를 뽑았다. 카드를 뒤집어보니 태양과 마차가 그려진 그림과 달과 토끼가 그려진 그림과 칼로 탑을 찔렀는데 그 탑이 피를 흘리는 그림이 나왔다. 모든 카드 위에는 큼지막한 구름이 그려져 있고 그 위에 고대 문자가 쓰여 있었는데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 시스템이 의심스러웠다. 이런 걸로 궁합이나 운명을 점칠 수 있단 말인가.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인연이나 삶이란 너무 보잘 것 없는 것이 되지 않나. 설령 위안을 얻으려고 미신인 줄 알면서도 점을 치는 것이라면 자신의 인생을 고작 카드 몇 장에 내맡기는 몰상식한 짓을 하게 되는 꼴이지 않나. 나의 의심은 카드를 건네받은 노파가 콘스탄틴과 나의 인연에 악담을 퍼붓기 시작하면서부터 점점 확신으로 변해갔다.
노파는 콘스탄틴에게 욕지거리를 하더니 상스러운 말을 늘어놨다. 콘스탄틴더러 멍청하고 얼빠진 놈이라고 하면서 쓸데없는 데에 정신적인 에너지를 소모하고 있다고 호통을 쳤다. 그러다 갑자기 내 쪽으로 그 희번득거리는 눈을 굴리며 고개를 획 돌렸다. 눈이 너무 빨리 움직이는 바람에 노파의 고개가 뒤늦게 그 움직임을 쫓아가려는 것처럼 보였다. 노파는 한동안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혀를 차면서 이건 안 되겠다고 했다. 나는 기분이 팍 상했다. 고작 카드 몇 장을 뽑아주었을 뿐인데 노파는 나에 대해 마구잡이로 험담을 할 권리라도 얻은 것처럼 굴고 있었다. 처음에 성의 없이 카드를 테이블 위에 던져놓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정중하지만 의심을 숨길 수는 없다는 유감스러운 어조로 이 점집의 시스템에 대해 물었다. 카드 그림을 읽는 법으로 어떻게 다사다난한 사람의 앞날을 파악할 수 있단 말인가. 노파는 평온한 얼굴이 되었다.
“다사다난이라니? 학생들은 모두 같은 일을 하려고 불려온 사람들이 아닙니까?”
“맞아요. 저희들은 생도예요.”
패티가 신이 나서 말했다.
“방금 저 분이 맞춘 거야?”
콘스탄틴이 되물었는데 정말 얼빠진 목소리 같았다.
두 사람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마음이 상했다. 내가 의심을 거두지 않자 노파는 믿거나 말거나 자긴 상관없다는 투로 카드 그림을 읽는 것만으로 사람을 꿰뚫어보는 건 아니라고 했다. 자신은 좀 더 깊숙한 걸 보려 든다고 했다. 고향에서 구전되어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사람에게는 각자 아니마라는 게 있는데 카드를 뽑고 자신에게 건네는 과정이 그 아니마를 꿰뚫어보는 준비단계라고 했다. 그런 아니마를 들여다보며 그림을 해석해야만 그나마 미래에 얼추 들어맞는 답을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그녀가 말하는 게 영혼이나 품성에 가깝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시선을 흘겼다.
“그럼 저는 어떤 아니마를 가지고 있는데요?”
그 말에 노파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내가 그런 질문을 한 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것처럼.
“어떻게 그런 걸 기대할 수 있단 말입니까?”
패티와 콘스탄틴을 번갈아보며 그 말을 반복했다.
“기대하십니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즐거운 거짓말만이 세상에 남아야한다고 생각해요.”
입구에 매달린 종이들을 걷고 밖으로 나오자 시장의 쿰쿰한 냄새가 밀려들었다. 아까보다 공기가 더워진 것 같았다. 따라 나온 콘스탄틴이 나를 불렀다.
“싸샤, 기분 상했어?”
“아니.”
내가 딱딱하게 대꾸했다.
“사기일 뿐이잖아. 아무렇지도 않아.”
콘스탄틴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믿지 않는다면 기분이 나쁠 이유도 없잖아.”
“넌 믿어?”
“아니.”
콘스탄틴이 어릴 적 버릇대로 뺨을 긁으며 눈을 굴렸다.
“사실 우리 두 사람이 볼 점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온 거라고 생각해.”
콘스탄틴이 나를 위로하기 위해 그런 말을 꺼냈다는 걸 알면서도 어쩐지 이 상황에 무척 부적절한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패티가 종이를 걷으며 불그스름한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콘스탄틴이 다 끝났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패티에게 뭘 물어본 거냐고 질문했다. 패티는 대답 대신 콘스탄틴의 팔짱을 끼고 고개를 기울여 나를 바라보았다. 패티는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었다.
“이 점집 잘 맞는 것 같아.”
패티가 말했다. 콘스탄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네겐 좋은 말을 해줬나보구나. 다행이다.”
콘스탄틴은 상냥한 어투로 점집에 온 보람이 있는 것 같냐고 물었다. 나는 다시 한 번 패티에게 노파에게 뭘 질문했냐고 물었지만 패티는 어깨만 으쓱일 뿐이었다. 그러더니 배가 고프다고 말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때 패티가 자기 점을 보기 위해 여기 온 게 아니라는 인상을 받았다.
갑자기 주변의 공기가 불쾌하게 느껴졌다. 고소한 냄새 사이로 역겨운 고린내가 올라왔다. 그때까지 한 번도 뜨겁게 다가온 적 없던 아이오워스의 햇볕이 후덥지근하게 느껴지는가 싶더니 냄새와 뒤섞이며 미지근하게 내 피부 곳곳으로 달라붙었다. 나는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앞서서 걷던 콘스탄틴이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나 밥 먹기 싫어.”
나는 지나치게 날카로운 내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한 번 내뱉고 나자 멈출 수가 없었다. 어느새 나는 삐딱한 자세로 불만스럽게 콘스탄틴을 노려보고 있었다. 패티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너희 둘이 먹으러 가. 나는 돌아갈래.”
쌀쌀맞게 쏘아붙인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좁은 시장 골목으로 들어갔다.
이제 보니 시장은 몸을 숨기기에 아주 적격인 장소였다. 노끈으로 줄줄이 매달아놓은 갈색 덩어리진 무언가들 때문에 걸핏하면 시야가 가로막혔다. 가까이서 보면 그건 말린 오징어나 생선 같은 것이었다. 호객 행위를 하는 상인들 때문에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금세 주변 사물들과 사람들이 내는 소리에 파묻혀버리고 말았다. 도시 한가운데에 왜 이런 장소가 있는 건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무질서와 혼란이 가득했다. 시민들은 깨끗하고 맵시 있는 옷을 입고 가벼운 금속으로 짠 바구니를 든 채 이곳저곳을 누비며 정체불명의 무언가를 담았다.
물건마다 80이오, 90이오 따위로 가격이 붙어있었다. 보통은 가격을 홀로그램으로 띄워놓고 파는데 이곳은 일일이 일회용 모니터에 화면을 지정해놓고 물건 옆이나 아래에 두는 식이었다. 나나스몬은 첨단기술의 집합소라고 할 수 있는 아이오워스에 이런 골목이 웬 말이냐고 했다. 대체 내가 이런 곳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왕년에 세련된 바를 전전하며 논 줄 알았더니 여기서 병나발을 불고 담배를 빨았냐고 했다. 발 가는 데로 왔을 뿐이라고 대꾸하는 내 말을 전혀 못 믿겠다는 것처럼 나나스몬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잠시 후 나나스몬은 시장의 무질서에서 나름의 질서를 찾아낸 듯했다. 갑자기 안정감을 찾은 나나스몬은 공중에 매달린 수상쩍은 생물들을 눈여겨보더니 패드로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투로 저게 육포라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던 정보를 말해주었다.
“아나렉샤. 저건 먹는 거라고. 저걸 시민들이 먹는단 말이지.”
“알겠어.”
“넌 저걸 먹을 수 있어? 먹으라면 네, 하고 먹을 거냐고?”
“아니.”
시장 안으로 들어갈수록 어딘지 고소하면서 쿰쿰한 냄새가 강해졌다. 나나스몬은 불현듯 좋은 생각이 떠오른 것처럼 눈을 번뜩였다. 잠깐이지만 미친 사람 같았다.
“저걸 김소장의 연말 선물로 줘야겠어.”
“여기선 상관 욕을 해도 괜찮을 것 같지 않아?”
갑자기 떠오른 것처럼 내가 말했다.
나나스몬은 말이 없었다. 그러다 다른 상점에 매달린 사각형의 갈색 덩어리를 발견하고 소리를 쳤다.
“저게 90이오래. 말이 된다고 생각해?”
“그래. 그건 김소장 생일 선물로 줘.”
“아니, 자세히 보니 80이오네.”
다음 순간 우레와 같은 소리가 사방을 갈기갈기 찢으며 울려 퍼졌다. 나와 나나스몬이 반사적으로 전투태세를 취하며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묵직한 물건이 데굴데굴 돌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거대한 뚜껑이 휘청거리며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굴러 나왔다.
앞치마를 한 여자가 식당 밖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식당 주인처럼 보였다. 그녀는 이런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재빨리 손을 뻗어 고철로 만든 거대한 솥뚜껑을 낚아챈 후 앞치마에 슥 닦으며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나나스몬은 자리에 없었다.
“나나스몬!”
나는 벌써 몇 발짝이나 앞서서 걷고 있는 오렌지색 뒤통수를 허겁지겁 쫓아간 뒤 팔을 붙잡아 세웠다.
“여기가 마음에 안 들어?”
“아니. 정신없고 구식이지만 싫은 건 아니야.”
나나스몬은 아프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고 혀를 찼다. 나는 그녀의 팔을 놓아주었다.
“난 전부터 네가 그렇게 티 나게 시치미를 떼는 게 아주 재수 없었어, 아나렉샤.”
“내가?”
나는 뭔가 더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나나스몬 등 뒤로 빨간 지붕이 보였다. 여전히 문 대신 삼색으로 엮은 종이 줄이 매달려 있었고 안은 어두컴컴했다. 하지만 오래 전부터 영업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지붕이며 기둥 따위가 먼지에 뽀얗게 슬어있었다.
홀린 것처럼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나나스몬은 내 얼빠진 얼굴을 보고 고개를 돌려 자신의 등 뒤를 확인했다.
“제국식 건물도 아니고 낡은데다 음침하네.”
나나스몬이 말했다.
“저건 점집이야.”
나는 입구를 빠져나오는 내 모습을 보았다. 하얀 셔츠에 짙은 녹색 치마바지를 입고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우울한 표정으로 잔머리를 넘기자 귓불에 낀 오팔 귀걸이가 햇빛을 받으며 반짝거렸다. 나는 내 귓불을 만져보았다. 텅 비어있었다. 마지막으로 귀걸이를 낀 게 언제였더라? 언제부터 그걸 빼고 다녔지? 마지막으로 콘스탄틴과 대화하고 의무실을 빠져나오는 동안? 콘스탄틴의 사망소식을 듣고? 아니면 그 후에 심문실을 빠져나오면서?
아니다, 나는 선명하게 기억한다. 단지 모든 것을 잊어버린 척하고 있을 뿐이다.
“전에 여기 왔었어. 패티가 점을 보자고 했었거든.”
“패티가 누구더라?”
나나스몬은 곧 떠올렸다.
“아, 의료부의 그 친구 말하는군.”
나나스몬이 얼굴을 찡그렸다. 패티랑 친한 사이였던 줄 몰랐다고 했다. 나는 패티랑 별로 친하지 않았던 나나스몬의 기억 속 내 모습에 오류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다만 나와 패티는 우연한 계기로 함께 외출하게 된 것뿐이었다.
나는 나나스몬에게 그 날의 외출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내 행동에 스스로도 당황하고 있었지만 멈추지는 않았다. 아마도 이야기를 나눌 상대를 너무 오랜만에 대면해서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모든 걸 진실하게 말할 수는 없었다. 설령 이곳이 시장바닥이고 주변을 감시할 AI가 숨어있지 않아도 그랬다. 한순간 그런 시선들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도무지 이제는 시선으로부터 달아날 수는 없는 것이다. 내 안에는 나라는 존재를 잘게 으스러뜨리고 짓뭉갠 뒤 자리 잡은 것이 있었다. 제국의 권력이 내 몸뚱이에 깊숙이 내장되어 있었다. 나는 나나스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면서도 의도적으로 콘스탄틴의 존재를 누락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아이스크림을 먹고 동전을 던지던 건 나와 패티뿐이었다. 함께 다리를 건너 시장 입구로 들어서던 것도 나와 패티였다. 점을 보고 나온 뒤 배가 고프다는 패티를 두고 쌀쌀맞게 떠나버린 내 행동은 다소 히스테릭하게 들렸다. 나는 이야기를 하다 말고 당황했다. 콘스탄틴이 사라진 이야기속의 나는 개연성을 잃고 안절부절 못하는 사춘기 소녀가 되어있었다. 그 시절 내 모든 변덕과 우울의 원인이 바로 콘스탄틴이었다. 나는 그때부터 이미 콘스탄틴을 좋아하고 있던 것이다. 멍청하기 짝이 없게도 8년도 더 전부터 나는 콘스탄틴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있었던 것이다.
“진짜 못 들어주겠네.”
잠자코 이야기를 듣던 나나스몬이 피곤하다는 얼굴을 했다.
“너 일부러 이러는 거냐?”
“…….”
“네가 생각해도 한 사람 빠지니까 이야기 앞뒤가 안 맞지?”
내가 계속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나나스몬이 내 팔뚝을 잡아끌고 골목 안쪽으로 이동했다. 상점과 점집 사이의 좁은 틈이었다. 나나스몬은 한동안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짜증과 동정심이 뒤섞인 눈빛이었다. 가까이 붙은 서로의 존재만을 의식하느라 주변의 소리가 한결 멀어졌을 때 나나스몬이 낮은 목소리로 느릿느릿 말을 꺼냈다.
“이봐, 아나렉샤. 나는 유능해….”
“그래서?”
내 목소리는 불안에 젖어 떨리고 있었다.
나나스몬이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나사 빠진 멍청이처럼 sns에 병적으로 포스트를 올려대는 어느 중위님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계정을 싹 밀어버리고 만나자고 했을 때부터 뭔가 있다는 걸 직감했지. 심심해서? 발 가는 데로? 웃기지마. 난 네 유도식 질문이나 그 수동적인 태도며 솔직하지 않은 행동거지가 아주 싸가지 없다고 생각해. 여길 봐, 아나렉샤. 그래, 여긴 AI도 없고 장교들이 쫓아올 곳도 못 돼. 용케도 이런 곳을 떠올렸어. 아주 기특해. 그런데 내가 당연히 네게 협조적으로 굴 거라고 생각하는 그 태도가 말이야, 나는 아주 싸가지가 없어.”
나는 바닥을 쏘아보았다. 주먹을 쥐려고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당혹스러울 만큼 내 몸은 전의를 상실해있었다. 얼굴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눈 아래로 열이 몰리더니 금방 축축해졌다. 입술을 물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금세 입술이 벌어지고 손이 벌벌 떨렸다.
아무 말도 없던 나나스몬이 한숨을 내쉬며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좀 숨기기라도 해….”
하지만 그건 정보값 없는 투덜거림에 불과했다. 나나스몬이 뭔가를 말해주려는 것처럼 입을 벌렸다.
그 순간 우레와 같은 소리가 찢어질 듯 시장 한복판에 울려 퍼졌다. 소리는 돌바닥 위를 묵직하게 구르더니 곧 중심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지며 굉음을 냈다. 한순간 세상이 정지한 것 같았다. 거대한 소리 앞에 짓눌린 풍경이 자리에 멈추어 서서 다음에 일어날 일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투덜거리며 바깥으로 달려 나온 식당 주인이 솥뚜껑을 들어 올리는 순간, 멈춰있던 모든 것들이 다시 기능하기 시작했다. 호객행위를 하며 목청을 높이는 상인들의 말소리가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도둑이 들면 울리는 간이경보 소리, 흥정을 하는 시민들의 목소리, 말린 약초를 작두로 썰어대는 소리가 한순간 골목을 휩쓸었다. 주변 사물들과 사람들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몸을 뒤척이고 혓바닥을 움직이고 피부를 부딪치며 위험하기 짝이 없는 비밀스러운 만남의 흔적을 게걸스럽게 삼켜대고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나나스몬의 입이 움직이며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았다. 나는 나나스몬의 작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 순간 나는 이 좁아터진 골목으로 그녀를 끌고 온 이유가 나나스몬 자신이 추측한 바로 그 이유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와 나나스몬에게 필요했던 건 처음부터 바로 이 공간 이 순간이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잠시 후 나는 결국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상처 받은 게 그렇게 티 났어?”
내가 말했다.
4
콘스탄틴과 패티를 버려두고 그곳을 떠날 때,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과 혼란으로 가득 차있었다. 시장의 열기와 무질서한 인파 틈바구니에서 그 어떠한 위안과 평화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괴로움을 숨긴 채 사람들을 밀치고 걸어 나가면서 허리를 꼿꼿하게 펼치고 턱을 치켜들었다. 조금이라도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걸 남들에게 보였다간 누군가 나를 덥석 잡아 가게 안으로 끌고 들어간 뒤 이 물건이며 저 물건이며 사라고 쓸모없는 권유를 해댈 것 같았다. 나는 언제나 내 혼란을 보여주는 것만큼이나 남들에게 얕보이는 일이 없다고 생각해왔다. 감정에 솔직한 사람들은 통제력과 자제심이 부족하고 약해보였다.
혼란이 굽이치는 골목을 빠져나온 뒤 숨을 몰아쉬면서 팔뚝을 쓸어내렸다. 끈적끈적할 줄 알았던 팔은 보송보송했다. 결국 덥다고 느낀 건 순간적인 내 감각의 오판이었던 것이다. 아이오워스의 여름은 단 한 번도 나를 불쾌하게 만든 적 없었다. 느세파의 후덥지근한 정원에서 보낸 유년시절 때문에 내 몸은 추위에 약하고 더위에는 강했다. 오늘 같은 날씨에 긴팔을 입었더라도 나는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짧고 몸에 적당히 달라붙은 얇은 재질의 옷을 입고 나온 건 그게 나와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외출을 기대하고 있던 건 패티가 아니라 나였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콘스탄틴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는 식으로 행동하다니. 점집 노파 말이 맞다. 콘스탄틴은 멍청하고 얼빠진 데다 쓸모없는 생각만 많다. 내가 줄곧 뒤처지거나 대화에서 소외당하고 있는데도 눈치조차 못 채지 않았는가. 애초에 우리 두 사람의 약속에 패티를 끼워준 것도 콘스탄틴이었다. 대체 무슨 짓이야? 패티랑 나는 별로 친한 사이도 아닌데 그것도 모르다니.
일부러 발에 힘을 주고 팔을 좌우로 흔들며 시장 골목을 벗어나는 동안 혼란스러운 마음이 잦아들었다. 슬그머니 패티와 콘스탄틴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금방 마음을 고쳐먹고는 성큼성큼 공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곳에서 시티레일을 타고 ACOTS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공원은 아까보다 더 사람이 없었다. 식사시간이라 그런 것 같았다. 다들 식당가로 몰려갔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울적해졌다. 레스토랑 테라스에 앉아 즐겁게 대화를 나누며 맛있는 요리를 먹고 있을 패티와 콘스탄틴이 떠올랐다. 설렁설렁 걷던 나는 분수대 맞은편 벤치에 앉았다. 새들이 푸드덕거리며 날아갔다가 되돌아오는 걸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곁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나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남자는 금발이었고 웃을 때 녹색 눈동자가 반쯤 접혀 귀여운 인상을 주었다.
“안녕, 싸샤.”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벤치에 기댔던 몸을 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지네딘이니?”
지네딘은 지휘부 동급생으로, 늘 안경을 쓰고 앞머리를 음침하게 내리고 다녔는데 어쩐 일인지 그 날은 안경을 벗고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정돈한 상태였다. 나는 그의 빛나는 녹색 눈동자를 쳐다보며 놀랍다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정말이지 못 알아봤어. 시비 걸려는 ICOTS 남자애인 줄 알았어.”
“연극 보러 나온 거야.”
“외출할 땐 늘 그렇게 입고 다니니?”
“대학가 근처로 외출할 때만. ICOTS 사람들과 마주칠 일이 많으니까. 싸샤 너도 그래서 오늘 그렇게 입고 있는 거 아냐?”
나는 망설이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디 다녀오는 길이야? 벤치에 앉아있는 뒷모습을 보고 한눈에 너인 줄 알아봤어.”
“정부청사 근처. 하지만 이제 돌아갈 거야.”
지네딘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연극까지 한 시간이 남았는데 잠깐 함께 있어도 되냐고 물어보았다. 나는 아무렴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어깨를 으쓱였다. 지네딘은 어색한 표정으로 확신 없이 한 번 더 물었다.
“같이 있어도 돼?”
“응.”
지네딘이 내 쪽으로 좀 더 가까이 앉았다. 나는 다시 분수대 근처를 맴돌며 물놀이를 하는 새들을 구경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지네딘은 내 태도에 좀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내가 오늘 아주 예쁘다고 쑥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는 고맙다고 대답한 뒤 다시 새들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새들을 구경하는 게 아니라 콘스탄틴을 생각하고 있었다. 아까처럼 어깨를 으쓱였을 때 콘스탄틴이라면 금방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채고 굳이 물어보지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네딘이 또 말을 거는 바람에 나는 생각을 중단하고 고개를 돌려야 했다.
“나랑 연극보지 않을래?”
“한 시간밖에 안 남았다며?”
“별로 유명하지 않은 극이라서 지금도 자리가 좀 남았을 거야. 다시 예매하면 돼.”
“로맨스야?”
“아니.”
“그럼 관심 없어.”
지네딘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어보였는데 조금 어색해보였다. 나는 뒤늦게 내 무례를 깨닫고 덧붙였다.
“미안해.”
“아니야.”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갑자기 지네딘은 내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평소에 필기를 할 때 얼굴을 미묘하게 찡그리는데 알고 있냐고 했다. 그런가하면 엄청 집중하고 있을 때는 이미 머리카락을 넘겨놓고 다시 한 번 넘기려고 손을 올렸다가 어정쩡하게 내린다고 했다. 가끔 혼자 다른 생각에 잠겨있을 때에는 의식적으로 수업에 집중하려고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되돌아와 자세를 바로잡는다고 했다. 그래서 자기는 항상 내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면 한눈에 알아본다는 것이다.
지네딘의 말이 이어질수록 나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연극을 다소 무례한 태도로 거절해버린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느닷없이 내 수업태도를 꼬집을 건 뭐란 말인가. 내가 강의를 들을 때 정말 그렇게 행동했단 말인가. 칠칠맞지 못하게 남들에게 훤히 읽히는 태도를 보였단 말인가. 콘스탄틴은 나를 뭐라고 생각했을까? 아무리 부서가 갈린 후라 겹치는 수업이 적어졌다 한들 분명 내가 이런 버릇이 있는 걸 알아차렸을 텐데 슬쩍 언질이라도 주면 좋았을 걸 여태껏 아무 말도 해주지 않다니. 콘스탄틴은 정말이지 얼간이고 제때 말해줄 줄 모르는 친구였다. 지금쯤이면 패티와 레스토랑에서 멋진 식사를 즐기고 있겠지. 나는 여기 앉아서 지네딘에게 수업태도나 지적당하고 있는데. 콘스탄틴이 정말 미웠다.
울적한 와중에 심술까지 났다. 나는 지네딘에게 연극을 보러가자고 했다. 지네딘은 화색이 돌더니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공원을 빠져나오며 생각했다. 그래, 비록 내 취향의 연극은 아니지만 뭔가 보고 돌아가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거야. 콘스탄틴만 멋진 하루를 보내라는 법은 없지. 게다가 지네딘은 나를 예쁘다고 말해줬잖아. 얼간이 콘스탄틴보다는 나한테 기분 좋은 말을 더 많이 해줄 거야.
대학로 안에 있는 극장가로 들어섰을 때 갑자기 우르릉 소리가 나더니 하늘이 어두컴컴해졌다. 시민들이 익숙하게 테라스나 차양 밑으로 걸어들어가 자기 패드나 시계 따위를 만져 우산을 불러왔다. 투명한 막을 머리 위로 드리운 시민들은 다시 거리로 나와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지네딘도 내 손을 놓고 자기 패드를 만지기 위해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구릿빛 팔뚝과 옆선을 쳐다보던 나는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봤다. 비가 쏟아지기 직전의 하늘은 음침하고 음험해보였다.
날씨는 불안과 혼란의 전조를 숨긴 채 우르릉거리며 애꿎은 천둥소리로 나를 위협하고 있었다. 갑자기 정신이 돌아왔다. 변덕을 부린 건 나였다. 콘스탄틴은 내가 속상한지조차 모를 것이다. 내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우울을 콘스탄틴이 대체 무슨 수로 알아챈단 말인가. 단지 시장의 혼돈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노파의 술수가 미심쩍었다는 이유로 즐거운 외출을 기대했을 콘스탄틴에게 그런 식으로 심술을 부리다니. 그래놓고서는 내 수업태도나 지적하고 앉아있는 멍청한 지네딘과 함께 내 취향도 아닐 것 같은 연극을 보려고 빗속을 뚫고 대학로를 걸어가고 있다니.
나는 지네딘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났다.
“미안해.”
지네딘이 우산을 펼치다 말고 내 쪽을 돌아보았다. 나는 진심을 담아 소리치듯 말했다.
“지네딘! 미안해, 나는 돌아갈래. 사실 오늘 콘스탄틴이랑 패티랑 나왔어. 걔네를 먼저 두고 왔어. 날 걱정하고 있을 거야. 돌아갈래.”
그런 뒤 사과의 의미로 지네딘의 손등을 다정하게 치고 몸을 돌려 공원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지네딘이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것도 같았지만 천둥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았다. 곧이어 비가 쏟아졌다. 나는 쏜살같이 역사까지 달려 내려간 뒤 축축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막 도착한 시티레일의 차가운 에어컨 바람을 느끼며 ACOTS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동안 나는 창가에서 비로 젖어가는 아이오워스 시내를 불안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근래에도 몇 번 이런 적이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변덕스럽고 곧잘 우울하거나 짜증이 났다. 3학년 무렵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시기는 금방 지나갔고 나는 곧 안정을 되찾았다. 내 사춘기는 그런 식으로 시시하게 끝나버렸다. 그래서 다시 돌아온 걸까? 충분히 그 시기를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그 엇비슷한 시기가 찾아온 걸까? 하지만 평소에는 이런 식으로 굴지 않았다. 다만 콘스탄틴에게 이따금 짜증을 내고 후회하는 일이 좀 있었을 뿐이다. 콘스탄틴에게 미안한 마음이 점점 더 커져갔다. 나는 ACOTS에 돌아가면 콘스탄틴을 기다렸다가 오늘 일을 사과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공용 휴게실로 돌아왔을 때, 가장 먼저 나를 반겨준 건 패티였다. 곁에 콘스탄틴이 따뜻한 차를 손으로 감싸고 앉아있었다. 콘스탄틴은 벌써 한참 전에 돌아와 머리를 감고 옷까지 갈아입은 채였다. 패티는 내게 어딜 갔었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성큼성큼 콘스탄틴에게 다가갔다. 콘스탄틴은 내 모습을 보더니 조금 놀란 것 같았다.
“그냥 비를 다 맞고 온 거야?”
“오늘 지네딘을 만났어.”
“그래?”
콘스탄틴이 어리둥절 대꾸했다.
“그래. 연극 보려고 나왔다는데 안경을 벗고 머리까지 올렸더라. 엄청 근사하던걸.”
대체 내가 왜 이러는지 몰랐지만 그냥 지껄였다.
“나랑 같이 연극을 보자고 했어. 여태까지 걔랑 거기 있었어. 엄청 재밌는 로맨스극이더라.”
콘스탄틴은 내가 기분이 상한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내 얼굴을 유심히 살피며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대답을 골랐다.
“좋았겠다.”
그런 뒤 걱정스럽게 덧붙였다.
“얼른 씻고 와. 감기 걸리면 어떡해?”
“코스챠 넌 얼간이야.”
방으로 돌아가는 내내 나는 훌쩍였다.
콘스탄틴과 엮인 모든 일이 이런 식이었다. 설령 콘스탄틴이 더는 내 곁에 존재하지 않더라도 나는 그에게 받은 상처를 좀처럼 숨길 수 없고 그와 관련된 거라면 요령 있게 처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나스몬 앞에서 훌쩍이는 나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외출의 속상함을 숨기지 못하고 복도를 가로지르며 훌쩍이는 열일곱 살에서 한 발도 나아진 게 없었다. 아니다. 나는 감정을 숨기는 일에 항상 서툴렀다. 그래서 생도시절 나나스몬과 시종일관 부딪칠 때마다 고함을 치며 내가 정말로 느끼고 있는 것들을 감추려고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부 소용없다. 내 노력들은 나나스몬에게 티 나게 시치미를 떼는 일로밖엔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나스몬마저 알고 있다면 동기들 전부가 알고 있을 게 뻔했다. 그동안 내 포스트며 댓글을 보고 무슨 생각들을 했을까? 왜 나는 항상 이런 식이지? 왜 가장 숨기고 싶은 마음마저 들키고 마는 걸까?
훌쩍이던 나는 다른 곳을 끊임없이 쏘아보고 시야를 위쪽으로 옮기는 방식으로 간신히 눈물을 견뎌냈다. 빨개진 눈이 가라앉을 때까지 심호흡을 했다. 그런 뒤 나나스몬을 바라보았다.
나나스몬은 일부러 다른 곳을 보며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기다려주고 있었다. 나는 기분이 나아졌다.
“너한테 그걸 물어보려고 만나자고 한 건 맞지만 일부러 여기 데리고 온 건 아니야.”
코 맹맹한 목소리가 나와 헛기침을 했다.
“정말로 발 가는 데로 걷다보니 여기였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결과적으로 적절한 장소선정이었어.”
“응.”
“그래….”
한동안 우리는 어색하게 침묵을 지켰다. 갑자기 나나스몬과 너무 가까이 붙어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깨를 비틀어 우리 사이의 틈을 벌려보려다 오히려 분위기를 더 어색하게 만들고 말았다. 나나스몬은 혀를 차더니 틈을 막고 있던 자세를 바꾸어 골목으로 빠져나왔다.
“우니까 기분은 좀 낫던?”
“나 안 울었어.”
“그래. 거의 울었잖아.”
나는 허공을 흘겼다.
“넌 이렇게 우는 모양이지?”
나나스몬이 피식 웃었다.
“하긴. 2학년 때 엉엉 울던 걸 고려하면 이건 운 축에도 안 들겠다.”
“나나스몬!”
나나스몬이 특유의 ‘프하항’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잠시지만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나나스몬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는지 묘한 표정으로 금방 웃음을 멈췄다.
잠깐 주변을 돌아보던 나나스몬은 목소리를 낮췄다.
“아나렉샤. 너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짐짓 모르는 척 되물었지만 내 목소리도 속삭이는 듯 했다. 나나스몬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더니 입술을 움직여 코… 하고 입모양을 만들었다. 순식간에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게 느껴졌다. 시민들이 일순 고개를 돌렸다. 부릅뜬 눈들이 나나스몬과 나를 또렷이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시선들이 우리 곁에 있었다. 온몸이 오그라들고 갑자기 심장이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다.
나나스몬의 입술이 동그랗게 모이기 직전, 갑자기 내 패드가 울렸다. 우리 둘 다 반사적으로 내 주머니를 쳐다보았다. 연락이 오고 있었다. 시민 한 사람이 나나스몬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그는 돌아서면서 얼굴을 찡그리고 우리 두 사람을 의문스럽게 흘겨본 뒤 혀를 차고 고개를 돌렸다. 어디선가 호객하는 목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시민들은 골목 틈에 서있는 우리 두 사람을 무관심하게 스쳐지나갔다.
나는 패드를 꺼냈다. 나나스몬은 발신인을 확인하고 불쌍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경멸과 짜증을 숨기기 위해 심호흡을 한 뒤 나는 통신을 받았다.
“나니아를 위하여. 무슨 일이십니까?”
“느세파 중위. 자네 중앙시장에 있지.”
제라스 부함장의 딱딱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부동자세로 섰다.
“오늘 자네의 불미스러운 대화에 대한 심문이 있을 예정이니 당장 복귀하도록.”
제라스가 부드럽게 덧붙였다.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지 마, 중위.”
나는 창백하게 질렸다. 통신이 종료된 패드를 집어넣는 동안 정신이 멍해졌다. 나나스몬이 내 손목을 붙잡고 의뭉스러운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추궁하는 눈빛이었다. 나는 시선을 피하려다 작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사과부터 했다. 나나스몬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데?”
“들킨 것 같아.”
“뭘?”
나나스몬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구체적으로 말해.”
“모르겠어.”
나는 두려움을 숨기려고 딱딱한 말투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 개자식이 내가 중앙시장에 있는 걸 알고 있어.”
“그리고?”
“불미스러운 대화를 한 건에 대해 심문하겠대.”
나나스몬은 잠깐 침묵했다.
“시장에서 나눴던 대화 때문은 아닐 거야.”
“어떻게 확신해?”
나나스몬은 주머니에 손을 욱여넣은 채 점퍼를 벌려 안쪽을 보여주었다. 지퍼 이음새 쪽에 티가 나지 않도록 섬세하게 접착된 금속제 물체가 보였다.
“통신교란 장치야. 갑자기 연락이 두절된 것처럼 신호를 끊어버리는 게 아니라 그럴싸한 신호로 대체해서 들려주지.”
“네가 만든 거야?”
나나스몬이 냉소적으로 코웃음을 쳤다.
“당연하지. 제국에 넘어간 기술이면 의미가 있겠냐? 말했잖아, 아나렉샤. 내가 당연히 협조할 거라고 생각하는 게 괘씸하다고. 나도 내 살길 없인 이런 자리 안 나와.”
나는 대답 대신 허공을 흘겼다. 나나스몬은 점퍼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요지는 말이야, 굳이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었다는 거지.”
“…아까는 적절한 장소선정이었다더니.”
“칭찬해준 거야. 아나렉샤치곤 기특한 발상이잖아?”
입을 삐죽이자 나나스몬이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역시 나는 유능하다니까.”
시민 한 사람이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나나스몬은 혀를 차며 어깨를 털어냈다. 벽 쪽으로 몸을 붙이며 말했다.
“아무튼 너 가봐야겠네.”
“응.”
내가 어두운 표정으로 대꾸하자 나나스몬이 아까보다 미묘하게 부드러운 어투로 말했다.
“별일 아닐 걸? 보나마나 또 쓸데없는 일로 심술이겠지.”
“그게 문제야.”
이번에는 정말로 표정을 숨길 자신이 없어서 나나스몬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부함장은 뭐가 됐던 일단 불려오면 내가 짜증을 숨길 수 없을 때까지 집요하게 괴롭히거든.”
시장을 벗어나는 동안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나나스몬의 통신교란 장치를 확인한 이후에도 내 불안감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걷는 동안 흘끔거리며 주변을 살피자 나나스몬이 티 좀 그만 낼 수 없냐고 면박을 주었다. 그렇지만 나나스몬 역시 어느 정도 긴장을 놓지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고 그 은근한 불안을 감지한 나는 점점 더 창백해졌다. 마침내 인적이 드문 공원으로 돌아온 후에야 우리 두 사람은 안정을 되찾았다. 한가로이 걷는 시민들과 뒤뚱거리며 걷는 통통한 아이들이 만드는 평화로운 분위기가 우리 몸으로 전이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나나스몬에게 작은 목소리로 뒤늦게 고맙다고 말했다. 나나스몬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손으로 머리카락을 빗어 넘겼다.
“은혜 갚으려고 굴다가 괜히 사고나 치지 마.”
나나스몬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갈게.”
나는 몸을 돌렸다.
역에 들어서기 전 나는 고개를 돌렸다. 공원을 가로지르며 버건디색 점퍼가 천천히 멀어지고 있었다. 나나스몬의 주황색 머리카락이 좌우로 출렁이며 튀어오를 때마다 점퍼 등판에 찍힌 연구소 로고가 반쯤 가려졌다가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희미한 바람에 그녀 정수리에 돋은 더듬이가 흔들리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나나스몬에게 애틋함을 느껴 몇 발자국 걸어 나오면서 소리를 쳤다.
“나나!”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아이가 울음을 터뜨렸다. 남자가 넘어진 아이를 안아 올려 달래기 시작했다. 나는 멈추어 섰다. 나나스몬은 등을 돌리지 않고 똑바로 걸어갔고 코너를 돌아 종적을 감추었다.
5
ACOTS에는 나나스몬을 나나라고 부르는 생도들이 종종 있었다. 내가 나나스몬에게 따로 애칭이나 약칭을 물어본 적이 없음에도 그녀의 애칭을 기억하고 있는 건 이 때문이다. 콘스탄틴도 나나스몬을 나나라고 불렀다. 생도시절 나는 단 한 번도 나나스몬의 애칭을 부른 적이 없었다. 그건 나나스몬도 마찬가지였다. 기억하는 한 그녀가 나를 싸샤라고 부른 적은 없다. 우리 둘은 꽤 오랫동안 사이가 나빴다.
콘스탄틴은 아주 오래 전부터 나를 싸샤라고 불렀다. 아마 우리가 열 살에서 열 한 살쯤 먹었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여덟 살에서 아홉 살 때였을 수도 있다. 너무 오래 전이라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가든에서 ‘새로운 이름 짓기’라는 놀이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아이들은 이름이 길건 짧건 상관하지 않고 기존의 이름에서 파생된 애칭이나 약칭이 있다면 그것을 따왔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자신이 짓거나 가까운 친구가 새롭게 붙여주면서 놀이 참여인원을 가든 전체로 확장시켰다. 한 번 애칭이 생기면 절대로 원래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게 유일한 규칙이었는데, 굳이 그 규칙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새롭게 애칭을 갖게 된 아이들은 한동안 오로지 그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했기 때문에 누군가 본명을 부르면 “내 지금 이름은 그게 아니야.”라며 고쳐주고는 했다.
처음에는 우리가 만든 그 애칭을 우리끼리 장난삼아 불렀다. 그러다 애칭을 가지고 있지 않은 아이들과 굳이 애칭을 갖고 싶어 하지 않는 소수의 아이들까지도 우리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가든 교사들까지 우리를 새로운 이름으로 부르는 일이 벌어졌다. 오로지 AI 차차노만이 우리를 본명으로 불렀는데, 시간이 좀 더 흘러 내가 열두 살쯤 되었을 때, 지금은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는 가든 아이가 “사실 그 놀이는 차차노를 따돌리는 놀이였어.”라고 말한 적 있다. 그때 마찬가지로 지금은 누군지 가물가물한 다른 아이가 곧장 “바로 그래서 우리가 그 놀이를 한 거야.”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남아있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아마 비슷한 뉘앙스이긴 했을 것이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그 놀이를 할 때 중요하게 여긴 지점도 그와 비슷했다. 우리는 우리가 지은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거나, 반대로 다른 아이를 그 아이가 새롭게 불리기로 결심한 이름으로 호명할 때마다 우리 자신이 특별해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전까지는 한 개의 이름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는 두 개, 많게는 세 개나 되는 이름으로 스스로를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다 어감이 비슷한 애칭이 생겨 누군가를 불렀을 때 동시에 두 사람이 돌아보는 일도 종종 벌어졌지만 그 놀이는 중단되는 법이 없었다. 어떤 아이들은 그런 지점까지도 즐거워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보통 그런 경우, 우리는 혼선을 방지하기 위해 애칭 앞에 그 아이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징이나 별명을 새롭게 붙였다. 콘스탄틴도 그렇게 만들어진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애의 애칭은 ‘코스챠’였고 별명은 ‘코스차차노’였다.
놀이가 시작되기 전에는 서로가 서로의 이름을 부를 때 혼선을 빚는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애칭은 물론이고 별명조차 필요하지 않았다. 우리 중 단 한 명도 의미가 겹치거나 혹은 부르기에 헷갈릴 법한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이름은 태어난 직후 차차노에 의해 선별에 혼선이 없도록 낱말과 어감을 고려하여 붙여졌는데, 적어도 같은 공간에서 생활할 가능성이 있는 연령대 아이들 전부가 전혀 다른 낱말과 의미로 조합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가든을 뒤져보더라도 같은 기수, 혹은 이후 사관학교나 행정학교에서 만날 가능성이 있는 5년 간격의 연령대 중에서는 비슷한 이름을 결코 찾을 수 없었다. 따라서 우리가 받은 이름은 원래부터 우리 집단 안에서는 굉장히 특별한 것으로 여겨지거나, 여겨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의견이 팽배했고 어떤 아이들은 바로 거기서 AI나 국가를 좋아할 이유를 찾기도 했다. 그렇다. 바로 그 이유로 우리는 반드시 구분될 수 있으면서 동시에 하나로 묶일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오로지 아칸의 아이들만이 그러한 체제로 이름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이름을 만들고 부르는 일은 정말로 놀이에 불과했고 단 한 번도 심각하게 다루어진 적이 없었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분위기에 휩쓸려 크게 고민하지 않고 애칭이나 별명을 붙였다. 어떤 아이들은 단지 각별히 여기는 친구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그 놀이에 동참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기저에는 우리 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한 욕망이 숨어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서로의 애칭을 부를 때마다 우리를 반드시 아칸의 아이로 인식하게끔 하는 이름으로부터 벗어난다는 사실을 무의식중에는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놀이를 ‘새로운’ 이름 만들기 따위로 불렀던 것이다. 그 놀이는 우리의 특별한 태생과는 관계없이 오히려 적극적으로 그 이유를 배제하면서 이루어진 은밀한 쾌감을 제공했다. 좀 더 나중에 가든 아이가 그 놀이를 돌이켜보고 ‘차차노를 따돌린다’고 표현한 건 그녀 역시 그 쾌감 아래에 깔린 우리의 의지, 미래에 장교나 행정직원이 아니라 다른 것이 될 수도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을 믿고 싶어 했던 어린 날의 욕망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좀 더 과장해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의 탄생 목적과 깊게 연관된 국가의 의지에 반하는 욕망을 아주 어린 시절에 한 번쯤은 품고 있었던 셈이다.
아마 모든 가든에서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을 것이다. 느세파 가든만 해도 열 살이 되기 이전의 아이들이 종종 자신들이 장교가 아니라면 무엇이 될 수 있을 지로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벌어지곤 했다. 시티레일, 나니아에서 온 거대한 문어, 초대형 함선, 심지어는 AI가 되고 싶다는 아이도 있었다. 사실 열 살이 넘어서도 우리들은 곧잘 그런 이야기를 주제 삼았는데, 차이가 있다면 그 무렵의 우리들은 보다 진지한 태도로 가든 생활 동안 알게 된 각자의 특기와 적성을 살린 구체적인 직업을 거론했다는 점이다. 그러면서도 사실 정말로 그런 미래를 기대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가볍고 유쾌한 어조를 사용하려고 노력하는 식이었다. 사관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종종 생도들 사이에서 이러한 주제가 거론되었던 것도 같지만 아마 그들 역시 배치를 앞둔 가든 아이들과 비슷하게 체념과 우울을 숨기는 방식으로 이러한 주제를 다뤘을 것이다.
나는 남몰래 내 애칭을 만들었다. 특별하게 여기는 가까운 친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일을 크게 슬퍼하거나 외롭게 느낀 적은 없다. 나는 원래 외로움을 잘 타지 않는 편이다. 게다가 그렇다고 내가 가든에서 친구가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고정적으로 어울리는 무리가 없었을 뿐이지 필요할 때 찾아 나서면 나를 놀이에 끼워줄 아이들은 언제든 만날 수 있었다.
소속된 무리가 없었던 건 내가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논 적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보는 일은 좋았지만 직접 그 속에 껴서 놀이에 참여하고 싶지는 않았다. 예나지금이나 사람을 만나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금방 힘이 들었다. 아이건 어른이건 간에 상호작용할 수 있는 모든 존재들이라면 어느 순간부터 내 힘을 빨아먹고 있는 것 같았다.
드라마 시청 시간에도 나는 구석자리에 앉았다. 느세파 가든에서는 점심을 먹기 2시간에서 3시간 전마다 시민들이 한때 열정적으로 시청했던 통속극을 틀어주었다. 아이들은 아침을 먹고 조금 뒹굴거리다 시간이 되면 TV 앞에 모였다. 나는 소파 안쪽에서 쿠션을 안고 있거나 카펫 끄트머리에 앉거나 소파 팔걸이 아래에 몸을 숨긴 채 화면 너머에서 벌어지는 극도로 낭만적이고 매혹적인 사랑 이야기를 시청했다. 주인공들은 언제나 고위급 장교였고 상대역은 하관이거나 극단적으로는 나니아민 출신의 시민이었다. 전혀 접점 없는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는 건 우연하고도 진중한 사건이다. 상대역은 사적인 갈등을 빚으며 장교와 빠르게 가까워지는데, 장교는 다소 지나칠 만큼 변화무쌍한 감정 상태를 경험하며 속절없이 그에게 빠져들고 만다. 신분 차이가 극명할수록 클라이맥스는 극적으로 느껴졌다. 장교들은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상대와 함께 도망치거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을 행사해 그를 보호했다.
나는 이러한 드라마 서사에 깊게 몰입했고 종종 내 자신을 장교에 대입해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중요한 건 당시 느세파 가든이 방영하는 모든 드라마가 표면적으로 사랑과 연애의 낭만을 표방하면서도 뜯어보면 비슷한 이데올로기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나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볼 만큼 나이가 많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메시지만큼은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던 듯싶다. 나는 모든 로맨스가 함선 장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중이며 함선을 탄 이들만이 모험과 낭만의 중심이 되는 이러한 사태를 진작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 그리고 잘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들이 로맨스 서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도록 허용해주는 건 다름 아닌 이 드라마를 골라온 차차노인데, 그 기준이 바로 그들의 위치와 신분이라고 생각했다.
드라마 시청 시간이 끝나면 때로 아이들은 흥분에 차 이다음에 커서 어떤 사랑을 할 것인지 늘어놓기도 했다. 당시 나를 포함한 몇몇 아이들은 장교가 되면 저렇게 환상적인 일들을 겪게 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 아이들은 보통 상상을 공유할 때에도 장교가 된 자신들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집중하다가 정작 로맨스 이야기는 뒷전이 되기 십상이었다. 나는 매번 그 틈에 끼기보다는 적당히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전부 들을 수 있는 뒤쪽에 조용히 앉아있었는데, 아이들과 어울리게 되는 사태를 피하면서 동시에 주제에서 소외되지 않을 수도 있는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좀 더 솔직해지자면, 당시 내게는 주인공 장교가 하고 있는 헤어스타일이나 옷매무새를 유심히 살피는 버릇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기억해놨다가 드라마가 끝나면 직접 따라해 보는 일을 즐겼는데, 아마 나는 그 모습을 다른 아이들에게 직접적으로 보이는 사태는 피하되 좀 더 겸허한 방식으로 우연하게 눈에 띄는 상황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콘스탄틴이 내게 와서 “와, 그거 정말 율카 대위랑 똑같다. 네가 땋은 거야?”라고 큰 소리로 물어보자마자 벌떡 일어나 그 애의 손등을 후려친 건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콘스탄틴은 정말로 깜짝 놀랐는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 심지어는 한 발 물러서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마도 그 직후에 내게 뭔가를 더 말했던 것 같은데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당시 나는 주변 아이들이 콘스탄틴의 말을 듣지는 않았나 확인하는데 정신이 팔려 그 애를 때려놓고도 순간적으로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이들이 여전히 나로부터 등을 돌리고 율카 대위가 탄 함선을 묘사하는데 열중하고 있음을 확인하자, 쭈뼛 섰던 머리카락이 내려앉는 게 느껴지면서 콘스탄틴의 손등을 후려쳐놓고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은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콘스탄틴에게 사과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눈을 마주친 콘스탄틴이 아까보다 낮고 작은 목소리로 잡지를 읽어본 적 있냐고 먼저 입을 열었다. 그 애는 아주 빠른 속도로 속삭이듯 물었고 그래서 나는 콘스탄틴이 조금 전까지 아이들의 반응을 살피느라 정신이 팔려 있던 내 모습에서 유추한 분위기를 토대로 그 애 나름의 배려를 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때 나는 “그런 걸 알아서 뭐하게?”라거나 “신경 꺼.”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해 그전까지 아무에게도 구체적으로 드러낸 바 없는 내 버릇을 여전한 비밀로 남겨두고자 하는 뜻을 그 애에게 날카롭게 전달할 수도 있었다. 사실 거의 그렇게 말할 작정으로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싸울 태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내 표정을 유심히 살피는 콘스틴틴의 얼굴을 마주보는 순간, 나는 그 애가 저지른 터무니없는 실수에 화가 난 게 아니라 실은 몹시 당황했을 뿐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러자 사과의 타이밍을 놓치고 만 내 모습이 다소 부끄럽게 느껴졌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콘스탄틴의 배려가 무척 고맙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당시 나는 콘스탄틴이 섣불리 잡지 이야기를 꺼낸 것에 대해서는 조금 화가 나있었다. 느세파 가든의 G섹터는 도서관으로 운영되고 있었기에 동화책과 소설은 물론이고 인문학 소양을 쌓는데 권장되는 비문학 서적들까지 쉽게 접할 수 있었는데, 잡지와 신문은 따로 요청하지 않는 한 자연스럽게 구할 수 있는 읽을거리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류의 데이터가 따로 저장되지 않았던 건 단지 가든 아이들의 기초지식과 감수성을 함양하는 목적으로 운영되는 도서관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인 것 같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것들이 도서관에 구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든 교사나 차차노가 실은 우리가 잡지나 신문을 탐독하는 일을 탐탁찮게 여기고 있는 거라는 은근한 믿음이 존재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몇몇 아이들은 가든의 보호자들이 우리와 외부세계 사이의 간극이 좁혀지기를 원치 않아 의도적으로 잡지와 신문 데이터를 누락한 거라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면 이러한 믿음이 어느 정도는 모든 아이들에게 각자 다른 방식으로 존재했다는 생각이 든다. 잡지나 신문이 도서관 DB에 저장되어 있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대다수의 아이들이 그것을 궁금해 하지 않는 척하거나 오히려 터부시한 건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우리는 그것들을 읽는 행위를 통해 바깥 세계의 사람들, 아칸의 일반 시민들과 우리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내거나 공감하는 일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일상적으로 장교나 행정직원이 아닌 다른 것이 된 미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진실로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일반 시민과 우리의 삶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을 어릴 적부터 아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앞서 말한 ‘새로운 이름 만들기’를 진행하면서도 규칙을 어긴 아이에게 “내 ‘지금’ 이름은 그게 아니”라고 강조한 걸로 미루어보아 어떤 순간에서든 우리는 결국 우리들의 특별한 태생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아무튼지 간에 나 역시도 이러한 분위기에 어느 정도는 휩쓸려 있었다. 그래서 사실은 오래 전부터 잡지를 읽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음에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격렬하게 그것에 전혀 관심 없어하는 태도를 꾸며냈다. 누군가 내게 잡지나 신문에 관심이 있냐는 식으로 물어보면, 금기를 어길 작정이냐는 듯 화들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고 “뭐? 그럴 리가 없잖아.”라고 대답하는 식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유지되어온 나의 태도로 미루어보았을 때, 콘스탄틴이 내게 잡지를 언급한 건 여러모로 무척이나 섣부른 행동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애는 이미 내가 은근한 방식으로밖에 드러내지 않았던 내 관심사를 큰소리로 외치면서 다가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콘스탄틴의 입에서 잡지라는 단어가 발음된 그 직후부터 퉁명스럽고 거칠게 대처하는 식으로 그 애를 가능한 한 빨리 쫓아버리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내가 콘스탄틴에게 아주 다른 태도를 취한 건 그 애가 순간적으로 보여준 몸에 밴 그 애 자신의 습관, 상대의 난처함을 알아차리고 그에 맞춰 자신의 태도를 조정하는 배려에 감화되었기 때문이다. 내 얼굴을 주의 깊게 살피며 목소리를 낮추던 콘스탄틴의 태도에는 내가 숨기고 싶어 하는 어떤 것을 함구해주겠다는 암묵적인 협조가 있었고, 그 협조는 내가 가든에 팽배한 분위기에 동조하지 못해 결국 소외된 존재일 지도 모른다는 지난날의 공포로부터 벗어나도록 도와주었다. 콘스탄틴의 질문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면서도 막연한 위안을 느낀 것, 제때 사과할 타이밍을 이미 놓쳐버렸음에 부끄러움을 느낀 것, 더 나아가 콘스탄틴의 이러한 배려가 고맙게 느껴진 건 그 때문이었다. 나는 잡지를 읽어본 적 있냐는 그 애의 질문에 솔직하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런 뒤 조금의 동지 의식을 느끼며 재빨리 덧붙였다. “너는?”
그때 콘스탄틴이 구체적으로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이제 가물가물하다. 어쨌든 중요한 건 그 일이 있고 얼마 되지 않아 콘스탄틴이 도서관에서 패드를 대여해왔는데, 그 패드 안에 다름 아닌 「뉴칸즈 9월 호」가 저장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따로 차차노에게 요청했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당시 콘스탄틴과 내 나이를 고려했을 때, 그 애 역시 또래 아이들 사이에서 만연했던 그러한 분위기로 인해 가든 교사나 차차노에게 패션잡지 데이터를 원한다고 구체적으로 요청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콘스탄틴은 좀 더 나이를 먹은 아이들, 개중에서도 더는 가든의 이러한 분위기에 동조하지 않는 아이들 중 하나로부터 그 데이터를 얻었을 것이다. 가든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는 동안이라면 한번쯤 접했을 비밀스러운 추측과 분위기, 그 기저에 깔린 공포와 우울의 시기를 졸업하고 이제 막 새로운 공간으로 배치되기를 기다리는 상급생들이라면 분명 한 둘쯤은 잡지나 신문 데이터를 아무렇지 않게 가지고 있을 법했으니까 말이다.
콘스탄틴은 우선 가든을 한 바퀴 돌아보고는 나를 찾지 못하자 비로소 정원으로 나왔다. 한 손에 패드를 쥔 채였다. 콘스탄틴이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나는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소에 발을 모으고 앉아 가든 건물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콘스탄틴이 유리문을 넘어 정원으로 걸어 나왔을 때부터 그 애가 뭘 하려는 건지 유심히 주시하고 있었다.
콘스탄틴이 당장 나를 발견하지 못 한 건 내가 정원의 나무들 중에서도 특히 큼지막해 몸을 전부 가릴 수 있는 잎사귀 아래에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콘스탄틴이 내 이름을 두 번째로 불렀을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잎사귀를 치우고 성큼성큼 나아갔다.
“무슨 일이야?”
콘스탄틴은 내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튀어나오자 깜짝 놀랐는데, 확신할 수는 없지만 동시에 미묘하게 웃고 있었던 것도 같다. 내가 얼굴을 찡그리며 이상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콘스탄틴이 패드를 내밀면서 같이 읽을거리를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며 근처에 다른 아이들이 있나 살피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나왔던 잎사귀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들어오라고 말했다. 그 과정을 일종의 초대나 그 비슷한 것으로 여기던 내 자신이 떠오른다. 콘스탄틴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것인지 “그래도 돼?”라고 확인하듯 물었다. 대답 없이 먼저 잎사귀 아래로 몸을 돌리자, 등 뒤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이어 콘스탄틴이 뒤따라 들어왔다.
우리는 두껍고 큼지막한 잎사귀가 만든 어두운 공간 아래에 마주보고 앉았다. 콘스탄틴이 우리 사이에 패드를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화면을 넘기자, 마침내 「뉴칸즈 9월 호」 표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는 그 표지를 장식하던 모델이 여자였는지 남자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파란 스커트를 입고 있었는지 노란 바지를 입고 있었는지도 헷갈린다. 머리카락이 길었는지 짧았는지도 가물가물하다. 하지만 「뉴칸즈 9월 호」의 표지를 마주한 순간 느꼈던 혼란에 가까운 충격과 그 충격이 채 끝나기도 전에 들이닥쳤던 기쁨만큼은 지금도 어느 정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당장 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떨리는 목소리로 “이게 뭐야?”라고 되묻는 방식으로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드러냈다. 그 모습에서 콘스탄틴이 이전에 벌어졌고 이후에 벌어지게 될 모든 사태를 파악했음은 분명했다. 내가 오랫동안 다른 아이들의 시선을 끊임없이 신경 쓰고 가능한 한 눈에 띄지 않으려고 애쓰는 동시에 누구보다 주목받고 싶어해왔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에, 당장은 아니지만 몇 주 뒤에 패드를 든 콘스탄틴이 이번에는 헤매지 않고 곧장 정원으로 걸어 들어오게 되었고 우리는 그런 식으로 가끔 이마를 맞대고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는 관계가 되었다. 처음에는 표지 모델들의 옷차림에 대한 의견만 나누었으나 나중에는 잡지에 대한 모든 것들, 각 페이지에 실린 머리모양과 색깔, 구두의 뾰족한 끄트머리나 작고 세밀한 액세서리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모임이 어느 정도 무르익어 패션의 아주 작은 디테일까지도 능숙히 포착하기에 이르자, 우리는 페이지를 나누어 해당 패션의 특징적인 부분을 정리한 뒤 공통된 부분을 모아 그 달의 유행을 데이터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런 모임이 서너 번쯤 진행되었을 즈음부터 콘스탄틴을 슬슬 애칭으로 부를 때가 왔다고 여기고 나름대로 결심을 굳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전까지는 콘스탄틴과 대화를 나눠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콘스탄틴을 오며가며 다른 아이들이 부르는 별명, ‘코스차차노’가 그 애의 애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적당한 타이밍을 잡기 위해 화면을 넘기는 콘스탄틴의 손을 유심히 내려다보던 어느 날,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코스차차노.”하고 그 애를 불렀다. 실수했음을 깨달은 건 콘스탄틴이 정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든 직후였다.
“너마저 날 ‘코스차차노’라고 부르는 거야?”
콘스탄틴의 목소리가 진심으로 억울하게 들려 나는 영문을 모른 채 조금 주눅이 들었다.
“다들 그렇게 부르잖아. 아니야?”
“아니야.”
콘스탄틴은 내게 악의가 없음을 감지하고 나자 다소 누그러진 얼굴을 했다. 그러더니 ‘코스차차노’는 전적으로 자신을 놀리기 위해 만들어진 별명이라고 했다. 그 애는 나에게 그렇게 하듯이 다른 아이들을 고루고루 신경 쓰며 가든을 돌아다녔는데, 때로 아이들 눈에는 그 모습이 여기저기 참견하는 가든의 AI와 다를 바가 없어보였던 것이다.
아이들이 그러한 별명을 붙인 건 규칙을 강조하거나 생활태도를 조언하는 콘스탄틴에 대한 얄미움뿐 아니라 그에 대한 고마움과 애정을 느꼈기 때문이겠지만, 대게 ‘코스차차노’는 콘스탄틴이 “너희 또 이런 거 하고 있구나.”라고 입을 열었을 때나 사용되었다. 이를테면 “으악, ‘코스차차노’다!”라거나 “콘스탄틴이 또 ‘코스차차노’가 되어버렸어.”라는 식이었다. 그러므로 본인은 그 별명을 크게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미안, 그런 별명인 줄 몰랐어.”
“괜찮아.”
콘스탄틴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보다 너 내 ‘새로운 이름’을 부르고 싶어 하는구나.”
그렇다고 대답하자 콘스탄틴이 알려주었다.
“내 다른 이름은 ‘코스챠’야.”
“코스챠.”
“응.”
콘스탄틴이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넌 ‘싸샤’지?”
나는 콘스탄틴이 내 ‘새로운 이름’을 알고 있음에 조금 놀랐다가, 곧 그 애가 가든에서 생활하는 대다수의 이름을 기억하고 부른다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그럴 만한 일이라고 받아들였다. 게다가 콘스탄틴은 내 ‘새로운 이름’을 발음하면서 한 가지 실수한 부분이 있었다. 그러므로 나 역시 콘스탄틴이 내 ‘새로운 이름’을 정확하게는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 애는 많은 아이들이 처음 내 애칭을 부를 때 그러는 것처럼 ‘shacha’에서 ‘c’를 묵음으로 들리게끔 뭉개며 발음했던 것이다.
사실 내 애칭은 발음 그대로 쓴다면 ‘싸챠’에 가까웠다. ‘c’를 아주 세게 발음하지 않으면서도 그게 있다는 걸 무시할 수는 없는 정도로 발음해야하기 때문에 ‘싸샤’라고 쓰는 것뿐이었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처음 내 애칭을 부를 때 실수한다. 아나렉샤가 관습적인 이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줄여서 부르는 별칭이나 애칭이 따로 정해져있지 않다는 뜻이다. 아나렉샤는 아이오워스에서 주로 서식하는 장미의 한 종류다. 싸샤shacha라는 내 애칭은 그 품종을 셀 때 쓰는 단위인데, 그나마도 실생활에서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읽는 법도 ‘싸챠’다. 나는 그 단어를 가지고 와서 내 방식대로 읽은 것이다.
내 애칭을 부르는 방식에 대해 설명하자 잠자코 듣던 콘스탄틴이 ‘새로운 이름’을 누가 지어준 거냐고 물었다. 나는 ‘새로운 이름’을 지어줄 만큼 각별한 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구태여 언급하지는 않으면서, ‘싸샤’라는 애칭을 지은 건 바로 나라고 대답했다.
“흔하게 사용되는 건 아니지만 그걸 세는 단위로 ‘shacha’를 쓰더라.”
내가 덧붙였다.
“발음은 조금 다르지만.”
그 모임이 끝난 뒤 나는 콘스탄틴을 이름 대신 ‘코스챠’로, 콘스탄틴은 나를 아나렉샤 대신 ‘싸샤’로 부르기 시작했고 가든을 졸업한 뒤에도 그 놀이는 변함없이 이어지게 되었다.
화가 났거나 서운하거나 내 말을 강조하고 싶을 때가 아니면 콘스탄틴은 내게 항상 코스챠였다. 콘스탄틴은 정말 눈치가 없는 편이라 코스챠 대신 콘스탄틴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내가 신경질을 부리고 있다는 것조차 모를 때가 많았다. 하지만 대신 콘스탄틴은 상냥하고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친절할 필요가 없는 상대에게조차 예의를 차리려고 노력했다. 나는 콘스탄틴의 그런 점이 정말 좋았지만 때로는 그것 때문에 무척 슬프기도 했다. 어느 누구에게나 성의를 다하는 콘스탄틴의 모습을 누군가 알아차리고 내게서 콘스탄틴을 데려가 버릴 것 같아서 두려웠다. 혹은 어떤 힘이 콘스탄틴의 그런 점을 완전히 망가뜨릴까봐 무서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건 나였다. 이전의 모습이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남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하고 눈은 침울한데다 걸핏하면 극심한 불안감에 시달리며 눈앞의 현실과 상상이 만들어낸 이미지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할 뿐이다.
시티레일이 셔틀 정거장에 도착했다. 나를 흘끔거리는 시민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자세를 곧추세우고 딱딱한 몸짓으로 열차에서 내렸다. 절도 있는 걸음걸이로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사람들이 점차 불어났다. 개찰구를 통과하자 높고 거대한 돔 형식의 천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장은 차단막을 내렸다 올리기를 반복하며 햇빛을 5분 간격으로 대합실에 내리쬐고 있었다. 차단막이 올라가있을 때는 깜깜한 벽면으로 홀로그램들이 나타나 광고를 하거나 다음 기차 시간을 안내했다. AI의 사무적인 목소리가 다음 열차시간을 알려주는 동안 시민들은 큼지막한 캐리어를 끌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즐거운 목소리로 떠들어댔다. 나는 급격한 현기증을 느꼈다. 물처럼 흘러 다니는 수많은 사람들과 거대한 대합실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참을 수 없이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피곤해서 그런 것이다. 잠을 거의 자지 못했기 때문에 타인의 육신과 행위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생명력에 마구잡이로 휘둘리고 있는 것이다. 나나스몬과 시간을 보내는 동안 내 기력을 모두 소모해버린 것을 깨달았다. 나는 정신적으로 무척 지쳐있었다. AI 패시가 발랄한 목소리로 다음 열차 시간을 알렸다.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느릿느릿 역을 빠져나왔다.
버스 정류장에 시민들이 캐리어와 가방을 내려놓고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슬그머니 줄 끄트머리에 서서 이마를 문지르며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그때 버스 AI가 나를 지목했다. 모든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나는 얼굴이 빨개지는 것을 느꼈다.
“방금 뭐라고 했죠?”
내가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대기 없이 바로 탑승이 가능하다고 안내해드렸습니다, 중위.”
AI가 말했다.
거절을 하려고 했지만, 곧 머뭇거렸다. 내 몸 상태가 떠올랐던 것이다. 함선에 있을 적엔 몰랐는데 풍경과 사람의 생기가 존재하는 공간으로 나오니 어지러움과 피로가 극심해졌다. 주변 소리가 물속에 잠긴 것처럼 먹먹하게 들렸다. 가능한 한 빨리 제라스 부함장과의 면담을 마치고 곧장 숙소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숙소가 그의 숙소에서 멀지 않다는 것이 다행으로 느껴졌다.
나는 시민들을 흘끔거렸다. 시민들은 내 제복을 확인하자 군말 없이 길을 비켜주었다. 나를 향한 시선에서부터 호의와 친절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민들 사이를 지나 버스에 올랐다. 바깥쪽 창가에 자리를 잡고나자 시민들이 다시 탑승하기 시작했다. 캐리어를 짐칸에 싣고 가방을 올리는 동안 시민들은 목소리를 낮추어 서로 조심스럽게 대화를 나누었다. 아마도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마음이 불편해져 애써 그곳에 관심이 없는 척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초봄의 햇살을 받은 셔틀 정거장 역사가 서늘한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잠시 후 버스가 시동을 걸고 역사를 부드럽게 한 바퀴 돌아 그곳을 빠져나갔다.
나는 숙박 시설이 밀집된 셔틀 정거장 바로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다. 화려하고 가벼운 옷을 걸친 관광객들 사이로 단정하게 흰색이나 갈색 제복을 갖추어 입은 군인들이 드문드문 섞여있었다. 민간시설과 제국군시설이 혼재한 구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제라스 부함장이 머물고 있는 호텔까지 느릿느릿 걸었다. 원래 나는 보폭을 일정하게 맞추고 힘차게 걷는 편이었지만 지금은 비틀거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호텔 정문을 지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갑자기 일시적으로 기력을 되찾은 것 마냥 시야가 또렷해지고 정신도 맑아졌다. 상관 앞에서 비실비실한 모습을 보여줘선 안 된다는 오랜 강박적 습관에서 비롯된 신체적인 변화였다. 하지만 다시 호텔을 나서는 순간 이 극적인 변화는 힘을 다해 오히려 나를 지금보다 더 피곤하게 만들 거라는 사실을 지난날의 경험을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제라스 부함장은 맨 꼭대기 층 두 번째로 넓은 방에 투숙하고 있었다. 노크하기도 전에 문이 열렸다. 내가 호텔에 들어설 때부터 감시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 나를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심장이 마구 뛰었다.
매캐한 담배냄새 때문에 숨을 쉬기 힘들었다. 제라스 부함장은 책상에 앉아 패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유리로 세공된 재떨이가 놓여있었다. 재떨이에 거의 태우지도 않은 큼지막한 시가 한 개비가 거꾸로 꼿꼿하게 처박혀 있는 게 보였다. 내가 책상 앞으로 다가오자 제라스 부함장이 패드를 종료하며 말했다.
“이걸 대체 무슨 정신으로 피우는지 모르겠군, 중위.”
시가를 피운 적도 없고 금연한지 5년이 다 되어가지만 말대꾸하지 않고 자리에 멈추어 섰다.
“나니아를 위하여. 부함장님, 소집에 늦어 죄송합니다.”
내가 경례했다.
“기다리다 목이 빠지는 줄 알았다네. 자네가 도망갈 궁리라도 하고 있는 줄 알았지.”
제라스 부함장이 손을 비비고는 기지개를 켰다.
“휴가 중에 불러서 유감스럽게 되었어. 하지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제때 처리하는 게 가르강튀아의 신조가 아닌가.”
나는 제라스 부함장의 입에서 나나스몬의 이름이 튀어나올까봐 곤두서있었다. 그가 우리의 대화내용을 알고 있는 것인지, 알고 있다면 어디까지 훔쳐 들은 것인지 알고 싶었다. 나나스몬이 조금 전의 만남으로 위험에 휘말리게 된다면 내 자신을 도무지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섣불리 되묻지 않고 조용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제라스 부함장이 책상을 두드리며 말했다.
“게다가 이번 일은 우리 함선의 명예와 관련되어 있었다네. 무슨 소리인지 생도들과 대화한 자네라면 아주 잘 알 거야.”
나는 눈을 깜빡였다.
“생도들 말씀이십니까?”
“그래. 자네가 노천카페에서 만난 두 생도들 말이야.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제라스 부함장은 이제 여유롭고 거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에 대해서라면 모든지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나를 심문할 때도 저런 눈을 하고 있었다. 정거장 테러 이후 제라스 부함장은 나를 정말이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었다. 콘스탄틴과 나의 기록을 열람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든지 나를 이렇게 대할 수밖엔 없을까. 감정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밀접하게 붙어있는 양면의 거울 같은 두 사람의 살아온 과정을 되짚다보면 한 인간을 완전히 꿰뚫어보았다는 착각에 빠지게 될까. 하지만 제라스 부함장의 이런 태도는 나를 씁쓸하게 만든다. 실상 콘스탄틴과 나는 공유하고 있는 게 많지 않았다. 우리 관계는 결과적으로 피상적이고 아주 나빴다. 그렇게 해석할 수밖엔 없지 않은가.
나는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부함장님.”
그러자 제라스 부함장이 유감스럽다는 어조로 말했다.
“자네는 가르강튀아에 대한 부정적인 의혹을 부정하지 않았을 뿐더러 한술 더 떠서는 쓸모없는 말을 얹지 않았나.”
대체 그 일을 어떻게 발뺌하려 들 수 있냐고 되묻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함선의 명예 같은 건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지, 중위?”
그 순간 내가 떠올린 것은 ICOTS 출신의 두 생도가 나에게 말을 걸어 가르강튀아의 분위기에 대한 개인적 의견을 자문하던 일이었다. 나나스몬과 카페 발코니에 앉아있을 때 말이다. 아연해졌다. 설마 지금 그걸로 트집을 잡겠다고 나를 여기까지 부른 것이란 말인가. 대체 부함장이라는 사람이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곤 휴가를 나온 부하를 감시하며 호시탐탐 곤경에 빠뜨릴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뿐이란 말인가.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할 일이 없을 수가 있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부함장님. 큰 조직이 가지는 일반적인 분위기에 대한 이야기였을 뿐 가르강튀아를 모욕할 의도는 없었습니다.”
“중위도 알다시피 의도와 결과는 보통 다른 몸을 가지고 있다네.”
제라스 부함장이 부드럽게 빈정거렸다.
잠깐이지만 속을 누르기 위해 한 박자를 쉬어야했다. 지랄맞은 상관을 두면 이런 순간이 많아진다. 나는 작은 목소리로 죄송하다고 말했다. 내 생각이 너무 짧았던 것 같다고 용서를 구하는 척했다.
제라스 부함장은 한동안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다리에 힘을 주고 꼿꼿하게 서서 다음에 벌어질 일을 기다렸다. 명령이나 처벌 같은 것 말이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점점 그 분위기가 불편해지려는 찰나, 제라스 부함장이 몸을 일으켰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거렸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이번 함선 요나 건 말일세.”
나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네, 부함장님.”
“자네의 공이 아주 컸다더군.”
“그렇지 않습니다. 동료들 덕분입니다.”
“감찰 도중 고발대상이 아닌 장교 세 사람을 마저 색출했다지?”
제라스 부함장은 아주 자랑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칭찬할 만한 일이야. 가르강튀아가 감찰을 허투루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준 셈 아닌가.”
달리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제라스 부함장이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전신에 힘을 주고 뻣뻣하게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라스 부함장은 얼굴을 찌푸리고 턱을 훑었는데 다른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것 같은 소리가 새어나왔다. 잠시 후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즉시 사살하라고 지시한 장교들까지 심문한 이유가 뭐지, 중위?”
“명령하셨습니까?”
내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지시 받은 바가 전혀 없는데요.”
제라스 부함장이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기다리는 그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슬그머니 눈을 떴을 때, 제라스 부함장은 블라인드가 내려진 창가 앞에 뒷짐을 지고 서있었다. 방은 어느새 아까보다 어두침침해져있었다. 그의 표정이나 작은 제스처를 제대로 포착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보고된 내용 외에 심문과정에서 조사대상이 보인 특이행동이나 특별한 발언 같은 건 없었나?”
제라스 부함장이 조용히 덧붙였다.
“녹음이나 녹화가 되기 어려운 사각시대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걸세.”
“따로 없습니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내가 대꾸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특정한 심문대상을 지목하시는 겁니까?”
“레안드로스 매큐언 중위와 이언 에코 소위를 말하는 걸세.”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얼굴이 어슴푸레한 어둠속에 잠겨 희끄무레하게만 보였다.
나는 잠깐 생각해본 후 없다고 다시 한 번 대답했다. 정말로 잘 모르겠다고 했다.
한참동안 말이 없던 제라스 부함장은 얼마 뒤 놀라운 명령을 내렸다. 나보고 그만 가보라고 한 것이다. 내 뺨을 후려치거나 주먹을 휘두르지 않고. 심지어 가벼운 발길질조차 하지 않고 말이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몰라서 주춤거리며 서있자, 제라스 부함장이 말했다.
“안 가고 뭐하나, 중위? 얼빠진 얼굴이군 그래.”
혹시라도 그가 변덕을 부릴까봐 냉큼 경례를 하고 방을 나섰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등 뒤에서 문이 복잡한 보안과정을 거쳐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로비를 가로지르는 동안 깊은 피로감을 느꼈다. 레안드로스 생각이 났다. 단순한 승급 비리 대상자가 아니었던 것일까? 어째서 그는 특별하게 즉결처형 명령이 떨어진 것일까? 이번 일로 내 승급이나 앞으로의 복무 생활에 부정적인 영향이 있을까? 레안드로스가 순간적으로 미심쩍게 느껴지던 순간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 피로와 예민한 감각에서 비롯된 추상적이고 미신적인 믿음에 불과했다. 심지어 나는 그 예감에 불안해져 그를 한계까지 몰아붙이지 않았는가. 그를 죽인 게 바로 나였다. 아니면 정말로 레안드로스는 내가 모르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던 것일까? 그렇다면 대체 무엇이기에 제라스 부함장이 저토록 경계하는 것일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생각은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피로에 눌려 무의식의 세계로 가라앉았다. 침대를 보자마자 끔찍한 졸음을 느낀 나는 옷도 제대로 벗지 않고 그 위에 뻗어버리고 말았다. 침대에 몸을 반쯤 걸친 채 구겨진 자세로 얕은 잠에 빠졌다.
6
진급식은 제인 함장이 연설과 진행을 맡았다. 내가 중위로 승급할 때와 비슷한 분위기였다. 가르강튀아의 총책임권자라는 부총독은 이번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바쁘신 몸이니 이런 자리에 나올 리가 없겠지. 주변을 둘러보자 다른 함선 출신의 장교들이 드문드문 앉아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이 나를 쳐다보려고 해서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제인 함장은 차분한 어조로 연설을 마무리했다. 그녀는 조금 유감스럽다는 목소리로 근래 함선과 정거장을 겨냥한 폭탄 테러가 잦으니 각 함선은 보안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달라고 말했다. 테러 수습 과정에서 순직한 장교들에게 존경과 조의를 표한다고도 했다. 라리사 정거장 테러 사건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는 조금 동요했지만 겉으로 드러나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제라스 부함장이 나를 곁눈질하다말고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불편한 마음에 시선을 피했다.
제인 함장은 이런 일로 나니아에 대한 적개심을 키울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었다. 일부를 제외하곤 대부분의 나니아민들이 제국과의 합병을 환영하고 있는 만큼 제국 확장과 시민 안보에 힘써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갑자기 심사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단상에 올라가 뒤집어진 금색 오각형 뱃지를 받는 동안 조금 전까지 나를 쳐다보려고 고개를 돌리던 그 장교가 내 옆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유 없이 기분이 나빠진 참에 상황이 더욱 나빠질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진급식이 끝나는 즉시 셔틀을 타고 대기권에 정박한 가르강튀아로 돌아갈 작정으로 앞을 노려보며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행사가 끝났음을 알리자마자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파에 자연스럽게 섞여드려는 참에 누군가 나를 다급하게 불렀다.
“아나렉샤!”
나는 깜짝 놀라서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처음에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다 윤기 나는 긴 머리카락과 반질거리는 피부를 보고 눈앞의 그녀가 패티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습관처럼 패티의 소매를 확인했다. 중위였다. 패티는 뻗던 손을 거두고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머뭇거렸다.
“존칭을 사용하는 쪽이 편할까?”
경례를 한 뒤 패티가 물었다.
“그럴 필요 없어.”
패티가 긴장을 풀고 바짝 다가왔다. 그녀는 내 얼굴을 잠깐 훑어보더니 반가움을 숨기지 않았다. 나를 한눈에 알아보았다면서 내가 달라진 게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렇게 머리를 묶고 있으니 훨씬 깔끔하고 세련되어 보인다고 내 포니테일을 칭찬했다. 임관 이후 다시는 날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어 정말 기쁘다고, 이번에 대위로 진급한 걸 축하한다고 했다.
아까부터 줄곧 나를 응시하던 장교는 다름 아닌 패티였다. 패티는 내가 통 자기 쪽으로 눈길도 주지 않았다고 서운해 했다. 아무리 동기사이라도 계급 차이가 있으면 초반에는 주눅이 들거나 눈치를 볼만도 한데, 심지어 그녀는 나와 생도시절 그렇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는데도 패티는 내가 존칭을 사용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 후로 전혀 거리낄 게 없다는 것처럼 굴었다. 나는 그녀의 붙임성이 싫지 않았다. 라리라 정거장에서 5년 만에 동기들과 재회했을 때 흐르던 어색한 분위기를 떠올리면 오히려 패티처럼 새삼스럽게 호들갑을 떨며 친근하게 다가오는 쪽이 훨씬 좋았다. 패티는 내 sns 이야기도 했다. 패티는 내가 sns와 메신저 계정을 삭제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굳이 그 사실을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나는 한동안 그녀가 내 sns글과 사진에 대해 떠드는 것을 듣고 있었다.
패티가 잠깐 근처 카페로 가서 차라도 한 잔 마시자고 제안했다. 곧 돌아가 봐야한다고 정중하게 거절하자, 패티는 아쉬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이런 식으로 동기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버린 지 오래 됐었어.”
“응. 생각만큼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일은 아니더라.”
내가 대답했다.
“아나렉샤 널 보니까 예전에 네가 장담하던 게 떠오른다.”
“어떤 거?”
“임관 뒤 동기들과 우연하게 재회할 가능성이 1%밖에 되지 않을 거라고 한 것 말이야.”
나는 어떤 표정을 지으면 좋을지 몰라 패티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에 어느 정도 충격을 받은 내 자신이 느껴졌지만 그러한 자아와 갑작스럽게 돌출된 과거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패티가 콘스탄틴을 염두하고 이 일을 꺼낸 것인지, 그렇다면 콘스탄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인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그녀는 제국을 배신한 반역자의 존재를 조롱하기 위해 콘스탄틴을 완전히 없는 취급하려고 드는 걸 수도 있었다. 혹은 그런 이야기를 꺼내 내 반응을 살펴보려고 하는 걸 수도 있었다. 전자라면 나는 그녀와 함께 콘스탄틴의 존재를 나누고 싶었고 후자라면 당장에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4학년 마지막 학기 내내 콘스탄틴 곁을 맴돌던 패티는 어느 순간부터 그에게 관심이 뚝 끊어버리고 5학년 말 무렵 다른 친구와 사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콘스탄틴과 갑작스럽게 관계를 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종종 도서관이나 휴게실에 마주앉아 진지하게 과제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는 패티와 콘스탄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졸업 전까지 두 사람은 좋은 관계를 유지했고, 아마 내 기억이 맞다면 그 후에도 연락을 주고받긴 했을 것이다. 패티는 당시 회담에 참석했던 장교는 아니었지만 테러 사건이 너무 유명해서 그녀가 콘스탄틴과 그와 관련된 사람들의 처지를 모를 가능성은 무척 희박해보였다. 패티는 콘스탄틴을 좋은 방식으로 추억하고 있을까, 아니면 그와 관련된 시간이라면 당장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경멸하고 있을까.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어정쩡한 표정으로 패티를 쳐다만 보고 있자, 그녀가 먼저 머쓱하게 입을 열었다.
“내 말은, 우리가 1%의 확률에 소속되어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어.”
나는 정신을 차렸다.
“요즘 통 잠을 못 잤어. 그래서 종종 이렇게 멍해지곤 해. 정말 미안해.”
잠깐이지만 패티는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장교들 대부분이 뿔뿔이 흩어진지 오래였고 단상 위는 텅 비어있었다. 자리에 멈추어 서서 대화를 나누는 장교들도 있었지만 우리에게 전혀 관심 없어보였다. 패티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아나렉샤, 너는 그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콘스탄틴의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침묵하다 조용히 대답했다.
“난 그 일을 떠올리지 않은지 좀 됐어.”
패티는 실망한 것처럼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그러면 안 되지.”
패티가 얼굴을 찡그리고 다그쳤다.
“넌 직접 그 애 정보를 열람하거나 심문할 수 있었잖아.”
그 말이 찌르는 듯한 고통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속삭이듯 물었다.
“그럼 나는 잊으면 안 돼?”
“너 그게 누명일 거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 거야?”
패티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내 말은, 걔가 그런 일을 벌일 리가 없잖아. 안 그래?”
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걘 자백했어.”
내가 떨리는 목소리로 화를 냈다.
“걘 자신의 의지로 모두를 배신했단 말이야, 패티!”
근처에 서있던 장교가 내 쪽을 돌아보았다. 우리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허공을 쏘아보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동안 패티는 텅 빈 단상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패티가 어깨를 으쓱이더니 애써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했다.
“어느 쪽이든 개죽음을 당한 거야.”
마치 스스로에게 그 사실을 납득시켜 이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시도하는 것처럼 보였다.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어. 여긴 평화롭고 아름답잖아. 뭔가에 몸을 던질 거라면 좀 더 의미 있는 일에, 그러니까 성과를 뚜렷하게 기대할 수 있는 일에 던졌어야 됐어.”
패티는 내 옆의 허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치 그곳에 그녀가 원하는 무언가가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면 그곳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차릴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더니 다짐하듯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제국의 영광을 위해 투신할 거야. 하잘 것 없는 욕망에 절대 흔들리지 않겠어.”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패티가 말하는 그 욕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지만, 그 기저에 깔린 감정이 때로는 위험해보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가지고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아니, 나와 패티 뿐 아니라 아주 어린 시절, 한때 우스갯소리처럼 장래희망에 대해 주고받았던 아이들 모두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 무엇에 대한 배신의 욕망이었지만 결코 음침하고 악랄하지 않았다.
“태어난 이유를 배신하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구나. 정말 슬픈 일이야… ”
나는 중얼거리는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너는 잘 지낼 거야.”
내가 말했다.
패티는 두 팔을 벌려 나를 꼭 안아주었다.
“너를 만나서 정말 기뻤어, 싸샤. 아주 오래 전이지만 그 외출 때도 너는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고 있었지. 그때 네가 정말 예뻤던 기억이 나. 귀걸이를 하고 있던 너 말이야.”
내 귓바퀴에 다정하게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때 심술을 부려서 미안해. 사실 그 점집에 일부러 너희 둘을 데려갔었어. 생도들만 보면 악담을 퍼붓는 심술궂은 나니아 출신 여자가 앉아있다는 소문을 들었었거든. 예전부터 이 이야기를 고백하고 네게 사과하고 싶었어. 이제라도 전해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지만, 너무 늦게 전해준 셈이 됐구나.”
나는 패티를 끌어안고 작별인사를 했다. 그녀에게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이제는 그런 일들에 서운해 하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셔틀 정거장으로 이동하는 동안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더니, 셔틀을 타고 이륙할 즈음에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창가에 앉아 잿빛 구름 아래 도심이 천천히 젖어드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아름다운 제국의 수도. 우리가 만들고 지켜낸 안전 속에서 영원할 우리들의 도시. 시티레일이 가느다란 뱀처럼 우아하게 빌딩 사이를 흐르고 있었다. 나는 불현듯 저 시티레일 어느 한 칸에 내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열일곱 살의 나는 창가에 기대어 서서 불안한 눈으로 비 내리는 도시를 응시한다. 돌아가면 콘스탄틴에게 사과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무엇에 미안한 줄도 모르면서 초조하게 사과하고 싶어 한다. 나는 깊은 고통을 느꼈다. 오후까지만 해도 아이오워스의 평화 속에서 위안을 얻었는데 지금은 도시가 간직한 평화의 주식을 소유한 모든 구성원들에 대한 분노가 일었다. 그 불꽃 위로 슬픔이 폭풍우처럼 내 가슴을 후려치며 맴돌고 있었다. 제인 함장의 격려사를 들었을 때처럼 심사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패티의 목소리가 노래하듯 속삭였다.
‘개죽음을 당한 거야.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어. 뭔가에 몸을 던질 거라면 좀 더 의미 있는 일에, 그러니까 성과를 뚜렷하게 기대할 수 있는 일에 던졌어야 됐어.’
콘스탄틴은 이 도시에 흠집 하나 낼 수 없었다. 그는 파리만도 못한 존재였다. 그의 죽음은 제국에 그 어떤 소용돌이도 만들지 못하고 그 속에 주저앉았다.
나는 알고 있다. 콘스탄틴이 당장 제국의 몰락을 기대하고 나를 떠난 건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자신이 당장 바꿀 수 있는 것의 존재를 알면서도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것에 목숨을 걸었다. 내 인생을 바꾸는 대신 전혀 바꿀 수 없을 것 같은 일에 투신하기로 결정했다. 선택 앞에서 우유부단하고, 확신 없는 가능성에는 결코 모험을 하지 않던 콘스탄틴에게 그런 단호함이 발휘될 수 있을 거라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설령 이 순간 아이오워스의 변함없는 평화로움과 제국의 확장 정책 소식을 알게 되더라도 콘스탄틴은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걸었던 가치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살아갈 이유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또한 콘스탄틴은 패티에게 확신을 불어넣기도 했다. 그의 죽음은 패티에게 삶의 의지를 불어넣었다. 우리가 태어나고 키워진 이유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선포하게끔 어떠한 영향을 주었다. 콘스탄틴은 자신의 확신이 전혀 다른 방향에서 누군가의 확신을 불러오게끔 작용할 거라 생각해본 적 있을까? 나는 콘스탄틴이 그것까진 미처 몰랐을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콘스탄틴이 패티의 일을 전해 들었더라면 슬퍼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구체적으로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콘스탄틴이라면 분명 그럴 것 같았다. 콘스탄틴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드는 것은 변함없는 도시 아이오워스의 평화가 아니라 나와 패티, 그리고 한때 콘스탄틴이 소속되어 있었던 세대의 삶, 그들의 체념, 그들의 확신, 그들의 선택이었다. 콘스탄틴의 죽음은 누군가 개죽음이라 일컬을 때가 아닌 패티가 삶을 다짐하는 순간 비로소 개죽음이 되었다. 나는 괴로웠다. 삶을 다짐하고 싶어서 이곳에 왔는데 전혀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모든 것으로부터 고통을 얻고 있는 것 같았다.
잿빛 도시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조금 울었다. 그리고 마침내 눈물을 멈추었을 때, 오래 전부터 내가 변해있었음을 깨달았다. 나는 세상에 즐거운 거짓말만 남아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7
콘스탄틴과 같은 가든에서 태어난 이유로 나는 유년시절을 포함한 대부분의 성장과정에서 콘스탄틴을 마주쳤고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 나는 내 역사에 콘스탄틴을 포함시키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줄곧 누군가에게 모범이 될 만큼 성실하고 우수했다. 생도시절에는 기복 없는 높은 성적을 받았고 의료부 차석으로 졸업했다. 반면 나는 성적에 공을 들이긴 했지만 종종 이런저런 일로 혼란스러워하면서 샛길로 빠져들었다. 외출해서 몰래 담배를 피우거나 지안카를라와 함께 술을 마셨고, 시범근무로 나흐트에 갔을 때에는 잠깐이지만 약을 하기도 했다. 콘스탄틴이 눈치를 줄 때도 있었지만 나는 좀처럼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고 때때로 위험할 만큼 충동적으로 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나는 단 한 번도 행복하지 않았다.
그 무렵에는 삶의 모든 게 의문으로 가득 차있었는데, 그런 내 상태가 무척 불행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의지가 삭제된 텅 빈 그릇이 된다고 해도 내 삶은 주어진 고랑 속에서 순탄하게 흘러갈 것만 같은 잘못된 예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았다.
아마 나는 그 물살에 불순물을 던져 넣음으로써 어떻게든 그 흐름을 막아볼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기대했던 것 같다. 음주와 흡연에 매혹된 것은 그것들이 특히 나 같은 사람에게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내 충동과 일탈의 과정에서 언젠가 감당하게 될지도 모를 위험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아주 멀리까지 달아나지는 못하고 되돌아왔다. 사관학교로 돌아오면 바짝 긴장한 상태로 오랫동안 책상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공부를 했다. 과제를 성실하게 제출하고 말끔한 얼굴로 복도를 돌아다녔다. 내 성적을 확인할 때마다 콘스탄틴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보면서 할 말을 골랐다. 그러다 결국 내게 쏟아내려던 잔소리나 핀잔을 접어두고는 정원을 걷자고 했다.
우리는 자주 정원을 걸으며 대화를 나누었다. 서로가 없을 때에도 각자 다른 시간에 정원에 앉아있었다. 학년이 올라가자 콘스탄틴은 살인적인 과제 분량과 시험 때문에 종종 밤을 새고 점심 무렵이면 벤치에 앉아 꾸벅꾸벅 졸았는데, 나는 그런 콘스탄틴을 매번 쉽게 찾아냈다. 콘스탄틴은 항상 나를 기다리는 쪽이었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살면서 마주치는 모든 정원을 함께 걷기 위해 서로를 찾아 나서거나 기다렸다. 후덥지근한 열대우림의 느세파 가든, 넓은 화단 사이로 눈부신 인공 시냇물이 흐르던 ACOTS, 천장이 높고 인공광원이 따갑게 내리쬐던 프웨이, 유독 축축한 흙냄새가 나던 프롬 무도회 장소였던 에오르 우주 정거장에서 콘스탄틴과 삶의 매순간을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순간에는 행복했다. 그러나 나는 언젠가 콘스탄틴과 멀리 떨어지게 될 거라는 사실을 단 한 번도 잊지 않았다. 이런 순간들도 언젠가 지나가버리고 말 거라고 생각했다. 콘스탄틴을 아무리 좋아하고 소중하게 여긴다고 해도 언젠가는 내 삶에서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될 날이 올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이따금 콘스탄틴이 이런 나의 매몰찬 습성을 은연중에는 분명하게 인지했기 때문에 나를 배신하는데 한 치 망설임이 없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여러 가지 정황 앞에서 힘을 잃고 만다. 이를테면 오래 전에 내가 준 팔찌를 여전히 차고 있던 콘스탄틴의 행동이나 라리사 정거장 정원에서 있었던 일들 말이다. 하지만 콘스탄틴이 나를 배신하면서 괴로워하고 흔들렸다는 결론을 내리거나 나를 망설임 없이 배신하고 자신의 일을 하러 떠났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 둘 중 어느 쪽도 나에게 위안을 주지 못했다. 이제 나는 콘스탄틴을 저주하고 원망해야만 하는지 아니면 그를 이해하기 위해 매순간 생각에 잠겨 당장 주어진 평화 앞에서 혼란과 고통을 느껴야만 하는지 알 수 없다. 대위로 진급한 것이 나에게 기쁨인지 아닌지도 판단할 수 없다. 함선에서 어떤 식으로 행동해야 의심을 피하거나 존경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살아가야만 하는지 나는 그 방법을 잃어버렸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하는지 답을 찾기 위해 애쓰던 지난 세월 어딘가에 내 모든 힘을 두고 와버린 것 같다. 콘스탄틴은 나에게 답을 찾았다고 말했다. 그것을 위해 살겠노라고 말했다. 그런 뒤 나에게 키스하고 다음 날 나를 배신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지.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가르강튀아로 복귀하자마자 개인실에서 소매에 착용하던 두 개의 핀 뱃지를 빼고 오각형 뱃지로 바꾸어 달았다. 복도를 가로지르는 동안 아무도 내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가벼운 조롱이나 모욕적인 농담조차 없었다. 장교들은 대위인 내 심기를 건드렸다가 괜히 맞거나 걷어차이게 될까봐 두려워했다. 나는 평소 사병들을 잘 때리지 않는 편이었지만 그들이 정말 건방지게 굴면 뺨을 갈기며 분노를 표현하긴 했다. 이상한 것은 폭력을 사용할 때마다 내 자신이 오히려 쪼그라드는 기분을 느낀다는 것이다. 손바닥을 펼쳐 부하의 뺨을 때리는 순간 나의 권위는 오로지 그 행위로써만 유지될 수 있는 빈약하고 초라한 것이 되어버렸다. 그 순간부터 나는 나에게 복종할 그들이 없으면 형편없는 인간으로 전락해버릴 빈껍데기의 무언가로 돌변했다. 그래서 누군가를 때리고 나면 심한 부끄러움과 혼란스러움에 사로잡혀 되려 그 감각을 잊기 위해 상대를 무지막지하게 몰아붙이곤 했다. 차라리 누군가를 때리지 않을 때, 누군가를 억압하기 위해 나의 혼란을 휘두르지 않을 때 나는 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자유로운 인간일 수 있었다. 차라리 맞거나 억압당하는 쪽이 훨씬 나았다. 조용한 복도를 걷는 동안 소위일 적이 훨씬 나았다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의료섹터에 들어서자 사병들이 나를 흘끔거리며 지나갔다. 의료장교들은 반사적으로 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본 뒤 내가 부상당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자 무관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나는 루이스를 찾아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는 쉬프트 근무를 끝내고 막 자리에 앉아 쉬고 있었다. 안경을 벗고 미간을 주무르면서 깊게 한숨을 쉬었다. 나는 루이스 앞에 주저앉았다.
“싸샤 너구나.”
루이스가 다시 안경을 썼다.
“진급했다며?”
“응. 이제 나한테 시비 걸 수 있는 사람이 더 줄었지.”
“잘 됐네.”
“너도 분발해. 같이 대위 달아서 떵떵거리며 돌아다니는 거야.”
“의료섹터에서 지휘실까지 허겁지겁 뛰어도 15분은 걸려. 알지?”
책상에 턱을 얹어놓고 가볍게 투덜거렸다.
“왜 우리 함선은 유독 이렇게 분리가 철저한 거야?”
“그럴 필요가 있으니까 그런 거겠지.”
“몰래 기밀연구라도 하는 거야?”
루이스가 미적지근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진급 축하해.”
그 말이 나는 진심으로 기뻤다.
“고마워.”
나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게 가장 먼저 축하받고 싶었어. 5년 동안 내가 엉망일 때마다 보살펴줬잖아.”
“음, 이제 더는 그런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루이스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노력할게.”
노력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었지만, 루이스에게 긍정적인 대답을 해주고 싶어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줄곧 이 거지같은 가르강튀아에 타자고 졸업 학기 말에 그를 끌어들인 일에 대해 미안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만큼은 그 어떤 우울한 감정적 잡음 없이 루이스에게 진심 어린 동료애를 느꼈다. 나는 그를 한 번 껴안아준 뒤 즐거운 목소리로 이따 축배를 들자고 말했다. 내 개인실에 술이 조금 남았을 테니 이따 쉬는 시간에 다시 내려오겠다고 했다. 루이스는 기다리겠다고 대답했다. 슬슬 가봐야 할 것 같다고 하자 루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중에 보자고 했다.
루이스가 비틀거리며 의무실 한쪽에 놓인 침대로 향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잠들기 위해 다시 안경을 벗고 이불 속에서 뒤척이는 그의 모습을 한동안 응시하다가 의료섹터를 나섰다. 개인실로 돌아가는 대신 곧장 근무지로 가서 순찰을 돌기 시작했다. 길고 넓게 뻗은 복도를 몇 번이고 지루하게 오르내리면서 혹시라도 AI의 지시가 떨어질까 기다리는 일이었다.
폭탄이 터졌을 때, 나는 장교거주구역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섹터에 있었다. 순찰을 끝내고 돌아가던 중이었다. 함선 시간 기준으로 새벽 2시 42분, 새벽 시프트를 끝내고 개인실로 이어지는 복도를 천천히 걷고 있었다. 폭탄은 정확히 내가 서있던 지점에서 두 섹터 떨어진 H구역과 2층 끄트머리, 5층의 AI관리구역, 장교거주구역 사이드 복도를 순차적으로 터뜨렸다.
폭발까지 1분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 많은 장교들이 첫 폭발이 마지막 공격인줄 알고 AI의 지시를 기다리며 신중히 움직이려했지만 나만큼은 달랐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굉음을 듣는 순간 지난 여덟 달간 몇 번이고 곱씹었던 끔찍한 순간이 되살아났다. 발밑에서부터 화염과 열기가 솟구치는 것 같았다.
순간 내달리기 시작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내 개인실로 달려가고 있었다. 연달아 폭발이 터질 때마다 함선 전체가 크게 흔들렸다. 장교들이 침착하라고 고함을 치고 있었는데 당최 누구에게 외치는지 알 수 없었다. 대위로 추정되는 한 사람이 화가 나서 고함을 질렀다.
“명령을 기다려! 허가 없이 캡슐을 타지마!”
사람들을 밀치고 휘청거리며 달려 나가는 동안 뒤에서부터 시작된 아우성이 물결처럼 떠밀려왔다. 공포가 장교거주구역을 휩쓸었다. 비명을 지르며 달려 나온 장교들은 제대로 제복을 갖춰 입을 새도 없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제 누군가 고함치는 소리는 혼비백산 질문을 퍼붓는 사람들과 높낮이 다른 비명소리들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내 어깨를 밀친 남자가 바닥에 엎어졌다가 욕지거리를 했다. 평소 나를 대놓고 무시하던 올 중위였는데 그는 자신이 밀친 게 누군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난 그는 내 쪽은 돌아보지도 않고 반대방향으로 뛰어갔다. 다음 순간 거대한 진동이 함선 전체를 뒤흔들었다. 함체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오른쪽으로 심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도미노처럼 쓰러졌다. 나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서로 부딪치고 떠밀려 넘어지는 동안 장교들은 서로에게 저주의 말과 비명을 퍼부어댔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었다. 약하게 이명이 왔다. 머리가 아팠다.
코에서 흐르는 미적지근한 피를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복도는 45도 가량 기울어져 있었다. 장교들의 개인실 안쪽에서 가구와 물건이 기울어진 방향으로 밀려나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코너를 돌자 내 개인실이 나타났다. 문이 반쯤 열려있었는데 조금 우그러져 있었다. 인식장치가 먹통인지 앞에 다가서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분노에 찬 욕지거리를 하며 문에 주먹질을 했다. 양손으로 문을 붙잡고 힘주어 열었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미친 사람처럼 문짝을 떼어내다 말고 무작정 머리를 들이밀기 시작했다. 벌어진 틈으로 간신히 머리통을 우겨넣고 어깨를 비틀어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썼다. 그때 미약한 진동이 느껴졌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폭탄을 몇 개나 설치하게 둔 거야? 다들 제정신이야?’
갑자기 문이 작동했다. 허리를 빼내던 나는 다음 순간 내 허리를 잡아채는 통증에 신음하며 몸을 비틀었다. 사냥감을 포획한 덫처럼 문짝이 내 몸을 꽉 죄기 시작했다. 눈앞이 새하얘지고 기침이 나왔다. 살려달라고 소리쳤지만 복도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이 없었다. 어렴풋한 비명소리와 발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AI도 응답이 없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손가락을 문틈으로 비집어 넣었다. 인중으로 쉴 새 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온힘을 다해 문짝을 벌리는 동안 팔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간신히 숨을 쉴 만큼 느슨한 틈이 생기는 순간 허리와 엉덩이를 빼냈다. 이제 문짝은 허벅지를 조이고 있었다. 신음하면서 아수라장이 된 개인실을 재빨리 훑었다. 반동에 떠밀려 구석으로 밀려난 서랍이 보였다. 첫 번째 칸이 반쯤 열려 있었다. 팔을 쭉 뻗어 서랍의 손잡이를 잡아끌었다. 안에서 물건들이 이리저리 부딪쳐 소리를 냈다. 바닥이 점점 기울어지는 바람에 서랍은 이제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다. 나는 물건이 떨어질까 봐 불안해하며 한 손으로 서랍을 붙잡고 나머지 손으로 첫 번째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핀 뱃지와 빗을 손가락으로 마구 밀치며 정신없이 더듬거렸다. 허벅지가 점점 아파왔다. 마침내 나는 원하던 것을 찾았다. 그것을 쥔 채 서랍을 놓던 순간 바깥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맙소사, 뭐하는 거야?”
바깥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곧이어 누군가 문짝을 붙잡아 벌리기 시작했다. 문짝의 주박에서 벗어난 허벅지에서 오히려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신음하며 뒤로 물러나다말고 멈추어 섰다. 그 순간, 다른 억센 손아귀가 내 허리를 잡아챘다. 남자의 손이었다. 그가 성가시다는 듯 나를 뽑아냈다가 곧 바닥에 집어던졌다. 나는 나동그라졌다. 눈앞에서 쾅 문이 닫혔다.
기침을 하며 비틀비틀 일어나다 말고 멈추어 섰다. 룬진 중위는 내 얼굴을 확인하고 당황했다. 나는 그녀의 뒤에서 묘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는 제라스 부함장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누가 할 것 없이 동시에 입을 열었을 때였다. 거인이 거칠게 지면을 짓밟는 것처럼 쿵 쿵 소리가 가까워졌다. 나는 복도 끝에서 솟구치는 시뻘건 화염을 보았다. 공포에 질려 지금 당장 뛰어야 한다고 소리쳤다.
뭐라 할 것 없이 우리 셋이 동시에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허벅지의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 밀치는 바람에 그대로 엎어져 바닥을 굴렀다. 넘어지는 순간 이명이 들이닥쳤다. 멍하니 인중을 닦아내며 고개를 들었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등이 보였다. 내가 무어라 소리쳤지만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쿵 쿵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물속에 잠긴 것처럼 모든 소리가 먹먹했다. 그때 함선이 반대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룬진 중위가 비명을 질렀다. 다음 순간 두 사람이 황급히 내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나는 그들 뒤에서 닥쳐오는 화염을 보았다. 함선이 크게 진동하며 울부짖었다. 무언가 재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다음 순간 내 오른쪽에서 강한 충격이 느껴지더니 모든 기운이 모래알처럼 빠져나갔다. 시야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나는 일어서려다 말고 주저앉았다. 그대로 기절했다.
헐떡이며 눈을 떴을 때, 나는 바닥에 등을 붙이고 누워있었다. 누군가 눕혀준 것 같이 정갈한 자세였다. 주변은 놀랄 만큼 조용했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무언가를 뒤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움직여 주변을 둘러보았다. 익숙한 복도의 천장과 심하게 시스가 난 창이 보였다. 차단막이 내려가 바깥 풍경은 보이지 않았지만 불안정한 균형감각 때문에 함체가 어디론가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키다 말고 현기증을 느꼈다. 인중을 만져보았지만 코피는 멈춘 지 오래였다.
“다시는 못 일어나도 상관없었는데.”
룬진 중위가 나를 내려다보며 쌀쌀맞게 말했다.
“하긴. 심하게 다친 것도 아니었으니까.”
잠시 후 중위가 신경질적으로 무언가를 던졌다. 내려다보니 봉지과자였다. 중위는 작은 통조림 캔과 음료수 두 통을 더 내려놓았다. 나는 품목을 대강 훑어보고 고개를 들었다.
“고립상태야?”
“그렇지…요, 대위님.”
습관적으로 반말을 쓰려던 룬진 중위가 모호하게 말을 정정했다. 그러고 보니 진급 이후 그녀와 대화를 나눠보는 건 처음이었다.
“부함장님은?”
“방 D-21에요. 문이 열려있는 몇 안 되는 방이거든요.”
룬진 중위가 빈정거리듯 덧붙였다.
“정확히 네 군데 열려있어요. 대위님 방은 잠겨있으니까 남은 두 군데 중 하나 정해서 쓰셔야 할 거예요. D-8말고요. 거긴 제 방이에요.”
천천히 조심스럽게 일어났는데도 허벅지에서 강한 통증이 느껴졌다. 비틀거리다 간신히 중심을 잡는 내 모습이 우스웠는지 룬진 중위가 코웃음을 쳤다. 중위는 더는 나를 도와줄 마음이 없었는지 물건을 몇 번 더 뒤적이다 말고 일어났다. 코너를 돌아 멀어지는 중위의 발소리를 듣다 말고 일어났다. 숨을 몰아쉬며 허벅지를 더듬거렸다. 제복 위로 피가 배어나온 흔적은 없었다. 움직일 수 있으니 골절은 아닐 것이다.
창가로 다가갔다. 차단막이 꼼꼼하게 내려져있었다. 차단막이 내려져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복도와 개인실까지 싹 다 불이 켜져 있었다. 누군가 데크 비상관제부스를 조작해 모든 시스템을 수동으로 돌려놓은 것이다. 전력소모량을 결정하는 건 고립 인원 중에서도 최고 결정권자의 몫이니 아마 부함장의 결정일 것이다. 전력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몰라도 당장 부족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루이스. 루이스 생각이 났다. 루이스는 무사할까? 의무실에도 폭탄이 설치되어 있었을까? 황급히 품에서 패드를 꺼냈지만 아니나 다를까 통신 상태가 먹통이었다. 혹시 몰라 함선 서버를 뒤졌지만 연결 자체가 끊어져 있었고 메시지 보관함에는 아무런 연락도 와있지 않았다.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패드를 쥐고 룬진 중위가 사라진 코너 반대편으로 걷기 시작했다.
중위 말대로 개인실의 대부분이 닫혀있었다. C구역 문들은 군데군데 우그러지거나 어딘가에 그슬려있었다. 패드를 쥐고 이리저리 움직여보았지만 통신기능이 여전히 먹통이었다. B구역으로 통하는 복도는 차단막이 내려와 격폐 상태였다. 화재가 더는 진행되지 못하게 막은 것 같았는데 손을 대보니 차가웠다. 아마 바깥은 우주공간일 것이다. 비상시 데크를 어떤 식으로 분리하도록 설계되었는지 가르강튀아의 구조를 떠올려보았다. 장교거주구역은 넓은 만큼 삼분할로 각 데크마다 독립적인 비상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 C구역과 D구역, F구역과 제3 공동휴게실을 포함한 데크가 바로 내가 고립된 데크일 것이다. 패드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다리를 절며 C구역을 벗어났다.
C구역과 D구역 사이에서 좌측으로 꺾으면 제3 공동휴게실이 나왔다. 통로는 불이 꺼져 있었지만 공동 휴게실은 불이 켜져 있었다. 어렴풋한 빛 때문에 어정쩡하게 어둠이 고이다 만 통로를 해쳐나가며 패드를 조작해보았지만 결과는 여전했다. 허벅지 통증이 점점 심해졌다. 휴게실로 빠져나온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잠시 자리에 멈추어 섰다. 빛이 서서히 눈에 익자 주변 풍경이 뚜렷해졌다.
가구들이 엉망진창으로 벽이나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소파는 뒤집혀 있었는데 다리 하나가 부러져 있었다. 차단막이 올라간 휴게실 전면으로 바깥 풍경이 보였다. 공허한 우주 공간이 시냇물처럼 느릿느릿 흐르고 있었다. 창가 근처에 화분이 쓰러져 흙과 이파리들로 난장판이었다. 그 옆에 데크 조정용 관제부스가 있었다. 늘 사람이 차있었던 휴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낯선 침묵이 소름끼칠 정도였다. 나는 패드를 쥐고 휴게실을 돌아다녔다. 소득이 없었다. 문득 생도시절 보았던 B급 좀비물이 떠올랐다. 다리를 절며 조용한 함선을 거닐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마치 영화 속의 좀비와 다를 것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루이스가 죽었을 리가 없다. 조용한 휴게실을 거니는 동안 평정을 되찾으며 확신이 생겼다. 마음속으로 폭발 당시 상황을 재현하며 다음 폭발까지 걸렸던 시간과 어렴풋하게 들렸던 소리들을 되짚어보았다. 폭탄은 일시에 터지지 않고 충분한 간격을 두고 폭발했다. 정거장 때와 달리 어쩌면 테러가 아닐 수도 있었다(하지만 가르강튀아에 그만한 기술적 결함이 있을 리가 없었으므로 신빙성이 떨어지는 가설이었다). 의무실은 장교거주구역과 전혀 반대 방향에 있는데다가 새벽이라 드나드는 사람이 많지도 않은 공간이었다. 테러는 피해를 최대화하기 위해 인구가 밀집된 곳을 집중적으로 터뜨린다. 의무실은 그 조건대상이 아니었다. 정거장 테러 적에도 그들은 장교들이 모여 있을 법한 장소는 모조리 터뜨렸다.
AI 관제구역이야말로 터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개인실이 날 인식하지 못하고 문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AI를 불렀을 때도 무응답이었다. 얼마나 손상을 입었는지 모르겠지만 가르강튀아 본체도 아수라장이 됐을 게 분명했다. 생존자가 몇 명이나 될 지 확신이 없었다. 무엇보다 AI가 손상된 이상 각 데크의 손상 정도와 사망자를 확인하기까지 소요될 시간이 몇 배로 늘어날 것이다. 지금 이곳에 고립된 우리의 존재를 다른 누군가 알아차리고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었다.
라리라 정거장 데크에서 고립되었을 때보다 훨씬 상황이 나빴다. 적어도 그때는 구조를 기다릴 수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얼마나 누워있었는지는 몰라도 그 시간동안 가르강튀아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곳까지 흘러들어왔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창 너머로 펼쳐진 광활한 우주는 텅 비어있었고 셔틀이나 함선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하다못해 가르강튀아의 작은 파편 하나조차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몰라 관제부스에 들어가 조작내역을 확인해보았다. 전력소모량과 데크 내 산소농도, 중력수치가 표시되어 있었지만 좌표는 따로 설정되어있지 않았다. 데크는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었지만 이곳이 어딘지 전혀 파악할 수 없었다. 나는 몇 가지 기능을 점검했다. 데크를 추진시킬 수 있는 연료의 잔량과 조작키, 그리고 동작 시 일정 지대에 데크의 중력을 적용시킬 수 있는 중력 막─외벽 보수를 할 때 사용되는 그것─이 내장되어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고장 난 기능은 없어보였다. 원한다면 언제든 데크의 기능을 정상 가동시켜 상황을 좀 더 나아지게 만들 수 있었다.
복도 쪽에서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관제부스를 나왔다. 제라스 부함장과 룬진 중위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휴게실로 들어왔다. 룬진 중위는 내가 관제부스에서 나오는 걸 보더니 도끼눈을 뜨고 뭔가를 만졌냐고 물었다. 제라스 부함장은 내게 관심도 없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생각에 잠긴 것 같았다.
“생존자는 우리 셋이 전부야?”
룬진 중위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고 물었다.
“네.”
중위가 언짢게 말했다.
“보셨으니 알겠지만 위치 파악이 안 돼서 좌표를 따로 설정할 수가 없었어요.”
“나쁜 상황이네.”
그걸 누가 모르냐는 듯 중위가 나를 흘겨보았다.
“아까부터 부함장님께서 본체에 통신을 시도해보고 계세요. 추후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돌발 상황에 대비하기 용이할 것 같아 생존자 전원에게 현재 파악된 상황을 명료하게 전달할 거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부러진 소파를 치우고 바닥에 앉았다. 제라스 부함장은 내가 열려있던 개인실에서 쏟아져 나온 가구에 머리를 맞고 다섯 시간 정도 기절해있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동안 나를 살펴준 것은 다름 아닌 룬진 중위였다. 그녀는 나를 정자세로 눕혀놓은 뒤 3시간에 한 번씩 상태를 살펴보고 부함장에게 보고를 했다. 의료장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내 몸 상태를 정확히 진단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 보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진단을 하려고 애썼다. 그런 뒤에는 복도를 돌며 열려있는 개인실을 파악하고 내부에서 확보할 수 있을 만한 식량과 물을 긁어모았다. 그동안 부함장은 비상관제부스의 기능을 점검하고 부스 아래쪽에 깔려있는 비상식품의 분량을 확인했다. 그는 현재 식사 총 138인분과 식수 82갤런이 있다고 말해주었다. 그 전에 우리의 위치가 확보되어 구출될 수 있을 것은 자명해보였다. 그는 함선 서버와 직접 연결된 자신의 패드를 언급하며, 통신이 당장은 불통이지만 근처에 매개가 될 만한 것, 이를테면 작은 탐사선이나 다른 함선이 존재한다면 언제든 가르강튀아에 연락해 복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니 혼란스러워하지 말고 지시에 따라주길 바란다고 했다.
우리는 48시간마다 휴게실에 모이기로 했다. 표면적으로는 데크 상황을 보고하고 앞으로의 일을 의논하기 위함이었지만 사실은 고립 상황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면 우울증이나 정신착란을 겪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서로를 감시할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서로가 필요하기도 했다.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개인실로 돌아가기 전에 제라스 부함장 지시에 따라 룬진 중위로부터 일정한 식량과 식수를 배급받았다. 중위는 식사량을 알아서 조절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만약을 대비해 샤워도 최소한으로 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중위가 대체 뭘 믿고 이렇게까지 뻔뻔하게 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가르강튀아로 복귀하면 내 앞에서 이런 식으로 굴지는 못할 것인데 말이다.
나는 C-17을 임시 개인실로 삼았다. 전력을 사용해 문을 닫아볼까 했지만 그러다 시스템 이상으로 다시 열리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이 되었다. 개인실 문은 코앞에 총을 난사해도 쉽게 뚫리지 않을 만큼 단단하기 때문에 여차하면 갇혔을 때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래서 그냥 그 앞에 담요를 쳐놓는 것으로 만족했다.
눕기 전에 바지를 벗고 허벅지 상태를 살폈다. 문짝에 조여졌던 부위에 자줏빛 멍이 들어있었다. 눌러보니 극심하게 따가웠다. 언젠가 콘스탄틴이 폭발지대로부터 우리를 안전한 곳으로 끌고 가기 위해 아수라장을 뚫다말고 다쳤던 곳과 똑같았다.
8
고립된 지 이주일이 조금 지났을 때, 제라스 부함장과 룬진 중위가 성교하는 소리를 들었다. 복도를 뛰다가 헉헉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상황파악이 안 됐다. 그러다 불현듯 무언가를 깨닫고 멈추어 섰다. 소리도 잠시 멈췄다. 내가 가만히 있자 그 일이 다시 시작됐다. 살이 부딪치는 외설적인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처음 느낀 건 당혹감이었다. 부함장에게 당장 보고할 게 있다는 사실도 감쪽같이 잊고 자리에 서서 어쩔 줄 몰랐다. 고립상태를 알게 된 이후 나는 데크 시스템 서버에 패드를 연결해놓고 시시각각 우주물질에 노출된 외벽이 손상을 입거나 부식되는 정도를 수시로 확인하고 있었다. 일주일 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비록 떨어져 나온 조그만 부분이긴 하지만 가르강튀아의 몸을 이루던 데크가 아닌가. 아주 튼튼한데다 우주의 방사선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주고 있었다. 일주일이 조금 더 흐르고 갑자기 외벽에 문제가 생겼을 때─나는 뜨거운 물에 차를 우려 마시던 중이었다─외벽 부식 상태가 급격히 나빠지는 것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패드를 쥔 채 개인실에서 뛰쳐나와 복도를 달려 나갔다. 가능한 빨리 데크 상태를 점검할 필요가 있어. 밖으로 나가서 살펴봐야해. 이런 일을 그냥 넘겼다간 큰일이 벌어질 거야. 부함장님! 부함장님, 어디 계세요?
그런데 부함장은 섹스를 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당혹감이 가시자 어이가 없었다. 식량과 식수가 충분하고 사태가 정리되는 즉시 생존자들을 구조하러 가르강튀아가 셔틀을 보낼 거라는 사실이 자명할지언정 우리는 고립상태가 아닌가. 우주는 온갖 위험으로 가득 차있었다. 언제든 예기지 못한 사고가 벌어질지 몰랐다. 라리라 정거장 데크에 갇혀있었을 때도 그렇지 않았나. 시스템 오류가 있었는데 난 그때 자고 있었다. 동기들이 재빨리 손을 쓰지 않았더라면 거기 있던 우리 모두가 얼어 죽었을 것이다. 그렇다. 당장 얼어 죽거나 피폭 부작용으로 피를 토하며 급사하거나 부유하는 운석에 충돌해 산산조각날 수도 있는 것이 우주였다. 우리는 그 우주를 떠돌며 구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비상관제 시스템이 아무리 훌륭할지언정 분리된 데크는 가르강튀아의 최신식 시스템만 못했다. 장교들의 편의를 고려해 생활의 모든 것을 보조하는 AI도 없었다. 대체 언제 어떻게 위험이 닥칠 줄 알고 저렇게 여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룬진 중위도 마찬가지다. 대체 뭘 믿고 저 둘은 저토록 여유롭게 성교나 하고 앉아있단 말인가. 당장 죽을 수도 있는데.
나는 가던 길을 되돌아왔다. 걷는 동안 화가 났다. 얼굴이 빨개져서 가라앉을 줄 몰랐다. 개인실에 들어서자마자 패드를 베개 맡에 던졌다. 침대에 걸터앉아 숨을 골랐다. 분노뿐만 아니라 혐오감과 작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눈을 감고 길게 호흡을 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혔다. 평정을 찾는 동안 다시 생각이 바뀌었다. 성교는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빠르고 손쉬운 방법이다. 고립된 함선이나 데크에서는 특히. 나는 생도시절 이와 관련해 논문을 쓰기도 했다. 심지어 구체적인 스트레스 감소 수치를 알고 싶어서 연구를 목적으로 동기들과 성적인 접촉을 시도하기도 했다. 잘 되진 않았지만. 어쨌든 두 사람이 성교를 한다고 해서 화를 낼 이유는 없었다. 위험요소가 다분한 상황 중에 여가를 즐긴다고 비난하기엔 나도 비슷한 처지가 아닌가. 컵을 들었더니 그새 식어버린 차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아니다. 차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제라스 부함장과 룬진 중위의 태도에 여전히 화가 나있었다. 그들이 참을 수 없이 뻔뻔하게 느껴졌다. 어째서 이런 상황 속에서도 성적인 즐거움을 찾으려들 수 있단 말인가. 장교들에게는 의무가 있지 않은가. 데크를 통솔하고 분위기를 다잡아야 마땅하지 않은가. 어쩜 그렇게 자제력이 부족하단 말인가. 고립상황에서 스트레스만큼이나 대원들 간 인간관계도 무척 중요한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하물며 부함장 본인이 깊은 유대관계를 맺을 처지라고 생각하는가?─그렇다, 나는 이미 두 사람이 단순히 성교를 하는데 그치지 않고 어떤 유대를 나누고 있을 거라고 가정하고 있었다.
나는 두 사람 때문에 화가 난 게 아니었다. 어떤 일 때문이었다. 두 사람이 성교를 나누는 상황 속에서 그 일을 떠올리고 무의식중에 내 입장을 대입해보며 분노하고 있는 것이었다. 헤로 대위와 레안드로스 때처럼, 이번에도 콘스탄틴이 떠올랐다.
라리사 정거장이 박살나던 그 순간부터 꽤 오랫동안, 아니 지금까지 종종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를 이해해보려고 애쓴다. 상상속의 그에게 말을 건다. 그때 왜 그런 말을 했어? 다시 말을 건 이유가 뭐야? 왜 지난날에 용서를 구하고 나와 가까워지길 원했어? 왜 정원에 데려가서 키스했어? 약속하고 믿어달라고 한 이유는 뭐야? 내게 뭘 기대했어? 그러면 안 됐던 거 아니야? 어차피 나를 배신할 거면서. 이 관계가 어떻게 될지 너는 빤히 알고 있었으면서.
아! 콘스탄틴은 나를 만나기 위해 5년 만에 그 회담장에 나타난 게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괴로웠는지 그는 상상도 못할 것이다. 연락이 끊긴 이유도 모른 채 5년 동안 그 넓은 함선에서 홀로 지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그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나는 매순간 콘스탄틴을 생각했다. 꿈에서도 그를 보았다. 끝없이 길게 뻗은 복도에서, 우주가 흐르는 창가에서, 보조 함선의 지휘실에서, 불 꺼진 개인실에서 혼자 감정을 삭이다가 근무 시간이 되면 브리지로 올라갔다. 매일 매일이 똑같았다. 나는 죽은 인형이었다. 말을 하고 음식을 먹고 가끔 생각에 잠기기도 했지만 명령에만 움직였고 진정 마음을 다해 행동할 줄 몰랐다. 그곳에는 내가 마음을 붙일 만한 게 거의 없었다. 어떤 선택에도 잘못된 느낌을 받았다. 나는 잘못 만들어진 인형 같았다. 인간도 아니었다. 그 느낌을 지우기 위해 매순간 필사적으로 일에 매달렸지만 그럴수록 어긋나기만 했다.
회담장에서 콘스탄틴을 다시 만났을 때 어떠했던가. 나는 분노와 환희를 동시에 느꼈다. 겁이 나기도 했다. 더는 나에게 아무 관심이 없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5년이나 지났으니까. 5년 동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의 기본적인 인간관계조차 몰랐다. 이오타 시절은 아직도 미지에 싸여있다. 콘스탄틴을 심문할 때, 나는 로의 함장 이름을 알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이오타에서 함께 근무하는 그의 동료들이나 로의 부함장, 진급과 재배치를 앞둔 주요 대위들의 이름조차 몰랐다. 모든 정보는 내가 그를 죽이기 위해 끝에 당도하고 나서야 전혀 원치 않은 방식으로 흘러들어왔다. 콘스탄틴은 너무 잔인한 방식으로 나한테 끝을 고했다. 적어도 이 모든 걸 알고 있었다면 그는 나에게 좀 더 잘해줬어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콘스탄틴이 내게 최대한 잘해주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언젠가 가든에서 그랬던 것처럼 회담장 구석을 지키는 나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내가 분노 때문에 입을 다물거나 우울해서 늘어져있을 때면 곁에 있어주었고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썼다. 잠이 들 때까지 옆에 있어주기도 했다. 정원에도 데려갔다. 생도시절 내내 그랬던 것처럼 초목 사이를 걸으면서 한 손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그때 그를 용서했던 것 같다. 우리 사이가 예전과 다를 게 없으며 그에게 숨겨둔 새로운 인연이 없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믿고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의 사과도 받아들였다. 5년 동안 연락에 제대로 응하지 않고 나를 방치해둔 이유가 터무니없게도 두려움 때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한없이 즐거운 동시에 끝없이 두렵다. 멀리 떨어져있을수록 그 두려움은 커진다. 그러다 정말 멍청한 행동을 저지르기도 한다. 콘스탄틴은 자신의 행동이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고 했다. 후회한다고 말했다. 그를 믿어주기로 했다. 내 외로움을 걸고. 5년 동안 콘스탄틴 때문에 정말 외로웠다. 단 한 번도 다른 사람과 진지하게 관계 맺으려고 해본 적 없었다. 콘스탄틴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그 이유의 전부를 콘스탄틴에게 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미움과 분노가 걷히고 걷잡을 수 없을 만큼 강한 소망이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샘물처럼 차올랐다.
나는 콘스탄틴이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랐다. 나 때문이라면 좋겠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제 더는 항상 콘스탄틴과 함께할 수 없으니까. 나는 그가 매순간 어떤 상황에 부닥쳐도 잘 극복해나가기를, 어떤 불행이든 떨쳐낼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주변에 현명하고 좋은 사람들이 가득하길 바랐다. 항상 옳은 선택을 하고 자신감 있게 삶을 살아나가길 바랐다. 하지만 막상 표현하려니 적당한 말이 잡히질 않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그 어떤 오해나 의미의 훼손 없이 한 사람을 축복할 수 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이미 지나치게 흥분해서 아무 말도 제대로 짜낼 수 없는 상태였던 것 같다.
나는 정원에서 콘스탄틴과 입을 맞췄다. 처음에는 그의 소매를 잡았다가 나중에는 목에 팔을 둘러 그를 끌어안았다. 정말로 조심스러운 키스였다. 나는 신중하려고 애썼다. 이 순간을 기다려왔지만 절대 지나치게 행동하지 않으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그에게 나쁘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내게는 할 말이 너무 많았다. 키스가 끝나자마자 그의 행복을 빌면서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러다 내 턱을 쥐고 있던 콘스탄틴의 손이 미끄러지듯 내려와 두 뺨을 감싸 쥐면서 계획이 달라졌다.
우리가 결코 그곳에서 선을 넘은 건 아니다. 게걸스럽게 혓바닥을 주고받거나 헐떡이지도 않았다. 콘스탄틴은 꼭 자기처럼 키스했다. 끈기 있고 참을성 있게 자기감정을 전달하려고 애썼다. 상냥했고 절대 거칠지도 않았다. 눈을 감고 있어서 소리가 더 선명하게 들렸다. 어둠속에서 그가 보내주는 온도로 불을 밝혔다. 마음이 환하게 타오르면서 온갖 감정이 끓어올랐다. 그것은 길처럼 나열되어 있기도 했고 함선 구조도처럼 지그재그로 뒤죽박죽 섞여있기도 했다. 사막도 있었고 넓은 농장도 있었다. 가르강튀아 복도가 많았다. 개인실, 브리지와 보조함선, 장교 휴게소, 심문실. 콘스탄틴이 참여하지 못했던 내 삶의 한 부분들. 마치 시티레일에 올라탄 것처럼 그 공간들이 빙글빙글 돌면서 내 앞을 빠르게 스쳐 흘러갔다. 나는 그곳에 콘스탄틴이 보내주는 온도를 내려놓았다. 끝없이 길게 뻗은 복도에, 우주가 흐르는 창가에, 보조 함선의 지휘실에, 불 꺼진 개인실에 콘스탄틴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전혀 외롭지가 않았다. 5년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불행하지가 않았다. 마음을 다해 누군가를 좋아하면 혼자 있을 때조차 결코 혼자일 수가 없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다. 나만의 감정으로 매순간 만들어놓은 자리에 콘스탄틴은 제때 도착했다. 제때 자신을 보내주었다. 행복해야해. 그곳에서 주문처럼 끊임없이 되뇌었던 기억이 난다. 행복해야해. 코스챠, 행복해야해.
정원을 나와서 함께 복도를 걷는 동안 삶에 충만한 의지가 차올랐다. 그때 다짐하듯 생각하던 일이 떠오른다. 아,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이 사랑은 정말 깨끗하고 좋은 것이니까. 이 사랑에 부끄럽지 않도록 정말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살아가야지. 단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살아가야한다. 누군가를 정말로 소중하게 아끼고 사랑하면 그 어떤 욕심이나 고통 없이 그가 진심으로 행복하길 바라게 된다. 설령 그와 아무 관계가 없는 순간에도 세상을 선하게 보고 사람을 구하고 부정하지 않게 살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런 마음이 들게 만든다. 내가 선택하는 행위가 세상의 아주 작은 부분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진실로 느끼고 언젠가는 그 사람의 행복에 보탬이 될 거라고 믿는다. 콘스탄틴을 사랑했을 때 그랬다.
개인실 앞까지 바래다준 콘스탄틴이 머쓱하게 인사를 하며 허리를 숙여 가볍게 입을 맞추었을 때, 나는 그를 놓아주지 않고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를 보내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게는 할 수 있는 말이 아직 많았다. 문이 닫혔다. 방은 깜깜했다. 어둠이 눈에 익는 동안 오감이 아주 예민해졌다. 우리는 바싹 붙어있었다. 서로의 숨소리만 들렸다. 그가 내 의도를 파악했을까? 잠시 후 콘스탄틴이 입술을 깨물듯 움직이면서 키스를 시작했다.
나는 콘스탄틴처럼 끈기가 있지도 않고 상냥하지도 않다. 생도시절에도 버르장머리 없이 쏘다니고 내키는 대로 굴다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시치미를 뗐다. 나는 아닌 척해도 욕망에 충실하고 통제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늘 그랬다. 최초로 잡지를 권한 건 콘스탄틴이지만 다음 모임을 결정한 건 나였다. 처음으로 입을 맞춘 건 콘스탄틴이지만 그를 다음으로 끌고 간 건 나였다.
그가 중간에 자꾸만 고개를 돌리려던 게 기억난다. 내키지 않아서라기보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처럼 굴었다. 혀를 섞다가도 머뭇거리고 침대로 끌려오듯 다가선 후에도 잠시 입술을 떼어놓고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다. 떠나려는 것처럼 굴었다. 생각해보니 정원을 걸을 때도 잠깐이지만 비슷한 낌새를 보인 게 떠올랐다. 어떤 일을 숨기고 있는 것처럼 의미심장한 말을 하던 것도 떠올랐다.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가 중요했다. 당장이 중요했다. 수면 아래에 감추어진 비밀이 지금을 망쳐버리는 꼴을 원하지 않았다.
콘스탄틴이 침대에서 떨어지려고 할 때, 나는 뱀처럼 목덜미에 팔을 둘러 그를 다시 끌어당겼다. 입을 맞추며 호응을 유도했지만 아까와 달랐다. 콘스탄틴은 생각에 잠겨 뻣뻣하게 움직였다. 나는 그를 잡아두기 위해 생도시절 논문을 쓰며 얻은 모든 성적 지식을 발휘했다. 얼굴을 어루만지던 손을 흘러내려 허벅지에 얹었다. 그리고 안쪽으로 파고들면서 손바닥으로 쓰다듬었다. 남은 한 손으로 콘스탄틴의 손을 붙잡고 깍지를 꼈다. 그 상태로 들어 올려 내 가슴 위에 얹어놓았다. 화들짝 놀란 것처럼 콘스탄틴이 입술을 떨어뜨렸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다음 순간 콘스탄틴이 키스를 퍼부으며 내 위로 쏟아졌다. 혀가 거칠게 밀고 들어왔다. 끈기도 참을성도 거기 없었다. 손이 옷깃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속옷 위를 더듬거리며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덜컥 겁이 났다. 콘스탄틴이 자제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는 게 재미있기도 했다. 너무 긴장해서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작게 웃음을 터뜨릴 때마다 콘스탄틴이 입술을 밀어붙여서 제대로 숨을 쉴 수 없었다. 헐떡이며 그를 끌어안았다. 그가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더운 숨을 몰아쉬자 허리 끝에서부터 소름이 돋았다. 발가락 힘이 쭉 빠져나갔다.
옷을 벗기려던 콘스탄틴이 갑자기 행동을 멈췄다. 옷깃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힘겨운 듯 얼굴을 찡그렸다. 그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가 몸을 떼어내며 작게 미안하다고 속삭였다. 이만 가봐야 한다고 했다. 푹 자라고, 좋은 꿈을 꿨으면 좋겠다면서 내 머리카락 끝을 매만지다가 완전히 떨어져나갔다. 푹 자라니. 말도 안 되는 개소리였다. 개인실 문이 열렸다 닫히는 동안 나는 침대에 어정쩡하게 몸을 쓰러뜨린 채 얼이 빠져있었다.
콘스탄틴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다 내 꼴을 깨달았다.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고(물론 나도 그의 머리카락을 마구 헤집었다) 옷은 마구 구겨져 벗다 만 상태였고(나는 이제 막 그의 옷깃을 붙잡은 참이었는데) 속옷은 어깨까지 내려가 있었고 목덜미와 입술이 축축했다.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흥분 앞에서 녹아내린 건 나였다. 콘스탄틴은 자제심을 버린 적이 없었다. 그는 사로잡히지 않고 황급히 떠나고 말았다.
얼굴이 화끈거려서 죽을 것 같았다.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밤새 뒤척였다. 그가 왜 그렇게 떠났는지 고민해야했다. 내 기술이 부족했나? 방법이 잘못됐나? 나도 모르는 사이 그가 정신을 차릴 만큼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던가? 아무것도 몰랐다. 콘스탄틴을 그 누구보다 속속들이 잘 안다고 확신에 차서 잡아당긴 순간부터 그는 아주 낯선 존재로 돌변했다. 나는 그를 잡을 수 없었다. 어떻게 그 순간에조차 자제심과 인내심을 발휘할 생각을 했을까. 대체 자제 없이 굴 때가 있기는 한 건가.
이제는 콘스탄틴의 인내심과 자제력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차갑게 얼어붙는다. 내가 완전히 내 자신을 놓아버리려던 순간 스스로를 쏟아버린 사실을 깨닫고 몸을 일으키는 콘스탄틴. 내 개인실을 도망치듯 뛰쳐나와 놀랄 만큼 빠르게 평정을 되찾는 콘스탄틴. 모든 일이 끝난 뒤에도 아주 오랫동안, 나는 그가 그때 복도를 걷는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지 상상했다. 나를 죽여야 하나 고민했을 것이다. 폭탄 속에 나를 버려두고 떠날지 말지를 고민했을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 화가 나있었을 수도 있다. 충분히 멈추고 싶다는 의사를 전달했는데 자신의 자제심을 시험하듯이 끌어당기는 나를 좀처럼 용서하기가 힘들어 초조해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이제는 냉소적으로 그 모든 상황을 상상하고 떠올린다. 멍청하기는. 아나렉샤 정말 멍청하기 짝이 없구나. 세상의 질서는 나와 무관하다. 나는 이 우주의 무엇에도 영향을 줄 수 없다. 나는 가장 가까웠던 친구의 자제심조차 무너뜨리지 못했다. 살아가는 일 역시 삶의 의지와 무관하다. 시간에 몸을 맡기면 절로 흘러간다. 어느 날 갑자기 죽은 인형이 되어도 내 삶은 문제없이 가르강튀아에 녹아들 것이다. 5년 동안 그렇게 살았는데 앞으로 못할 것도 없었다.
올바르게 사는 일이 무엇인지도 사실 잘 몰랐다. 그냥 막연하게 그런 느낌이 들었을 뿐이다. 살면서 한 번도 진실 되게 고민해본 적 없었다. 사랑에 기대어 기만적으로 굴었다. 잘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더듬거렸다. 이제 콘스탄틴도 그가 남겨준 온도도 없다. 나는 삶의 외로웠던 부분을 되돌려 받았다. 이제 더는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어느 것 하나 나를 위해 잃어주지 않고 자신의 삶을 향해 떠났다. 그가 원하는 삶에는 내가 없었다. 나는 실패했다.
그렇지만 자제심을 발휘하지 못하고 인내하지 않는 당신들이 더 나쁘다. 상황에 걸맞지 않는 제라스 부함장과 룬진 중위의 뻔뻔스럽고 여유로운 행동거지는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하필 그들로부터 콘스탄틴을 떠올리게 되어 화가 났다. 다시는 실패하지 않으려고 이 순간에도 최선을 다해 데크 외벽 상태를 확인하고 비상관제부스를 오르내리고 수시로 바깥을 살피는 동안 그들은 저들끼리 마음 가는대로 행동하고 있던 것이다. 콘스탄틴이든 부함장이든 중위든 그들은 아등바등하는 법이 없다. 어떤 상황 앞에서도 자신의 기질을 발휘하고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 실패하지도 않는다. 반면 나는 매순간 실패한다.
결국 돌아보면 선택한 모든 게 나빴다. 내 세계는 오염됐다. 실수가 너무 많아서 지워지지도 않는다. 이를테면 이 순간에도 콘스탄틴을 떠올려야만 한다. 바깥에서는 상관과 부하가 섹스를 하고 있다. 우주는 미동도 없다. 내 영향력 밖이다. 흘러가는 건 내가 탄 데크지 풍경이 아니다. 데크는 고립상태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조차 실패하면 모두 죽는다. 누군가는 반드시 분주하게 일을 떠맡아야만 하고 이번에도 그것은 나다.
나는 거쳐 가거나 이용하기 편리한 정류장 같은 것이다. 멍청한 아나렉샤. 멍청한 것. 처음부터 나는 죽은 인형이었다. 잘못 만들어진 모조인간이었다. 사유한다고 믿었지만 머릿속에는 지푸라기만 들어있다. 내가 진짜로 뭘 원하는지도 모른다. 당장 상황이 미심쩍고 불편하면 억울하고 도망치고 싶고 하지만 그마저도 못해서 돌아왔다. 난 누군가들의 의지에 몸을 떠맡겼고 그것이 진짜 내 의지인줄 알고 충실했다. 충직한 아칸의 아이로, 눈치 빠른 우등생으로, 제국에서 가장 알아주는 헌병단의 함선의 일원으로 자라나려고 아등바등했다. 그러나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콘스탄틴도 그걸 알았던 것이다. 내가 불 꺼진 어둠속에서 그를 끌어당기는 순간, 아니 정원에서 입을 맞추며 그 역시 나를 자신의 마음속에 들여놓으려던 순간 내 본모습을 마주하고 마침내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텅 비었는지 알아차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망설임 없이 두고 갈 수 있던 것이다. 나는 버려졌지만 그 이유를 알았다. 콘스탄틴을 미워할 수 없었다. 나는 증오조차 실패했다. 콘스탄틴을 떠올릴 때마다 내 자신을 보았다. 감정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밀접하게 붙어있는 양면의 거울 같은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 그가 비추는 정반대 지점에 내가 있었다. 이 얼마나 꿰뚫어보기 쉬운 모습인가. 베일에 싸여서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는 콘스탄틴 옆에 투명한 실로 지은 인형이 앉아있는 것이다.
나는 주먹으로 내 모습을 구겨버리고 싶었다.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가죽을 뒤집어 몸속에 들어있는 모든 걸 밖으로 쏟아버리고 싶었다. 어차피 들어있는 게 많지도 않았다고 스스로를 냉소하고 싶었다. 내 자신이 끔찍하게 싫었다. 수치스러웠다. 버림받은 사실이 수치스러운 게 아니라 버림받은 나의 자아가 수치스러웠다. 그를 곱씹고 싶지 않았다. 이제 그만 콘스탄틴을 놓아주고 싶었다. 나를 성찰하고 싶지 않았다. 더는 나를 알고 싶지 않았다. 이 이상 내 자아를 들여다보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이제는 내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내 삶이란 게 뭐지? 내 삶 같은 건 어느 곳에도 없다!
벌떡 일어나 복도로 나갔다. 하염없이 C구역을 서성거리며 감정을 다스리려고 애썼다. 생각을, 생각을 그만해야한다. 이렇게 갇혀있을 때는 상황이나 내 자신을 성찰하는 일이야말로 독이다. 사람은 이런 식으로 미쳐가는 것이다. 고립상황에서 주의를 기울여야하는 것은 외벽의 상태도 시스템 점검도 아닌 대원 개개인의 내면상태다. 고독과 불안 속에서 생각을 키우다보면 말도 안 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터무니없는 실수를 저질러 모두를 궁지에 몰아넣게 되는 것이다. 생도시절부터 지금까지 나는 고립상황에서 이상행동을 보이며 자살을 시도하거나 누군가를 쏴 죽인 미쳐버린 장교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다. 나는 절대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더는 콘스탄틴이 곁에 없는 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어차피 그는 오래 전부터 내 곁에 없었다. 이제는 그 없는 삶을 살아야한다. 지금 나는 분리된 데크에 고립되어 부함장과 중위 한 사람과 함께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제국에서 가장 알아주는 가르강튀아 헌병단이다. 우리는 함부로 죽어선 안 된다. 우주의 웃음거리가 될 수 없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한다. 허드렛일이라도 최선을 다하고 돌아갈 날을 기다려야한다. 루이스도 있고 다른 동기들도 있지 않은가. 사고를 듣고 얼마나 놀랐을까. 지금쯤 나를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은 콘스탄틴을 잃고 방황하는 나의 혼란을 눈감아주었고 슬픔 속에서 날카로워진 나의 무례한 언행을 못 본 척해주었다. 그들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으려면 돌아가야만 했다.
갑자기 사달수드와 클레피아가 떠올랐다. 두 사람은 부함장이었다. 심지어 사달수드는 이제 함장이다. 그들에게 어떻게든 연락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어떤 식으로든. 연락만 닿는다면 그들이 나를 도와줄 지도 모른다. 아수라장이 된 가르강튀아가 피해규모를 가늠하느라 우리를 까맣게 잊고 절절매는 동안 두 사람이라면 자기 함선의 권한으로 셔틀을 보내줄 지도 모르지 않은가. 나나스몬도 있다. 고위급 기술직 장교의 권한이라면 이 상황에 도움이 될 만한 어떤 조치를 취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좋은 생각 같았다. 부함장에게 이야기해보자. 마더쉽으로부터 연락이 있었는지도 물어보자. 그런데 아까 내가 뭘 하려고 찾아갔었지? 일단 당장이 급하다. 부함장님께 가자. 부함장님께 가서 상황을 보고하고 설명을 듣자. 우리에게 남은 식수와 식량은 얼마인지, 언제쯤 구조될 수 있을지, 남은 시간동안 나는 무엇을 하면 되는지 물어봐야겠다. 지금 당장 나를 위한 명령이 필요했다.
다시 D-21로 갔을 때, 부함장은 거기 없었다. 룬진 중위가 침대에 걸터앉아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있었다. 그녀는 옷깃 단추를 채우며 나를 흘겨보았다.
“부함장님은?”
“휴게실에요. 곧 집합시간이잖아요.”
중위는 카라를 세우며 쏘아붙이듯 물었다.
“아까 여기 오셨죠?”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내 어깨를 밀며 방을 나왔다.
“저질스럽게 훔쳐보지 마세요.”
제라스 부함장은 부러진 소파 다리 아래에 잡동사니를 받쳐 소파를 바로 세워놓고 앉아있었다. 룬진 중위와 나는 바닥에 앉았다. 부함장은 아무 일이 없던 것처럼 보고를 받았다. 중위만 못마땅한 얼굴이었는데 나 때문인지 아니면 부함장이 취한 태도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익숙한 일과 앞에서 평정을 되찾았다. 침착한 태도로 아까 패드를 통해 관측된 외벽 부식 상태에 대해 보고를 올렸다. 진지하게 외벽 상태를 직접 살펴봐야할 것 같다고 덧붙이자 룬진 중위가 누가 거길 나갈 거냐고 벌컥 화를 냈다. 가장 직급이 낮은 자신이 나갈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제가 나갈게요.”
내가 쌀쌀맞게 대꾸했다.
“외부 인공 중력 시스템이 안정적인지 확인했나?”
“3시간마다 확인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점검은 1시간 43분 전인데 이상 없었습니다.”
“작업하는 동안에는 내가 직접 실시간으로 점검하지.”
일이 그렇게 되자 룬진 중위도 더는 짜증내지 않고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제복 위에 우주복을 껴입는 동안 기분이 점점 더 나아졌다. 그제야 내가 불안하고 우울했던 것이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스스로를 무력하게 느끼는 상황은 질색이었다. 어떤 때라도 몸을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주어진 일에 매진하는 게 마음 편했다. 우주복 버튼을 눌러 산소와 압력 상태를 점검하는 동안 룬진 중위가 다가왔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통신 칩을 옷 뒤통수에 꽂아 넣더니 죄지은 사람처럼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실컷 짜증내놓고 이제 와서 내가 불편한 것 같았다.
사인을 받고 바깥으로 나갔다. 문을 여는 순간 중력 조정 장치가 작동하며 데크 반경 500m에 투명한 베리어가 씌워졌다. 데크를 중심으로 중력이 만들어졌다. 실제로 60도에 가깝게 서있는데도 신발바닥에 끈끈이라도 붙인 것처럼 똑바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 머리 위로 광활하고 텅 빈 우주가 펼쳐졌다. 나는 거미인간처럼 외벽에 붙은 채 수치 이상 구역까지 걸어갔다. 고개를 숙이자 아이보리색 외벽을 이루는 미세한 이음새들이 보였다. 한 틈 사이에 이물질이 끼어있었다.
“부함장님. 수치 이상 지역에 도달했습니다.”
“외벽 상태는 어떤가?”
“이상 없습니다. 이음새 사이에 작은 이물질이 있습니다. 이번 변동사항의 원인 같습니다.”
“제거할 수 있나?”
“문제없습니다.”
“작업이 끝날 때까지 관제실에서 대기하겠다.”
“감사합니다.”
“나니아를 위하여.”
“나니아를 위하여.”
작업은 십분도 채 되지 않아 끝났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룬진 중위가 내가 완전히 안으로 들어온 것을 확인하고 문을 잠근 후 격폐시켰다. 내 우주복 위에 센서봉을 흔들더니 위험한 물질이 붙어있는지 점검했다. 잠시 후 중위는 우주복 벗는 걸 도와주고는 말없이 자리를 떠났다. 나는 개인실로 돌아와 완전히 식어버린 차를 마저 마셨다. 눕기 전에 허벅지를 살펴보았다. 자주색이었던 중심부가 옅은 보라색으로 희미해진 반면 멍의 영역 자체는 커져서 주변이 온통 누리끼리하거나 녹색이었다. 몸의 회복력이 예전만 못했다. 돌아가면 제때 잠을 자고 제때 밥을 먹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얕은 잠에 빠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떠올린 것은 내가 동기들에게 연락을 넣어야겠다는 다짐을 그새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일어났을 땐 그 사실마저 말끔하게 잊었다.
9
삼주가 훨씬 지났는데도 셔틀은커녕 통신이 잡힐 기미조차 없었다. 그동안 우리 세 사람은 정기적으로 휴게실에 모여서 식량과 식수 상태를 확인하고 관제부스를 드나들며 시스템과 외벽 상황을 점검했다. 어쩌다 수치에 미세한 이상이라도 생기면 내가 직접 밖으로 나가서 확인했는데 아직까지 큰일은 없었다.
룬진 중위와 의외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봐야 고작 하루에 열 마디쯤 됐지만, 가르강튀아에 있을 적에 다른 장교들과 사적으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정말 드물어서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처음에 까탈스럽고 날카롭게 굴던 것에 비해 중위는 의외로 좀 무르고 정이 많은 성격인 것 같았다. 내게 친절해졌다는 소리는 아니다. 그냥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다. 중위는 여전히 내게 불친절했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다. 다만 그녀가 의식적으로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대화를 나누는 것뿐만 아니라 좁은 생활반경에서 자주 마주치다보면 저절로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어쩔 수 없다. 아마 룬진 중위도 이렇게 부딪치는 과정에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대략적으로는 느꼈을 것이다. 그녀가 보는 나는 어떤 사람일지 모르겠다. 상상하기가 힘들다.
중위는 내가 우주복을 입거나 벗을 때 항상 옆에 있었다. 통신 칩 상태를 체크하거나, 아예 칩을 갈아 끼우거나, 우주복 부품 상태를 눈대중으로 확인하거나, 벗을 때 방사선 물질에 노출되진 않았나 살피기 위해서였지만 어쨌든 일을 나설 때나 끝내고 돌아올 때 누군가 옆에 있다는 건 묘한 기분이었다. 가르강튀아에선 이런 일이 없었다. 루이스가 있었지만 내가 다칠 때나 볼 수 있었다. 그 외엔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어쩌다 휴가를 받으면 항상 의무실로 내려갔다. 휴가라고 해봐야 사흘, 길면 일주일 정도였는데 그 시간에 저 멀리 있는 행성으로 관광을 가느니 가까운 의무실에 내려가서 동기와 수다를 떠는 편이 훨씬 이득으로 느껴졌다. 반면 중위는 의외로 시간을 살뜰하게 쪼개 휴가를 받을 때마다 관광지에 놀러간다고 했다. 그녀는 함선이 아무리 최첨단 기술로 무장되어 있고 드넓다고 한들 땅에 직접 발을 붙이고 걷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했다. 푸른 바다나 광활한 차 농장을 내려다보면 그런 믿음이 아주 강해진다고 했다. 멋진 풍경을 보면 기운이 나잖아요?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이내 정신을 차린 것처럼 날카롭게 덧붙였다. 대위님에게 한 말은 아니었어요.
보통 그런 식이었다. 중위는 점점 말이 많아졌다. 할 일이 마땅치 않은 좁은 공간에서 간단한 하루 일과가 무한하게 반복되고 있으니 심심할 만도 했다. 하루 종일 누군가와 성교를 나눌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휴게실에 앉아 멍하니 바깥 풍경을 보고 있으면 마찬가지로 근처를 어슬렁거리던 중위가 어느 순간 멀찍이 떨어진 장소에 앉아 딴청을 부렸다. 내가 좁은 휴게실을 반복해서 뛰거나 걷는 식으로 운동을 시작하면 중위는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어느 날 중위는 부함장에 대한 불만을 슬그머니 털어놓기도 했다. 내가 돌아보자 중위는 눈을 부라리며 나한테 말을 건 게 아니라고 신경질을 냈다. 하지만 어쨌든 휴게실에는 나와 그녀뿐이었기에 혼잣말을 하면 내가 들을 수밖에 없었고, 그 사실을 피차 중위가 모르지는 않을 테니 그 중얼거림은 어느 정도 고의성이 있었다. 내가 넘겨짚지 않았음을 확신한 건 다음 날 중위가 나를 불러 세워 일방적으로 말을 걸었을 때였다. 대위님. 중위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식량이 어느 정도 남았냐고 물었다. 내가 대답하자 그녀는 불만스러운 얼굴로 식사를 조금 더 줄이는 게 좋겠다고 충고했다. 다음 날에도 이와 같은 일이 계속되었다. 중위는 대체로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마지막 샤워가 며칠 전이죠?”
“제가 아껴 써달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이제 물이 그렇게 여유롭지도 않다고요.”
“식수 이야기가 아니었어요. 저도 물탱크가 따로 있는 건 알아요.”
“부함장님께서 뭐라고 하셨죠?”
한 번 말문을 열자 중위는 끝이 없었고, 어느 순간부터 나는 이 대화가 귀찮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경우 중위는 내게 잔소리를 하거나 신경질을 냈기 때문에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듣고 싶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녀는 시시각각 느끼는 불안과 짜증과 공포를 모두 내게 쏟아냈다. 부함장에게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그렇다고 꼭 직급의 문제는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그냥 나를 싫어했다. 사실 중위의 이런 태도변화는 다소 낯선 것이었다. 가르강튀아에 있을 적 나는 사람들이 나를 피하거나 거리낀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있었지만, 다들 겉으로는 전혀 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행동하려했기 때문에 대놓고 나에 대한 악의를 드러내는 태도를 정면으로 받아본 적이 드물었다. 제라스 부함장의 경우도 그러하다. 그는 나를 곧잘 집요하게 괴롭히기는 했지만, 내 출신에 대한 문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폭력을 행사하는 경우는 무척 드물었다. 룬진 중위 역시 평소 나와 부딪칠 때마다 대놓고 빈정거리기보다는 명령을 누락하거나 부상당한 나를 그 자리에 두고 떠나는 식으로 자신의 악의를 표현했다. 그랬던 중위가 갑자기 걸핏하면 나를 빈정거리고 모욕하기 위해 내 앞을 얼쩡거리고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데크에 고립되고부터 중위의 이런 공격적인 성향은 두드러졌다. 그녀는 내게 감정을 노출하기 위해 가르강튀아에 암묵적으로 존재하던 규칙, 나를 고립시키기 위해 조성된 분위기를 깡그리 무시하고 내 존재를 격렬하게 의식하며 자신의 분노를 드러냈다. 그녀는 아칸의 아이들이 보편적으로 까탈스럽고 고집이 센데다가 엘리트 의식에 찌들었기 때문에 상관 앞에서도 고개를 뻣뻣하게 들고 다닌다고 큰 소리를 쳤다. 왜 아칸의 아이들은 다들 그런 식이냐고 내게 따져 묻기도 했다. 대체 대위님은 왜 이 모양이냐고 화를 냈다.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중위에게 ‘그렇지 않은 동기들’의 이름을 나열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은가. 나는 편견 앞에서 맞서 싸울 줄은 알아도 화해할 줄은 몰랐다. 터득하거나 배울 기회가 없었고, 특히 가르강튀아에선 그럴 기회가 전혀 없었다.
내가 중위의 짜증을 받아주며 매번 휴게실을 방문했던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휴게실에 있지 않으면 개인실에 처박혀있어야 하는데, 긴 시간 혼자 앉아있다 보면 점점 알 수 없는 초조함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지루함은 중위의 짜증보다 더 확실한 나의 적이었다. 둘째는 중위가 그렇게 어느 정도 짜증을 내면서 자신의 분풀이를 매듭짓고 나면 시작하는 전혀 다른 맥락의 새로운 이야기 때문이었다. 나는 바로 그 이야기, 중위의 사적이고 특별한 개인사를 듣기 위해 휴게실에 앉아있는 것이었다.
가끔이기는 했지만, 중위는 자신이 여태껏 방문했던 관광 행성 이야기나 생도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들곤 했다. 드물지만 가족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룬진 중위에게는 오빠가 둘이나 있었다. 한 사람은 아이오워스에서 대학을 다니고 나머지 한 사람은 타토에서 건축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아닌 척해도 그녀는 사랑받고 자란 것 같았다. 오랜 기간 헌병 복무를 하며 성격이 많이 망가진 것 같긴 했지만, 가족 이야기를 할 때면 놀랍게도 중위가 무척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내게는 가족이 없었지만, 비슷한 감정을 상상할 수는 있었다. 그럴 때마다 느세파의 형제들이, 특히 오르카가 보고 싶었다. 콘스탄틴 생각은 의식적으로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 생각은 위험했다.
중위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나는 이따금 그녀를 응시하거나 작게 의미 없는 추임새를 넣는 식으로 내가 제대로 듣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러면 중위는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몽상가의 얼굴을 하다말고 불현듯 현실로 돌아와 자신이 관광지나 아이오워스의 어느 벤치에 앉아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고통스러운 눈을 했다. 그러다 데크에 고립된 현재 상황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 황급히 새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가끔이지만 내 이야기를 물어볼 때도 있었다. 정말로 내 사연이 궁금해서라기보다는 내 반응을 끌어내보려고 그러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녀에게 내 이야기를 한 적이 거의 없다. 사연의 대부분이 콘스탄틴을 되살리는 길로 이어져있었던 데다가 그녀에게 그를 공유할 이유도 없었다.
그러다 고립된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무렵 일이 터졌다. 룬진 중위가 폭발했다.
중위는 더는 참을 수 없다고 중얼거리면서 부함장의 방으로 달려갔다. 한창 말을 주고받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리더니 중위가 중간에 소리를 쳤다. 패드를 보여 달라고, 정말 아직까지 통신이 되질 않는 것이냐고 따져 물었다. 부함장은 어느 순간에서든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었다. 수도승이 중얼거리는 것처럼 낮은 톤으로 대화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확한 내용은 들리지 않았지만 그 직후 중위의 목소리가 작아진 걸로 봐선 그녀를 진정시키는데 성공한 것 같았다. 아마 평소처럼 부드럽고 은근한 방식으로 자신의 권위와 직위를 일깨워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거칠게 뺨을 갈기는 소리가 들렸다. 간만에 듣는 날것의 폭력의 소리에 깜짝 놀라 딱딱하게 굳었다. 얼마 되지 않아 중위가 고개를 숙이고 휴게실로 돌아왔다. 오른쪽 뺨에 새빨간 손자국이 나있었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 것처럼 허공을 쏘아보면서도 상처를 가리지는 않았다. 마치 ‘봐, 저 자식이 나를 배신했다고. 보여? 젠장! 죽여 버릴 거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중위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감추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에 감정을 실었다.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잠자코 지켜보는 관객처럼 앉아있었다. 중위는 시큰거리는 숨소리를 감추지 않고 거칠게 휴게실로 들어왔다. 억울하고 분해보였다. 중위는 소파 앞에 도달해서 잠깐 자신이 늘 앉던 장소, 그러니까 나와 적어도 세 칸은 떨어진 구역을 쏘아보았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중위가 걸음을 틀었다. 잠시 후 그녀는 나와 한 칸밖에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 주저앉았다. 긴 침묵이 이어졌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중위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더는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또 한참동안 침묵이 있었다.
중위가 입을 열었다.
“전 원래 이런 취급을 받을 수가 없어요.”
고개를 돌리자 중위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자존심이 상한 얼굴이었는데 나는 그녀가 대체 왜 이렇게까지 빳빳하게 구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 당황스러웠다. 장교들이 부함장에게 얻어맞는 일은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중위가 말했다.
“제라스는 저한테 이러면 안 돼요. 아시겠어요? 당신이랑 전 달라요.”
“알아. 둘이 연인이잖아.”
“뭐라고요?”
중위가 눈을 부라렸다.
“누가 그래요?”
할 말이 없어서 어깨를 으쓱였다. 중위가 대답을 요구하듯 계속 노려보자 나는 한숨을 쉬었다.
“여기서도 태평하게… 했잖아. 아니야? 평소에 부함장이 근무 중에 따로 부르던 것도 그것 때문이잖아.”
중위가 실소했다.
“역시 훔쳐보셨네요. 저질스러워.”
나는 조금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문 열어놓고 텅 빈 복도에서 하는데 소리를 못 들을 리가 없잖아. 오해하지 마. 소리 듣자마자 줄행랑쳤거든.”
“그 넓고 긴 복도에서 소리가 새어 나와봤자죠. C덱이랑 D덱 사이가 얼마나 넓은데.”
“부함장에게 지난 데크 수치 변동을 보고하려던 참이었어. 대답이 됐어?”
중위는 입을 다물었다. 쏘아보는 눈초리가 매서웠다. 나는 그녀가 부함장에게 얻어맞은 분노를 쏟아낼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깊은 피로감을 느꼈다.
“너야말로 나한테 이렇게 굴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내가 말했다.
“내가 언제까지 네 짜증을 받아줄 거라고 생각해?”
“하!”
이제 중위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대위, 기억 안 나요?”
“뭐가?”
“제가 아직 소위일 적에 말이에요. 저랑 심문실 들어갔다가 나오셨던 거 기억 안 나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심문실에 들어갈 때나 나올 때 이따금씩 부사관이나 소위에게 시비를 걸며 으르렁거리던 일이 떠올랐다.
중위는 화가 나서 말을 이어갔다.
“뭐, 가르강튀아에서 그런 일들이야 흔하죠. 때리는 쪽이나 맞는 쪽이나 불쌍하게 보이긴 해요. 하지만 전 예외였거든요. 눈치 없는 당신은 몰랐던 모양이지만. 다른 장교들이 집합 명령 받고 모여서 선임들에게 얻어맞을 때에도 저는 쏙 빠졌거든요. 왜일 것 같아요? 걸핏하면 부하들 때리는 낙으로 사는 저 제라스가 한낱 소위였던 저는 왜 매번 눈감아 줬을까요? 죽어라 맞는 당신과 저는 애초부터 취급이 다르다는 소리죠. 그런데 한낱 중위였던 당신이, 심지어 AI 명령 아래 물건처럼 대량생산된 그 재수 없는 족속들 중 하나인 당신이, 감히 저를 분풀이 대상으로 삼으셨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감히 제게 손찌검을 해놓고는 까맣게 잊어버리시기까지 했네요.”
나는 중위의 말에 혼란을 느꼈다. 그녀를 응시하며 대답을 구해보다가, 그 표정이며 행동거지를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입을 열었다.
“가르강튀아에 직급 외에 계급을 나누는 다른 기준이 있다는 소리처럼 들리는데.”
중위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잠자코 앉아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중위가 내 반응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그래서 더는 입을 열지 않고 자리에 앉아있었다. 침묵이 진행되는 동안 내 기분은 점점 더 나빠졌다. 폭력적으로 중위를 캐묻는 편이 좋을지 아니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는 편이 좋을지 저울질했다. 그것 외에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러다 갑자기 중위가 고개를 젖히며 코를 감싸 쥐는 바람에 내가 두 가지 방법 모두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중을 타고 흘러내린 코피가 중위의 가슴께를 한 번 적히고 바닥에 뚝 뚝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가 제자리에 앉았다. 그러다 생각을 바꾸어 다시 일어났다.
나는 침착하게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평소 이런 상황을 많이 겪어봤기 때문에 내가 해야 할 일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비록 대부분 내가 룬진 중위의 입장이긴 했지만.
그녀의 인중을 눌러 피를 닦아냈다. 몸을 조금 숙이도록 만들었다. 그런 후 코 앞부분을 꾹 누르면서 중위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중위는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피를 흘리기 시작하자 그녀는 놀랄 만큼 순순하고 얌전해졌다. 나는 코피가 멎을 때까지 손수건으로 지혈을 했다. 다행히 피는 금방 멈췄다. 손수건을 떼어내고 코피가 완전히 멈췄는지 확인하는 동안 나는 그녀에게 해야 할 말을 골랐다. 적어도 내가 가르강튀아에서 지낸 5년 간 무엇을 느끼고 판단했는지, 그리고 지금 어떻게 하고 싶은지 정도는 말해줘야 할 것 같았다.
마침내 중위의 코피가 완전히 멈춘 것을 확신하자, 내가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우리 함선에 비밀이 있다는 거 알고 있어.”
중위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녀가 대답할 줄 알고 기다렸지만 침묵이 계속되자 말을 이어나갔다.
“왜냐하면 아무도 나를 어떤 일에 끼워주지 않았거든. 업무에 있어서든, 사적으로든. 가르강튀아에는 언제나 비밀이 있었지. 나는 결코 참여할 수 없는 사적이거나 공적인 비밀들이.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관심을 끄고 살았어. 그게 뭐가 됐던 내게 알릴 필요가 없는 정보기 때문에 주어지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거든. 혹은 필요해도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너도 나한테 그렇게 해왔잖니. 요나에서 사살명령을 누락한 거, 중위 너지?”
중위는 묘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래서요?”
“내가 모르는 함선의 비밀이 있다고 그렇게 자랑스럽게 떠벌리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야. 방금 네가 한 말을 솔직히 반도 이해하지 못했어. 가르강튀아에 표면적으로 존재하는 계급 차이 외에 다른 기준이 될 만한 게 있었나? 그렇다면 중위 너는 부함장과 적어도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라는 건가? 그렇지만 말이 안 되잖아. 내가 네가 알고 있는 계급 체제에서 가장 밑바닥에 있는 사람이라면 왜 여태껏 내게 존칭을 사용하고 내 명령에 순순히 따랐지?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를 섣불리 떠들어놓고 내가 상처받기를 기다리며 반응을 살피는 이유가 뭐야? 하지만, 상관없는 일이지. 나는 이런 일들이 익숙해. 나를 소외시킬 비밀이 하나 더 늘었다고 해서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진 것처럼 굴 수는 없어. 유감스럽지만 중위 방금은 전적으로 네가 실수한 거야.”
중위는 무표정했다. 나는 쌀쌀맞게 대꾸했다.
“솔직히 말할게. 중위, 네겐 웃기는 소리일 지도 모르겠어. 그렇지만 방금 대화는 못들은 걸로 치고 앞으로도 이 휴게실에 나오고 싶어. 지난 5년 간 나를 이렇게라도 상대해주는 동료장교들이 거의 없었거든. 나는 네 짜증을 받아도 불편하지 않을 만큼 생각이 없거나 둔하기 때문에 여기 앉아있는 게 아니야. 나는… 나는 단지 외롭기 때문이야.”
나는 바닥을 쏘아보았다.
“넌 내가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지. 아칸의 아이라 콧대가 높고 뻔뻔하다고 고개를 치켜들며 다닌다고 하지. 하지만 중위, 그렇지 않아. 인정할게. 너를 포함한 가르강튀아의 모든 장교들이 나를 상처 입히기 위해 진행했던 그 비밀스러운 분위기는 내게 유효했어. 최근에서야 그 사실을 인정하게 됐어. 나는 5년 동안 상처받았고 정말이지 끔찍하게 외로웠어. 외롭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던 때가 있기는 했지. 하지만 모든 게 끝나버렸어. 나는 내 손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끝장냈고 내 동기들은 이 사건으로 모두 뿔뿔이 흩어졌어. 이제 나는 아무것도 할 줄 몰라. 오히려 여기 갇혀있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어. 여기서는 적어도 해야 할 게 자꾸만 생기거든. 여기서는 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절대적으로 부각되지. 중위에겐 형제도 돌아갈 집도 있지만 내게는 없어. 가르강튀아가 내 집이었어, 중위. 그곳에서 단 한 번도 편하지 못했고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들 이제는 그곳 말고 돌아갈 곳이 없어. 내겐 선택지가 없어, 중위. 하물며 이 고립된 데크에서조차 나는 선택할 수 있는 게 몇 안 돼. 그리고 나는 너를 선택할 거야. 네가 얼마나 짜증나게 굴던 간에 혼자인 것보다는 나아. 이 순간에도 나는 외로워. 구타한 사실을 잊은 것에 대해선 사과하겠어. 유감스러운 일이야. 거기 탄 모든 이들처럼 나 역시 망가졌어. 그리고 거기 탄 모두가 섬세하게 의도한 모양새대로 비참하게 살고 있지. 중위, 나도 알고 있어. 네가 뭘 숨기고 있는지 구체적으로는 몰라도 그게 결과적으로 나를 비참하게 만드는 비밀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어. 그러니 더는 말하지 마. 못 들은 척 해줄 테니까 계속 이곳에 나와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굴어줘.”
휴게실에 침묵이 감돌았다. 룬진 중위는 대답이 없었다.
중위가 내 손에서 손수건을 낚아채더니 콧대를 연신 꾹꾹 눌러댔다. 이미 코피가 멈춰서 핏자국만 군데군데 묻어나왔다. 데크에 내려앉은 침묵이 어느 때보다 견디기 힘들었다.
한참 뒤 중위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함장이랑 사귀지 않아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중위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때 우리가 성교한 건 그가 필요하다고 요청했기 때문이에요. 전 그에게 협력할 필요가 있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응해줬죠. 하지만 내가 그에게 성교가 필요하다고 요청했을 때, 그는 듣지 않았어요. 그는 공유하지 않았죠. 그 뒤로 저희가 관계를 가진 적은 없어요. 저도 응하지 않았거든요. 한 번 거절하자 그도 다시는 묻지 않았어요. 대답이 됐나요?”
나는 그렇다고 했다.
중위는 무표정에 가까울 만큼 차분하고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절 얕보십니까?”
“아니.”
중위가 나를 쳐다보았다.
“가르강튀아 기밀에 신경을 끈 지 오래라고 하셨죠. 살기 위해서입니까?”
“응.”
“어느 쪽이든 무용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리고, 대위님 짐작이 맞습니다. 당신을 향한 소외와 적대는 명령되어 있습니다. 당신이 가르강튀아에 정붙이지 못하게 하려는 것도 맞아요. 당신이 지금 느끼는 것은 우리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놓은 외로움입니다. 물론 저는 순수하게 당신 같은 출신들이 싫습니다. 징그럽거든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네요.”
그런 뒤 피투성이가 된 손수건을 내려다보았다.
“빨아드릴게요.”
중위가 선심 쓰듯 말했다.
“제 물로요.”
며칠이 지났다. 어느 날 한 시간 가량 외벽에 매달려 점검을 마치고 개인실로 돌아와 보니 서랍장 위에 깨끗하게 빤 손수건이 놓여있었다. 손수건만 놓여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손수건 옆에 놓인 연고를 집어 들었다. 타박상과 찰과상이라는 단어가 적혀있었다.
제라스 부함장은 이상하리만치 평온하고 조용했다. 중위가 불안과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의 방으로 달려간 이유를 이해한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어가는 와중에도 평정을 유지하고 다른 생각에 잠긴 것처럼 행동하는 그의 태도는 모로 보나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다. 고립된 지 8주가 지나가는 시점에서, 식량과 식수가 매일매일 조금씩 줄어드는 상황 속에서, 그는 대체 무엇을 확신하는 것일까?
그 이후에도 중위와 부함장 간에 말다툼이 있었다. 밤마다 중위는 부함장의 개인실을 드나들며 조용한 목소리로 자신의 의심을 드러내고 사실관계를 확인하려고 들었다. 불면증 때문에 밤마다 뜬눈으로 밤을 새우던 나는 때때로 C구역까지 넘어오는 분노에 찬 중위의 목소리를 듣고 눈을 깜빡이곤 했다.
이 시기에 내가 좀 더 능동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에 개입해 분위기를 완화하는 노력을 기울였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지 생각해본 적 있다. 모든 것이 준비된 채 다만 폭발하지 않고 그 자리에 놓여있던 순간, 내가 과거와 현재를 긴밀하게 연결하고 앞으로 벌어질 일을 구체적으로 알아차릴 만큼 영민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나를 둘러싼 가르강튀아의 비밀들과, 그 비밀을 나누며 불가피한 유대감을 나누던 부함장과 룬진 중위 간의 마찰에 좀 더 관심을 기울였더라면 분명 어떤 일들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때 나는 무기력했고 의지도 부족했다. 몸은 돌덩이 같았고 머리도 예전처럼 굴러가지 않았다. 무엇보다 자신감이 완전히 떨어진 상태였다. 룬진 중위를 잃은 일은 한동안 내게 많은 질문과 고통을 남겼다.
그 일은 우리가 탄 데크가 반경 6m쯤 되는 운석을 아슬아슬하게 비껴간 지 이틀 쯤 지났을 무렵 벌어졌다. 고립 상태가 길어져 패드를 확인하지 않고는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생체리듬이 엉망이 되어가던 때였다. 우리 모두 지쳐있었고 무척이나 곤두서있었다. 운석이 데크 외벽을 긁으며 지나갔기 때문에 누군가 바깥으로 나가서 상황을 확인해야만 했다. 최악의 상황에서는 몇 시간 동안 외벽에 매달려 운석 파편과 먼지를 긁어내는 작업을 해야 할 수도 있었다. 나는 그동안 해왔던 대로 이번에도 외벽을 점검하고 보수하는 일은 내 몫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부함장이 룬진 중위를 지목하더니 외벽 보수를 지시하는 바람에 갑자기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중위는 잠시 그 자리에 뻣뻣하게 서서 싫다고 딱 잘라 일갈했다. 그러자 부함장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자네는 기술부잖나. 이번 일을 대위에게 맡길 수는 없어. 지휘부인 대위가 뭘 알겠나.”
“대위는 아칸이 낳은 자랑스러운 아이가 아닌지요? ACOTS에서 배운 연계지식을 발휘하면 외벽 보수는 일도 아닐 걸요.”
“중위, 지금 나는 자네에게 명령 중이네.”
“아하, 그러셨군요. 저는 그런데 이미 어떤 명령을 따르는 중이고 그건 부함장님도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하는데요.”
부함장이 말없이 중위를 내려다보았다. 일이 심각해질 것을 감지한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보수를 자원했다. 중위는 코웃음을 치면서 고개를 돌렸다. 한동안 말이 없던 부함장은 작게 욕지거리를 하면서 관제부스로 향했다. 나는 우주복을 입기 위해 복도로 나갔다.
보수는 총 5일 동안 진행되었다. 내가 작업에 굼뜬 까닭도 있었지만 외벽 손상 정도가 예상보다 심각했기 때문에 하루 이틀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마지막 날, 외벽 문을 열고 들어오는 과정에서 중력 장치가 순간적으로 오작동을 일으키는 사고가 있었다. 한순간 기압 차로 우주 공간까지 날아갈 뻔했다. 재빨리 문고리를 붙잡아 버티다가 시스템이 정상 가동되자 안으로 몸을 던졌는데, 돌아와 보니 손목이 심하게 부어올라서 움직이기가 힘들어졌다. 내가 외벽 점검을 마칠 때까지 관제부스에 앉아 실시간으로 시스템을 확인하는 부함장은 이 오류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자신의 실수가 앞으로의 위상에 타격을 입힐까 좀 짜증이 났던 것 같다. 부함장은 해당 오류의 원인을 분석하느라 이틀이나 진땀을 뺐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관제부스에 들어가 패드를 들여다보며 짜증스럽게 입술을 두드려댔다. 그러다 사흘째 되는 날 모든 시스템을 정상 복구시켰다고 말했다.
부함장이 왜 하필 그때 관제부스를 나오며 중위를 공격하기로 마음먹은 건지는 모르겠다. 아마 일전부터 쌓여있던 스트레스가 폭발했는지도 모른다. 일전에 외벽 보수를 두고 벌어졌던 마찰이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리라고 추측한다. 느긋하고 여유로웠던 부함장이 마침내 중위를 더는 참아줄 수 없다는 감정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그때까지 적어도 신경질적으로나마 공존하는 한 팀이라는 인상을 주었던 두 사람은 이미 오래 전부터 이 관계가 삐걱거려왔다는 사실을 더는 감추지 못하고 완전히 갈라설 준비를 마쳤다.
관제부스를 나온 부함장은 미묘한 조롱과 한심함을 담은 눈빛으로 중위를 한 번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사람을 기분 나쁘게 만드는 특유의 은근한 화법으로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여기서 밥벌이를 하는 건 나와 대위뿐인 것 같군.”
살벌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중위가 매섭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저한테 하신 말씀입니까?”
“달리 반박할 말이라도 있나?”
제라스 부함장이 빈정거렸다.
“자네 꼴을 좀 보게. 할 줄 아는 거라곤 신경질을 내고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일뿐이지. 그동안 이 데크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자네 스스로 움직인 게 얼마나 되나?”
중위가 벌떡 일어났다. 주먹을 쥐고 눈을 부라린 채였다.
“유글라스 제라스.”
나는 깜짝 놀라 중위를 돌아보았다. 부함장은 그녀의 태도에 놀란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중위를 향해 얼굴을 약간 기울이고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중위가 냉소적으로 말했다.
“한동안 부함장으로 대접해줬더니 정말로 부함장이라도 된 것처럼 떵떵거리는군.”
“뭔가 착각하는 것 같아 말해두자면,”
제라스 부함장이 말했다.
“나는 진짜 가르강튀아의 부함장이라네.”
“있으나마나 한 부함장 딱지에 진짜로 집착할 줄 몰랐군.”
중위가 으르렁거렸다.
“잘 들어, 제라스. 지금부터 내게 대접받을 기대 따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오늘부로 다 관두겠어.”
“명령을 위반하겠다는 건가?”
“아니. 명령을 위반하는 건 너지, 제라스. 이건 상위명령이고 넌 그 명령에 의해 부함장이라는 딱지만 붙이고 있는 운 좋은 놈에 불과해. 내 앞에서 주름 잡을 생각일랑 하지 않는 게 좋아. 네가 품위에 그렇게 집착하는 것도 내 눈엔 아주 같잖게 보여. 자꾸 이 상황을 빌미로 내게 껍데기뿐인 네놈의 권위를 행사하려고 든다면 나도 가만있지 않겠어.”
“가만있지 않겠다… 자네가 무슨 수로?”
그 순간 중위는 폭발할 것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입을 벌렸다. 그러다 순간 어떤 생각이 섬광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스친 것 같았다. 입을 벌린 채 멍청하게 굳어있던 중위의 눈동자 속에서 서서히 어떤 분노와 경악이 퍼져나갔다. 나는 조금 전까지 간신히 제정신을 유지하던 한 사람이 스위치를 내린 듯 미쳐버리는 장면을 눈앞에서 똑똑히 보았다. 중위의 얼굴은 이제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너… 통신을 받은 거야. 그렇지?”
제라스 부함장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중위가 웃음을 터뜨렸다. 입 꼬리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중위는 눈을 부릅뜨고 삿대질을 하면서 말했다.
“너 분명 통신을 받은 거야. 대체 언제 받은 거지? 그렇게 잘난 체를 하더니 믿는 구석이 정말 있긴 있었던 거였군! 누구야. 누구와 거래한 거지? 요나 함장? 오리아스? 설마 부총독님? 당장 말해!”
나는 침묵하며 서있었다. 두 사람이 감추고 있던 비밀에 발조차 담그지 못했다는 사실이 명확해진 마당에 괜히 끼어들었다가 불안정한 중위의 주목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부함장 역시 비슷한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성가시다는 눈으로 중위를 내려다보던 부함장은 잠자코 서있던 내 존재를 필요에 의해 뒤늦게 눈치 챈 것 같았다. 거기 있는 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얼굴로 부함장이 고개를 돌렸다.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대위, 일전에 말한 대로 모든 일이 뒤바뀔 걸세. 중위가 자네 역할을 모두 대신할 테니 가르강튀아로 복귀하면 맡은 바에 충실하도록.”
나는 부함장에게 전해들은 바가 전혀 없었고 그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몰랐지만 방금의 말이 오로지 룬진 중위를 분노케 만들기 위해 발언되었다는 사실만큼은 명확히 인지했다. 그리고 작금에 그가 받아내야만 했던 성가신 문제들을 내게 떠넘겨버렸다는 사실 역시 알아차렸다. 부함장의 이 치사한 방식에 어떤 식으로든 반응하기 전에, 중위가 먼저 움직였다. 무시무시한 얼굴로 중위는 나와 부함장을 번갈아 쳐다봤다. 목 근육이 고장 난 새처럼 나와 부함장을 정신없이 번갈아가며 쳐다봤다. 그러는 동안 눈두덩이가 깊어지고 얼굴이 침울해지더니 절망과 배신감이 떠올랐다. 흐느끼듯 웃는 소리를 내며 중위가 소리쳤다.
“작당을 했다는 거야? 대체 언제부터 둘이 붙어먹으며 뒤에서 날 농락했지? 그렇지만 내가 당해줄 것 같아? 제라스, 알려주지. 가르강튀아에서 연락을 받았어. 이주일 전에 말이야. 넌 아무 것도 받지 못했다고 시치미를 뗐지만 네가 마찬가지로 연락을 못 받았을 리가 없잖아? 나는 버려지지 않았어. 알겠어? 연락을 받은 건 너만이 아니라고. 나는 버려지지 않아! 네가 아무리 작당을 하고 이 대량생산제품을 구슬려도 상황은 네 맘대로만 굴러가지 않는다고! 당장 말하겠어. 기밀을 누출해서 모든 걸 망쳐버린 너를 고발하고 잘못을 바로잡겠어!”
중위는 휴게실을 박차고 복도로 뛰쳐나갔다. 나는 그녀가 겁이 나면서도 걱정이 되어 뒤따라 나섰다. 부함장은 나를 잡지 않았다. 나는 두 팔을 휘저으며 D덱으로 달려가는 중위의 뒷모습에 압도되어 우뚝 섰다가, 심호흡을 하고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물건을 던지고 뒤지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고립된 데크에서 불안과 분노를 제대로 해소하지 못하면 언제든 평정을 잃고 날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생각은 점점 많아지는데 몸을 움직일 시간이 줄어들면 비약적인 사고를 통해 말도 안 되는 상상을 진실로 믿어버리는 순간이 벌어진다. 나 역시 그 일을 겪었고 그 뒤로는 콘스탄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중위 역시 트리거가 있었을 것이다. 부함장이 방금 그것을 당겨버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지난 고립 상황에서 콘스탄틴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중위의 하잘 것 없는 짜증을 받아주고 그녀의 사적인 영역에 발을 디뎠다. 그녀가 진실로 나를 받아들였든 아니든 간에 나는 이미 중위를 필요로 했고 중위 역시 은연중에 그 사실을 눈치 챘음에도 불구하고 나를 내버려두었다. 나는 중위에게 어느 정도 빚을 진 부분이 있었다. 그녀는 나에게 이용당하는 것을 눈감아 주었다. 우리는 서로가 미쳐버리지 않도록 감시하는 동시에 필요로 했다. 우리는 이미 한 배를 탄 동료였다. 표면적으로 분명 그랬다.
중위가 부함장의 의도에 따라 나를 공격하려 들었던 것은 배신이 아니라 곤경에 빠진 자의 허우적거림에 불과했다. 오히려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보고 무방비한 상태의 그녀를 조종하려고 든 사람은 제라스 부함장이었다. 부함장은 중위를 배신함으로써 나에게 새로운 동맹을 제안했지만 나는 그를 받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단 한 번도 휴게실에 나온 적 없었다. 그는 지난 시간동안 나를 보살피거나 나에게 그 자신을 보여주고 보살핌을 받으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휴게실에 남아 부함장의 곁을 지키는 대신 발광하며 뛰쳐나간 룬진 중위를 뒤따른 나의 행동은 그가 은밀하게 돌려 제안했던 동맹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일종의 선언이었다. 설령 그녀가 미쳐버린 상태라고 해도 나는 나를 보살펴준 그녀를 위해 행동할 것이었다. 그녀가 나를 오랫동안 배신해왔다는 사실을 고백한 순간에도 그녀의 인중을 흐르던 피를 닦아주었을 때처럼. 나를 죽이기 위해 5년 만에 나타난 콘스탄틴을 구하기 위해 심문실에 들어섰을 때처럼. 내 외로움의 원인이면서 내 외로움을 해갈시켜준 사람들을 결국 나는 선택할 것이었다. 그들이 나를 배반할지언정 나는 그들을 배반할 수 없을 것이었다. 부함장의 개인실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그 사실을 깨달았다.
부함장의 개인실에 들어섰을 때, 방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침대와 서랍이 뒤집어져 있고 패드며 식량과 식수를 담은 봉지 따위가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통조림이 내 부츠에 맞고 복도로 데굴데굴 굴러나갔다. 방을 한 차례 엎어놓은 중위는 씩씩거리며 앉아있었다. 나는 바닥에 떨어져 금이 간 부함장의 패드를 보았다. 접근시도를 수차례 한 것인지 접속제한 화면과 경고 메시지가 가득 떠있었다.
“중위.”
내가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룬진 중위.”
중위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잠깐이지만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대체 부함장은 어디 있는 거지? 당신은 대체 누구야? 표정으로 묻던 중위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비틀거리며 내게 다가온 중위가 거칠게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코드를 말해. 넌 알고 있지? 알고 있잖아!”
“중위.”
“축하해! 당신 집으로 돌아가면 앞으로 모든 게 달라질 테니까. 이 배신자!”
“부함장이 거짓말을 한 거야. 난 아무것도 전달받지 않았어.”
“하! 이봐, 대위. 난 이미 모든 걸 간파했어. 이제 와서 수습해봤자 늦었다고.”
중위가 에러 화면으로 도배된 금이 간 패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뭔가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빤하지 않아? 부함장이야 늘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재수 없게 굴었으니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지만 대위 넌 최악이야. 순진한 것처럼 굴더니 뒤에서 부함장 따위와 붙어먹었다는 거지. 넌 역겨워. 적어도 난 네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비밀로 유대를 다지는 방식을 알고 있는 건 너와 부함장이야. 난 그 유대와 아무 관련 없어.”
“웃기지 마. 너도 숨기는 게 있지? 알고 있어. 아,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빌어먹을, 너 네 개인실에 뭔가를 숨겨뒀잖아. 모를 줄 알아? 상식적으로 폭탄이 터지는 와중에 자기 개인실 물건 챙기겠다고 돌아가는 멍청이가 어디 있어? 당장 말해. 밤마다 네가 돌아다니는 소리를 들어. 닫혀있던 개인실을 들락거리는 소리를 들어. 네가 어딘가로 통신하는 소리를 들어. 내가 모를 줄 알아? 느세파 대위, 나는 멍청이가 아니야. 나는 너처럼 보고도 못 본 척 하고 듣고도 못 들은 척하는 멍청이가 아니야!!”
중위가 나를 떠밀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나는 D구역 복도를 비틀거리며 뛰어가는 중위를 쫓았다. 그녀는 흐느끼는 소리를 내며 손으로 D구역 복도의 모든 문을 더듬어댔다. 그러다 조금 우그러지고 그을린 흔적이 있는 문 앞에, 데크 분리 전까지 내 개인실이었던 문 앞에 멈추어 섰다. 중위는 우그러진 탓에 미세하게 벌어진 문짝 틈으로 거칠게 손가락을 욱여넣었다. 한 발로 문짝을 지탱하고 거기에 체중을 실으며 두 팔에 힘을 주었다. 나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 문짝은 우그러진 탓에 잘 열리지 않았다. 중위는 무시무시한 욕지거리를 하며 그 문이 열릴 때까지 사투를 벌였다. 비명을 지르고 고함을 치고 입에서 거품을 흘리며 주먹으로 문짝을 때리고 손가락에 힘을 주고 우스꽝스러운 모양새로 문틈에 매달렸다. 그러다 마침내 그 육중하고 단단한 문이 그녀의 광기에 못 이겨 천천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벌어진 틈으로 뒤집어진 서랍과 램프, 엉망이 된 침실이 눈에 들어왔다. 한쪽 구석에 무언가 쌓여있었다. 그게 무엇인지 깨달은 중위가 헐떡이며 웃어댔다.
“저기 있었군. 숨긴 게 저기 있었어! 너 내가 절대 모를 거라고 생각했지? 저렇게 많은 식량을 은밀하게 빼돌려놓고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배은망덕한 것 같으니. 이 배신자 같으니. 넌 쓰레기고 비열한 협잡꾼이야. 넌 죽어도 싸. 널 동정했다는 건 전부 거짓말이야. 아무도 널 동정하지 않아. 난 널 간파했어. 넌 텅 비었고 아무것도 없어. 명령에 따라서 사람이나 죽여 대는 멍청한 놈이지. 생각할 줄도 모르고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몰라. 코앞에 단서가 있는데도 모르지. 네가 너무 멍청해서 요나로 갔을 때도 짜증이 나서 미쳐버릴 것 같았어. 그거 알아, 대위? 넌 네 잘난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죽게 될 거야!”
중위가 드나들기 충분할 만큼의 틈이 만들어졌다. 중위는 게걸스럽게 몸을 집어넣고 힘을 줘서 개인실 안으로 쏟아지듯 들어갔다. 넘어진 서랍에 발이 채이며 넘어졌다. 벌떡 일어난 중위가 무릎으로 기어 박스 앞에 도달했다. 박스는 잘 포장되어 있었고 한눈에 보기에도 무게감이 있었다. 중위가 미친 듯이 흔들자 안에서 통조림끼리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중위는 박스 세 개를 바닥에 집어던지고는 그 중 하나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박스를 뜯어내고 내용물을 꺼내들었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통조림처럼 생긴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다 꿈에서 막 깨어난 것처럼 나를 쳐다봤다. 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중위가 숨겨놓은 식량이라고 착각하고 마구잡이로 뜯었던 그 박스에는 몇 달 전 내가 품위를 지키겠답시고 충동적으로 구매해놓고 구석에 방치해두었던 마맛산 헤어오일이 들어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얕은 잠에서 깨어났더니 이상하리만치 데크가 조용했다. 나는 휴게실로 나왔다. 소파는 텅 비어있었지만 어디선가 삑삑 소리가 들렸다. 비상관제부스로 다가간 나는 중력 장치가 작동 중인 것을 보았다. 누군가 바깥에서 보수를 하기 위해 시스템을 동작시킨 거였다. 그런데 중력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낮았다. 불길한 예감을 받은 나는 허겁지겁 외벽과 연결된 C구역 끄트머리의 비상문까지 달려갔다. 문을 열자마자 어마어마한 기압 차가 나를 우주공간으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비명을 지르며 간신히 문을 닫고 개인실로 내달렸다. 내 패드에 기록된 외벽 상태를 확인했다. 사십 여분 전에 감지된 이상 수치 내역이 십여 분에 걸쳐 전송되어 있었다. 나는 비품실로 사용하는 빈 개인실로 달려갔다. 우주복이 없었다. 대신 룬진 중위의 총과 곤봉이 있었다. 나는 중위의 개인실로 달려갔다. 그 무렵에 나는 울고 있었다. 침대에는 중위의 패드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 동일한 내역이 기록되어 있었다. 중위는 없었다. 나는 부함장의 개인실로 달려갔다. 제라스 부함장이 깨진 패드를 만지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대위, 무슨 일이지?”
“룬진 중위가 없습니다.”
나는 울음을 삼키며 말했다.
“중위가 외벽 보수를 하러 나간 뒤에 실종된 것 같습니다. 중력 시스템에 또다시 이상이 발생했습니다. 관제부스 패드를 확인해주십시오, 부함장님. 실종지점을 최대한 빨리 파악하고 데크를 추진해서 돌아가야 합니다.”
그때까지 나는 부함장을 증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가 최소한의 인간성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던 것 같다. 단지 그 인간성을 내게는 발휘하지 않는 것뿐이라고, 나와 달리 중위는 가르강튀아에 소속된 장교이자 또 다른 비밀을 나눈 동료로서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영향을 줄 거라고 믿었던 것 같다. 비록 불미스러운 언쟁을 나눈 이후라고 해도 중위는 부함장의 명령에 따르기 위해 뒤늦게 홀로 외벽 점검에 나서는 위험을 감수했고 그 결과 부함장이 미처 해결하지 못한 시스템 오류에 의해 우주 공간으로 떨어져나가고 말았다. 그리고 그 사실을 그가 인지하고 있는 한, 모든 일을 수습하기 위해 책임을 다할 거라고 나는 기대했던 것이다. 아니다. 내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었다. 중위에게 마음을 쏟아버린 뒤라서 상황을 냉철하게 살펴보고 그에 합당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었다.
중위가 실종된 지 적어도 삼십 분이 넘게 흘렀고 데크는 그녀와 반대방향으로 흘러갔기 때문에 당장 연료를 소비해 실종지점으로 추진한들 제때 그녀를 구출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것은 불가능했다. 중위가 어디로 흘러갔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녀를 구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녀를 영영 잃어버렸다. 그 사실을 부함장 역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입을 열었을 때 나는 도무지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부함장은 자신에게 달리 무엇을 기대하냐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가 어깨를 으쓱이며 피곤한 투로 말했다.
“유감이군.”
그게 다였다.
나는 떨면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명령을 내려주십시오.”
“무엇을 말인가?”
“제가 무엇을 하면 될지 알려달란 말입니다. 하실 말씀은 그게 전부입니까?”
부함장이 나를 쳐다봤다.
“대위 지금 내게 어리광을 부리는 건가?”
“제라스 부함장님, 당신은 최소한의 인간성도 발휘하지 못합니까? 동료가 우주공간을 표류하는 중입니다. 어떤 조치라도 취해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자네, 그녀를 동료라고 생각했나?”
부함장은 침대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물론 중위가 표류된 지금 사태는 내게도 무척 유감이라네. 하지만 자네가 그렇게 과민 반응할 것도 없어. 중위는 자네를 동료로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지난 몇 주간 중위는 내게 자네를 버리자고 설득했어. 마더쉽에서 구조셔틀이 오지 않는 이유가 자네 때문이라고 생각했거든.”
나는 침묵했다. 부함장은 내게 찡그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동안 대위에게 못되게 굴지 않았나? 잘 됐다고 생각하고 잊어버리게.”
이제 그는 한 팔을 베고 나머지 팔로 패드를 들여다보며 입술을 내밀고 있었다. 다리는 편하게 쭉 뻗었고 발끝을 까딱거리며 불규칙한 리듬을 타고 있었다. 얼굴에서 표정이 미끄러지는 게 느껴졌다. 무언가 깨달았으나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고의적으로 벌이신 일이군요.”
나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당신이 중위를 죽이셨군요.”
“대위.”
부함장이 경고하듯 말했다.
“돌아가면 자네에게 감정적으로 판단하지 않는 버릇을 들여야겠군.”
나는 방에서 물러났다. 부함장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부함장님을 신뢰한 적 없습니다. 명령을 내려주시지 않으니 제 스스로 판단하겠습니다.”
부함장은 웃지도 않고 진지하게 물었다.
“자네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이기는 했나?”
나는 몸을 돌렸다. 뛰는 동안 시야가 아득해졌다가 돌아왔다. 휴게실에 도착하자마자 관제부스 안으로 몸을 던졌다. 패드를 작동시키고 데크 추진 기능을 점검하고 있을 때, 뒤에서 불쑥 나타난 손이 내 목덜미를 잡아챘다. 재빨리 몸을 비틀었다. 주먹을 날렸지만 자세 때문에 제라스 부함장은 손쉽게 사정거리를 벗어났다. 그는 나를 부스 바깥으로 질질 끌고 나간 뒤 바닥에 내팽겨 쳤다. 고개를 들자마자 목덜미가 잡혔다. 시스템 동작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패드 안내음이 휴게실을 울리기 시작했다. 제라스 부함장은 발끝으로 몸을 짓누르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대위, 내 허락 없이 패드를 조작하지 말게.”
나는 시큰거리는 숨을 내쉬며 기침을 했다. 부함장이 고개를 숙이고 내 눈을 똑바로 들여다봤다. 발끝으로 뺨을 툭툭 건드리며 내 얼굴을 살폈다.
“대위, 자네는 정말…….”
패드가 삑삑거리며 조작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을 잘 믿는군.”
그가 말했다.
“너무 쉽게 용서하고 말이지.”
차가운 촉감이 뺨에 닿았다. 헐떡이며 고개를 비틀자 총을 들이대는 제라스 부함장이 보였다. 그는 무표정했다. 생각에 잠긴 것 같았지만 동시에 이미 결론을 내린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숨을 들이마시다 말고 몸부림을 쳤다. 부함장이 얼굴을 걷어찼다. 다시 몸부림치자 한 번 더 걷어찼다. 두 번. 세 번. 인중을 타고 흐르는 피가 느껴졌다. 몇 번 더 반항하다말고 축 늘어졌다. 나는 이를 악물고 눈을 떴다. 부함장은 나를 보며 여유롭게 미소 짓고 있었다.
“가르강튀아에 있는 지난 27년 간 나는 자네 같은 장교들을 줄곧 지도해왔네. 그게 내 임무였거든. 반면 룬진 중위의 임무는 자네 같은 장교들이 가르강튀아와 너무 가까워지지 않도록 하는 거였지.”
걷어차인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턱이 딱딱 부딪쳤다. 부함장은 이제 허공을 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함선에 애정을 느끼게 되면 임무에 의욕을 가지게 되잖나. 의욕을 가지기 시작하면 모든 게 골치 아파지지. 아귀에 들어맞지 않는 일이 발생하면 의심하게 되고 그 의심을 파헤치려고 들거든. 자네는 우쭐하지도 않고 건방을 떨지도 않아. 내가 지도한 덕분이지.”
그가 덧붙였다.
“태생적으로 좀 멍청한 구석도 있고.”
몸에서 완전히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반쯤 감긴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역광 때문에 부함장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보이지가 않았다.
“느세파 대위, 진정하게. 나는 명분 없이는 살인하지 않는다네. 자네랑 똑같지. 모든 제국군들이 그래야하고. 우린 명령이 없으면 사살하지도 않아. 중위 일은 정말로 유감이네. 고의적인 사고는 아니었어. 대체 왜 혼자 밖으로 나간 건지 모르겠군. 중위는 하다못해 자네를 불러다 관제부스에 앉혀놓기라도 해야 했어. 그녀를 죽인 건 그녀의 단독행동이야. 부주의가 그녀를 죽인 거지. 자네도 조심하게. 이런 곳에서 죽게 될 목적으로 키워진 군인은 아니니까.”
총구를 움직여 내 얼굴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자-랑스러운 아칸의 아이가 아닌가. 그렇지?”
그가 다시 말을 시작했지만 목소리가 아득해졌다.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악물려고 했지만 턱에 힘이 실리지 않았다. 부함장의 실루엣이 다가와 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씩씩거리며 욕을 중얼거렸다. 그 순간 뺨에 닿은 총구가 떨어져나갔다. 부함장이 얼굴에서 손을 거뒀다.
잠시 그의 두 손이 내 몸을 더듬거리다 떨어져나갔다. 나는 몸부림치다 말고 그대로 바닥에 엎어져 끙끙거렸다.
“구조대가 올 거야. 이렇게 늦을 거라곤 예상하지 못했지만… 조만간 모든 일이 마무리될 테니 그동안 미쳐버리지 않게 조심해주게. 특히 우리는 돌아가서 할 일이 많아.”
발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삑삑 소리가 무의식의 세계에까지 침투하지 못하고 점점 아득하게 가라앉았다. 룬진 중위를 생각했다. 우주복에 달린 소형 추진기와 통신 칩의 존재를 떠올렸다.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죽었다는 것조차 받아들일 수 없었다. 기절하기 직전에 떠올린 것은 손수건 옆에 가지런히 놓여있던 연고였다. 터진 입술 사이로 작게 흐느낌이 새어나왔다.
10
눈을 떴을 때 나는 엎어진 자세 그대로 휴게실에 늘어져 있었다. 차고 있던 총과 전기곤봉이 없었다. 피딱지가 말라붙은 인중을 더듬거리며 일어났다. 관제부스로 향했다. 의자에 몸을 걸치고 숨을 몰아쉬면서 패드에 손을 얹었다. 접근금지가 걸렸다. 코드를 입력하라는 창을 노려보다가 주먹으로 액정을 한 번 내리치고 부스를 빠져나왔다.
D구역으로 향하는 동안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지 생각했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중위의 개인실 앞에 멈추어 섰다. 가지런하게 정리되어있었던 침실이 한바탕 거칠게 수색이라도 한 듯 뒤집혀 있었다. 엉망이 된 침대보 위에 던져진 중위의 패드가 보였다. 총에 맞은 듯 액정과 메인보드가 심하게 파손되어 형체를 알아볼 수조차 없었다. 갑자기 분노에 사로잡힌 나는 비품실에 있던 중위의 총을 기억해내고 황급히 몸을 돌렸다. 정확히는 돌리려고 했다. 뒤통수에 닿는 서늘한 촉감을 느끼자마자 그대로 멈추어 섰다. 제라스 부함장이 부드럽고 여유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엇을 찾고 있나, 대위?”
“제 무기를 전부 회수해 가셨더군요, 부함장님.”
“찾고 있는 거라면 지금 내가 겨누고 있다네.”
나는 엉망이 된 중위의 개인실을 노려보았다.
“정보도 말소하셨고요.”
“규정에 따른 행정적인 절차였지.”
“가르강튀아로 돌아가면 저는 죽게 됩니까?”
“중위로부터 들었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네는 미친 여자의 말을 믿나?”
이번에도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부함장은 혀를 찼다.
“대위. 내 입장에서 솔직하게 몇 가지는 말해주지. 이전에 중위가 취한 태도로 미루어 머리 나쁜 자네도 알아차렸겠지만, 가르강튀아에는 헌병대 말고 하나의 조직이 더 존재해. 그리고 그 조직 내에서 따로 나뉘는 특수한 계급이 있다네. 룬진 중위의 그 놀라운 태도는 거기서 비롯된 거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임무가 진행될 때까지 유효한 계급일 뿐이야. 그러니 밖으로 나오면 서로의 계급에 맞는 조직예절을 갖춰야하지 않겠나?”
의미 없는 웃음이 나왔다.
“저도 그 조직에 포함되어 있습니까?”
“대위.”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다.
“중위가 계급에 반항했다고 해서 자네까지 이런 식으로 굴면 곤란하다네.”
침묵이 흘렀다. 우리 둘 다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다음 순간 나는 몸을 숙이고 재빨리 몸을 틀었다. 부함장이 발포했지만 아슬아슬하게 귓가를 스치고 빗겨갔다. 나는 부함장의 허벅지를 있는 힘껏 걷어차고 복도로 빠져나왔다. 비틀거리던 부함장은 곧장 균형을 잡았다. 총구가 나를 겨누는 순간 그에게 덤벼들었다. 총이 바닥을 굴렀다. 그가 눈을 부릅뜨고 주먹을 내질렀다. 한 번은 빗겨갔지만 다음 주먹에 어깨를 맞았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을 때,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부함장이 올라탄 내 몸을 걷어찼다. 그는 빈틈이 생기자마자 좌측으로 굴러 내 포위망에서 빠져나갔다. 나는 습관처럼 쓰러지는 동시에 바닥을 딛고 일어났다. 부함장은 총을 줍느라 몸을 젖히고 있었다. 그에게 달려들어 부츠 굽으로 온힘을 다해 그의 왼손을 짓뭉갰다. 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가 욕지거리를 하며 오른손으로 내 관자놀이에 주먹을 날리는 바람에 황급히 몸을 떨어뜨렸다. 그와 동시에 부함장이 부들부들 떠는 왼손으로 총자루를 잡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나는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부함장이 총을 쏘았다. 내 허벅다리를 빗겨갔다. 또 한 발.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 총알이 창에 부딪쳐 튕겨져 나왔다. 부함장은 더는 총을 쏘지 않았다. 대신 추격을 시작했다. 등 뒤를 쫓는 무시무시한 속도를 느꼈다. 나는 직선으로 뻗은 복도를 내달리다 익숙한 코너가 나오자마자 방향을 틀었다. 총이 발포되었지만 기둥에 맞았다. 나는 휴게실로 뛰어들었다.
부함장은 총을 쥔 채 휴게실로 들어섰다가 내가 관제부스의 조작패드와 가깝게 서있는 것을 보고 총구를 내렸다.
“자네가 거기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 것 같나?”
나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부함장님께서 관제부스를 통째로 폭파시키고 저와 함께 죽을 각오를 하시기 전까지는.”
제라스 부함장이 총을 쥔 자신의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부츠 굽으로 사정없이 짓밟아놓은 그 왼손은 껍질이 벗겨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부러진 손톱이 중지와 약지에 매달려 덜렁거리고 있었다. 부함장은 찌푸린 얼굴로 상태를 살피다 한숨을 쉬고 동요도 없이 부러진 부분을 뜯어냈다. 그는 바닥으로 핏방울을 털어내며 고개를 들었다.
“대위, 자네도 익히 봐서 알겠지만 나는 사격 솜씨가 아주 탁월하다네.”
그가 다시 조준했다.
“여기서도 자네 머리통을 날려줄 수 있다는 소리지.”
“절 아직 처리하실 수 없는 거 압니다.”
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말씀하셨잖아요?”
“계획이 바뀌었어.”
부함장이 엄지를 움직여 장전했다.
“하극상은 군법에 따라 처형해야지.”
“지난 5년을 날리실 겁니까?”
“상관없네.”
그가 발포하는 순간 바깥으로 몸을 피했다. 다시 총이 발사되었다. 바닥을 구르며 일어나자마자 다시 반대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부함장이 연달아 총을 쏘았다. 나는 지그재그로 피하며 그에게 덤벼들었다. 총이 어깨를 빗맞고 천장을 쏘았다. 뜨거운 기운이 왼쪽 어깨에 퍼져나갔다. 나는 주먹을 달려 그의 어깨에 똑같은 고통을 돌려주었다. 뼈를 부러뜨리는 느낌이 와 닿았다. 부함장이 고통과 반사에 의해 몸을 웅크리는 순간 다시 주먹을 날렸다. 부함장은 두 대를 더 맞다 말고 내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어마어마한 아귀힘이었다. 헉 소리를 내며 몸부림치는 순간 전세가 역전됐다. 부함장이 내 몸을 뭉개고 올라타 두 손으로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얼굴로 열이 몰리는 감각이 선명했다. 컥컥거리는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다리를 미친 듯이 버둥거렸지만 그를 떨쳐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숨이 막혔다. 얼굴 전체에 쥐가 나면서 눈물이 고였다. 부함장이 헐떡이며 숨을 골랐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
그가 얼굴을 찡그렸다.
“지난 몇 달 간 당장 사지에 내보내도 군말 없이 죽을 것처럼 굴더니 왜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오나?”
얼굴이 새빨개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허리를 들썩이다 말고 몸을 축 늘어뜨렸다.
부함장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네, 살고 싶나?”
다음 순간 나는 손을 움직여 제라스 부함장의 중지 손톱을 통째로 뽑아냈다. 그가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목을 조르던 손이 느슨해지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온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다. 우측으로 굴러 빠져나오는 동시에 바닥에 놓인 그의 총을 집어 들었다. 부함장이 내 뺨을 거칠게 후려쳤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는 내 손에 들린 총을 보자마자 분노에 찬 얼굴로 자리에 멈추어 섰다. 나는 그의 머리통에 조준했다. 총구를 겨눈 채 천천히 그와 거리를 벌렸다. 목구멍에서 쓴물이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부함장이 침착하게 두 팔을 들었다.
“자네가 여기서 날 쏜다면 벌어질 두 가지 일들을 알려주지.”
제라스 부함장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우선, 지금 가르강튀아로부터 구조 명령을 받은 함선 한 대가 오고 있네. 클라이놋 행성계 소속 함선 위고, 대형 함선이지. 자네도 들어봤을 거야. 셔틀도 아니고 함선 한 대를 통째로 보냈어.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나, 대위?”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가르강튀아는 부총독 각하의 관활 하에 있는 초대형 함선이야. 단 한 대의 함선. 정말 이상하지 않나? 아칸 대제국의 부총독 각하께서 고작 함선 한 대만을 움직이고 있을 것 같냔 말일세. 정박 중인 위고에 구조명령을 내린 게 누군지 아무리 머리 나쁜 자네라도 지금쯤이면 이해했겠지. 대위, 자네가 지금 겨눈 장교는 부총독 각하 아래 유지된 특수 기밀 조직의 총 책임자고 자네의 행위는 곧 부총독 각하에 대한 배신이나 다를 것 없단 말일세. 위고가 도착하면 자네는 어떻게 될 것 같나? 이게 바로 자네가 날 쏘면 첫 번째로 벌어질 일일세.”
“부함장님을 쏘면 적어도 나불거릴 입 하나는 줄어들겠죠. 중위가 발포하고 도주하다 실패해 표류되었다고 보고하겠습니다.”
부함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코앞에서 온갖 정보가 샜는데도 자네는 변함없이 큰 그림을 그릴 줄 모르는군. 사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어. 대위, 자네의 처지를 전혀 모르겠나?”
“부함장님 처지나 걱정하시죠.”
“대위, 나와 룬진 중위는 부총독 각하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이던 장교들이라네. 좋든 싫든 우리는 오랜 시간 한 배를 탄 사이였어. 너무 오랜 시간 말이야. 쓸데없이 길었지. 그런 중위가 감히 어떻게 날 배신하겠나? 배신하는 순간 자신도 끝장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아는 처지인데 말이야.”
“하지만 배신했죠. 부함장님께서 먼저.”
“정황도 근거도 없지.”
부함장이 조소하며 나를 쳐다봤다.
“함선 위고가 도착하면 내 생존여부와 관계없이 자네는 심문실로 끌려갈 거야. 둘째로 벌어질 일이지. 위고는 가르강튀아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대형함선이고 심문이 어떤 방식으로 진행될지는 나보다 자네가 더 잘 알 테니 더 말할 필요도 없겠군.”
“부총독 각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저를 심문실에 데려갈 가치가 있는 장교라고 판단하시는군요.”
“정황과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지.”
“지난 5년 간 제국의 안위와 평화를 위해 살아왔습니다. 그것 외에 제 인생에 남은 건 아무것도 없어요. 정황과 근거는 고작 몇 번 고문한다고 만들어지는 게 아닙니다. 앤서의 데이터 아래서 우리 모두는 평등합니다. 그녀에 의해 태어난 그 ‘자랑스러운 아칸의 아이들’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들 중 누구를 이 상황에 데려다놓았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부함장님, 당신은 무슨 수를 써도 저를 흔들 수 없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제 알 바는 아닌 그 하잘 것 없는 특수 계급 딱지도 앤서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라는 사실을 특히 우리들은 결코 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정보를 몇 가지 정정해주겠네.”
부함장이 조용히 말했다.
“유감스럽지만 지난 5년 간 자네는 부총독 각하의 안위와 영광을 위해 살아왔다네. 자네가 여태껏 받아온 모든 사살 명령은 각하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거든. 범법자도 아니고 하물며 제국의 평화를 어지럽힌 자는 더더욱 아니었지.”
“제가 심문하고 제가 쏘았습니다. 제 눈으로 보고 제 귀로 듣고 제 스스로 판단했습니다.”
“자네, 사살 대상의 데이터를 직접 열람한 적은 있나? 그 비슷한 권한이라도 얻은 적 있나?”
나는 침묵했다.
“사살 이후에는?”
부함장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말했잖나. 대위, 자네는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인간이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네. 자네는 그냥 명령을 받으면 사람을 죽였지. 그게 끝이야. 그게 자네의 5년의 실체일세. 음, 내 말도 정정할 필요가 있겠군. 정황과 근거는 이미 만들어져 있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과 약간의 절차뿐이라네. 부함장님께서 곤란해지시기 전에 잘라낼 연고 없는 꼬리를 위한 절차지.”
나는 변함없이 부함장에게 총을 겨눈 채 움직이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부함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가 생겼으니 자네는 아주 운이 좋은 편이야. 룬진 중위가 죽었으니 기회를 잡게. 내가 도와주지.”
나는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 대위에게 남은 건 내 시체가 확인되는 즉시 사살되느냐, 아니면 고문 받으며 죽느냐의 차이만 있는 선택지뿐이야. 총을 내려놓게. 앞으로 모든 게 달라질 거야. 가르강튀아에 돌아가면 최고로 대접받게 해주겠네. 맞는 게 억울했나? 제외시켜주지. 이제부터 대원들은 자네를 결코 무시할 수 없게 될 거야. 쓸데없이 부하를 패고도 권위 하나 챙기지 못하는 삶에서 벗어나게 해주겠네. 약속하지.”
총을 쥔 손에서 조금씩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럼 한 가지만 대답해주십시오.”
내가 헐떡이는 호흡을 억누르며 물었다.
“지난 5년 간 저는 무고한 이들을 살해해온 겁니까?”
부함장이 나를 쳐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너무 낙심하지는 말게. 전부는 아니니까. 적어도 자네의 판단 아래서 아칸의 평화를 위해 제거된 인물이 한 사람 있잖나.”
나는 침묵했다.
“느세파 콘스탄틴 소위는 분명한 반역자였지.”
부함장이 속삭이듯 덧붙였다.
“나니아를 위하여.”
그 순간 아주 강렬하고 진실 된 감정이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상실한 척했으나 결코 상실할 수 없는 자원이었다. 그것은 끝없는 고통이었고 지난 몇 달 간 나를 괴롭혀오던 진실이었다. 총을 고쳐 쥐고 똑바로 섰다. 부함장이 눈을 가늘게 뜨고 총구를 응시하다 고개를 들었다. 나는 지금부터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깨달았고 그러자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이 몰려왔다.
“제라스 부함장.”
내 입에서 흐느끼듯 기묘한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래. 나는 오로지 내 자신의 판단에 따라 그 심문실에 자원했어. 지난 5년 간 가르강튀아에서 내 눈으로 보고 내 귀로 들어온 진실을 하나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어떤 일들까지 벌어지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야. 나는 거기 들어가면 코스챠가 죽을 걸 알고 있었어. 다른 장교에게 맡길 수 없었어. 절대 다른 사람이 건드리게 내버려둘 수 없었어. 그 애를 살리기 위해 거기 들어갔어. 오로지 그 이유 때문에 거기서 그 애를 죽도록 때렸어.”
“그리고 실패했지.”
그가 조용히 말했다.
“모든 게 끝났어, 대위.”
하지만 부함장의 그 말은 더는 나를 앗아갈 수 없었다. 그의 언어는 더는 나를 침범할 수 없었다. 그럴 틈도 없이 내 몸은 단 한 가지의 진실에서 시작된 감정으로 가득 차있었다. 그 진실을 듣기 위해 아이오워스에 갔다. 그 진실을 묻기 위해 나나스몬을 불렀다. 그 진실을 감추기 위해 어지러운 장터를 누비고 인파 속에 우리 자신을 숨겼다. 그 진실 앞에서 나는 분노와 환희를 되살렸다. 우레와 같이 쏟아져 나온 그 수많은 목소리와 장터의 소음 속에서 나나스몬이 입을 움직였다. 나의 소망으로써, 친우들의 공모로써, 그의 운으로써 만들어진 결과를 입으로 옮겼다. 그녀가 말했다.
“그 애는 살아있어.”
단지 모든 것을 잊어버린 척하고 있었을 뿐 단 한 번도 그 진실을 포기한 적 없었다. 결코 그를 제국의 권력으로 지워낼 수는 없었다. 그는 죽을 수 없었고 삭제될 수도 없었다. 그는 단지 흡수되었을 뿐 내 안에 잠재했다. 단 한 번도 콘스탄틴을 지울 수가 없었다. 생각하기를 그만두겠다고 결심했을 때조차 그는 내 이유가 되었다. 그는 내 삶에 축척된 재료였다. 그의 말투, 버릇, 다정한 행동과 표정을 되살릴 때마다, 그 기억과 이름을 사유할 때마다 나의 내부에서 비롯된 나의 가장 긍정적인 힘이었다. 결국 내가 매순간 실패했을지언정 그는 실패한 적 없었다. 그는 내 안에서 살아있었고 내가 그를 살릴 수 있게끔 떠밀었다. 그래서 나는 선택했다. 그를 살리기로 선택했고 그 선택만큼은 실패하지 않았다. 콘스탄틴은 살아남았다.
그리고 살아있었다.
“코스챠는 살아있어.”
나는 분노에 차서 말했다.
“코스챠는 죽지 않았어.”
나는 환희에 차서 말했다.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
부함장이 웃었다.
“대위, 아까의 충격으로 정신이 나갔군. 이해해주겠네.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평정을 잃는 법이지. 믿고 싶은 것을 진실이라 믿어버리고 말이야. 하지만 이제 냉정해지게. 설령 느세파 소위가 살아남았다고 해도 이 상황은 달라지지 않아. 그가 지금 당장 자네를 구하러 오겠다고 하던가? 애초에 그럴 능력이 되기는 하나? 그가 한 번이라도 그런 능력을 발휘할 위치에 있어보기는 했나?”
나는 총을 장전했다.
부함장이 고함을 쳤다.
“제기랄, 어차피 자네는 죽어. 자네의 5년은,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자네를 만들고 있는 건 바로 나야! 자네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나 하나뿐이야! 대위, 마지막으로 경고하겠네. 내게 빌어. 그럴 능력이 있는 사람을 선택하게. 살려달라고 빌어. 잘못했다고 빌어. 모든 걸 바꿔줄 테니까 당장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어!”
“그냥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안 돼.”
훌쩍이며 중얼거렸다.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해.”
나는 정원으로 걸어가는 상상을 했다.
“그래서 부함장님을 죽일 거예요.”
부함장이 두 팔을 내리고 내게 덤벼드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총을 발포했다. 총은 정확히 그의 목을 관통했다. 그의 두 다리가 무너졌다.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입은 공포로 크게 벌어진 채였다. 피가 쏟아지며 몸이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나는 새빨간 구멍을 통해 관제부스를 볼 수 있었다. 부함장의 육신이 축축한 피 웅덩이 위로 쓰러졌다. 총을 내렸다. 나는 뺨이 축축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부터였는지 나는 울고 있었다.
부함장의 시신으로 다가갔다. 그는 눈을 뜬 채였다. 더는 그 무엇도 행사하거나 휘두를 수 없는 상태로 죽어있는 그 모습을 내려다보다 말고 총을 자루에 집어넣었다. 그의 시선은 무엇도 감시할 수 없고 그의 입은 무엇도 명령할 수 없었다. 그의 영향력은 우스울 만큼 간단하게 소실되었다. 그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제라스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비틀거리며 복도로 향했다.
D구역을 걷는 동안 왼쪽 어깨의 화끈거림이 통증으로 바뀌어갔다. 어깨가 삽시간에 축축해졌다. 바닥과 벽에 단단한 총알이 박혀 있는 것을 의미 없이 시선으로 따라가다 말고 제라스의 개인실에 도착했다. 나는 그의 패드를 서랍 뒤쪽에서 찾아냈다.
내 패드와 그의 패드를 연결했다. 보안코드를 뚫고 데이터를 이전하는 동안 어깨 상태를 살폈다. 어깨 위를 가로지르며 간신히 탄환을 빗겨간 상처에 피가 고여 있었다. 더듬거리며 대충 피를 닦아낸 뒤 서랍을 뒤졌다. 출혈이 큰 응급상처 부위에 붙이는 중형 패치와 연고, 성분이 적혀있지 않은 약 몇 알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패치를 반으로 찢은 뒤 어깨에 붙였다. 동시에 패드에 불이 들어왔다. 침대에 앉아 내 패드로 옮겨온 제라스의 통신 기록을 확인했다. 가장 최근에 함선 위고와의 통신 기록이 있었다. 나는 코드로 이루어진 명령 문서를 신경질적으로 내리다 다시 맨 위로 올라왔다. 그새 통신 기록이 갱신되어 있었다. 잠시 후 나는 제라스는 죽었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AI 위고가 전 대원을 끌고 3시간 12분 뒤면 이곳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내가 눈앞의 부하를 회유하기 위해 기밀을 누설한다. 5년 동안 당사자를 제외한 모든 환경과 상황이 비밀을 숨긴 채 조형된 가짜였노라고 폭로한다. 패드에는 그의 말을 증명하는 기록이 들어있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죽지 않기 위해 이제부터는 대체 뭘 해야 할까? 제라스의 말처럼 나는 결국 마지막 발악을 하고 있는 것뿐일까? 그럴 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내 탄생과 죽음은 누군가에 의해 설계된 작은 계획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분노도 슬픔도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상황 속에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감정일 뿐인 것이다. 나는 정말로 인형에 불과했을 것이다. 나는 정말로 지푸라기만 들어있는 투명한 인형에 불과했을 것이다.
남은 탄환을 살피고 몸 상태를 점검했다.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를 걸으며 머릿속으로 동선을 짰다.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하려고 마음먹었는지 내 스스로도 이해되질 않았다. 마음 한 편으로는 여전히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 나는 위고에서 들이닥칠 모든 대원들과 맞서 싸울 생각이었다. 화가 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복수를 위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것 외에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한테 남은 선택지가 그것 말고는 떠오르지 않았다. 어쨌든 적어도 마지막 순간에는 내 자신의 의지로 행동한 것이라고 위안할 수 있겠지. 아니, 어쩌면 이것조차 누군가가 의도한 결과일지도. 상관없다.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탄환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개인실과 비품실에서 각각 제라스와 룬진 중위의 총을 찾아냈다. 휴게실로 돌아와 주저앉았다. 끝없이 흐르는 우주공간을 멍하니 응시했다. 얼마 뒤 북서쪽에서부터 행성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희뿌옇고 푸른빛이 감도는 작은 행성이었다. 궤도를 돌고 있는 정거장이 보였다. 저 멀리 대형 함선 한 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바닥을 짚은 손바닥이 축축했다. 제라스의 피 웅덩이가 여기까지 흘러온 것이다. 어느 순간 내 입이 작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고 있었다.
“살아가야지. 단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살아가야한다. 살아가야지. 단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올바르게 살아가야한다.”
11
위고는 서두르지 않았다. 워프기술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고속이동하지도 않았다. 행정 정거장에 정박해있던 위고는 표류 중인 데크 좌표를 전송받은 후에도 한참을 꾸물거리다 출발했다. 2시간 동안, 나는 휴게실에 앉아 반쯤 멍한 상태로 대형 선체가 느릿느릿 이동해 마침내 가까워지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행성 주변에 멈추어 선 하얀 점처럼 보였지만 나중에는 선체머리를 알아볼 수 있을 만큼 거리가 좁혀졌다. 도착까지 한 시간 정도 남았을 무렵에는 위고의 전체적인 생김새를 볼 수 있었다. 뱀처럼 길게 뻗은 대형 함선이었다. 몸체는 하얀색이었고 분리가 가능한 모체-탐사선형 8세대 모델이었다. 나는 부총독의 권력과 그의 입김이 작용하는 함선이 이 제국에 과연 몇 대나 될지 생각했다. 총을 너무 오래 쥐고 있어서 손가락을 조금만 움직여도 손목이 저렸다. 나는 총을 내려놓고 바닥에 웅크렸다.
그때 구체적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내가 거의 포기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저 거대한 함선에 탄 수많은 장교들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애초에 내가 싸우는 이유조차 불명확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가망도 없고 의미도 없는 싸움일 뿐이라는 생각이 점점 강해졌다.
오랜 시간 가만히 앉아있었더니 몸 구석구석이 욱신거리고 아팠다. 목, 어깨, 명치, 복부, 허벅지와 발바닥까지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입 안은 퉁퉁 부었고 침에서는 피 맛이 났다. 인중에 말라붙은 피딱지는 손으로 떼어내기 힘들만큼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팔 안쪽은 멍이 져서 온통 보라색이었다. 나는 배를 움켜쥐고 이마를 바닥에 붙였다. 고통이 극심해져서 중간에 손바닥으로 바닥을 지탱하며 엎드렸다. 눈을 감고 숫자를 세다가 어디까지 셌는지 잊어버리면 다시 1부터 돌아갔다. 훅훅 숨을 몰아쉬면서 간신히 정신을 붙잡았다. 온몸의 고통이 바늘이 되어 머릿속을 관통하는 것만 같았다. 아주 오랜 시간이,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아서 고개를 들면 불과 몇 분밖에 흐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절망스럽게 했다. 나는 싸우지 않기로 결심했다. 투항하고 치료를 받은 뒤 심문실에 끌려가던 고문을 받던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든 진통제를 놓아주고 적어도 몇 분 정도는 쉬게 해줄 테니까. 심문할 만큼의 정신머리가 돌아올 때까지는 의무실에 처박아둘 테니까. 정신이 점점 아득해졌다. 숫자를 세는 것도 숨을 규칙적으로 쉬는 것도 어느새 잊어버렸다. 나를 빨아들이는 암흑 속에 온 마음을 내맡기려던 때였다. 바닥을 흔드는 아주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반쯤 감겨있던 눈을 뜨고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순간 시야가 번쩍했다. 나는 멍한 상태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응시하다 말고 천천히 얼굴을 찌푸렸다. 새까만 우주 공간에 하얀 부스러기 같은 게 떠있었다. 충격파가 화염과 함께 원반을 그리며 사방으로 터져나갔다. 데크 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나는 눈앞을 떠다니는 거대한 부스거리가 두 동강 난 위고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위고는 이제 정확히 네 등분으로 쪼개져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폭발의 충격에 떠밀려 미약하게 진동하던 데크가 다시 원래 흘러가던 방향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멀리서도 함선 비상 상황에 우왕좌왕하는 장교들의 혼란과 공포를 느낄 수 있었다. 수천 개의 파편들이 함선을 에워싸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사고지역에 들어서자 참상이 보다 구체적으로 다가왔다. 시체들은 흰색이나 갈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우그러진 수백 개의 육신이 기묘한 평온을 유지하며 허공에 매달려 있었다. 장교와 사병들. 폭발이 계속될 때마다 시체들은 파도를 탄 것처럼 내가 탄 데크 방향으로 출렁이며 떠밀려 왔다. 그러다 서로 부딪쳐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거나 반대 방향으로 튕겨져 나오기도 했다. 폭탄은 기술부가 밀집한 엔진실을 가장 먼저 터뜨려 함선의 추진기능을 완전히 상실시킨 후 더는 움직이지 못하는 함선의 머리통을 순차적으로 터뜨렸다. 사병들이 쏟아져 나왔다. 갈색 제복이 하얀 파편들 틈에 섞여 빙글빙글 돌았다. 갑자기 전혀 다른 공간에 들어선 것만 같았다. 주변 소리가 완전히 차단되고 모든 것이 완벽히 통제된 실험실 속에 앉아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정신을 빼앗긴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젖혔다.
그때도 이랬을까. 라리사 정거장이 폭발했을 때, 살아남은 동기들 일부를 포함한 대부분의 장교들은 콘스탄틴이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폭탄 테러의 목적은 정거장 회담을 중단시키는 것이었지만 위험을 감지한 주요 인사 대부분이 사건 전날 은밀히 대피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회담은 문제없이 진행되었고, 정거장에 남았던 그의 동기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폭탄은 정거장의 기관실과 장교거주구역을 모조리 터뜨리고 마침내 손쓸 도리도 없이 수십 개의 데크를 분리시켜 정거장 궤도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제국군들은 느세파 콘스탄틴 소위를 위선자라고 말한다. 그 자신은 나니아 해방을 위해 싸웠다고 주장하지만 실상 반란군들의 말에 휩쓸려 죄 없는 제국의 노동자들과 하급 장교들을 죽였을 뿐이라고 한다. 나는 콘스탄틴에게 이끌려 폭탄이 설치되어 있지 않은 데크로 달려갔지만 동시에 그 장소에 없던 많은 장교들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데크에 고립되어 정거장 궤도를 떠도는 동안, 동기들과 함께 구조대를 기다리는 동안, 그 바깥에는 분명 지금처럼 수십 구의 시체가 파도 위에 뜬 튜브처럼 흘러 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에도 대부분 사병들이 죽었을 것이다. 대위가 중위를, 중위가 소위를, 소위가 부사관을, 부사관이 사병을 통제하듯 폭력은 위로 향하듯 하면서 결국 아래로 쏟아졌을 것이다. 밑바닥을 받치던 이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을 것이다. 가르강튀아처럼. 라리사 정거장처럼. 눈앞의 위고처럼. 아니다, 그렇게 개별적인 함선의 특성으로 분리할 수는 없다. 이것은 보편적인 진리다. 하나의 명징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나의 세계가 바로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위를 떠받들고 먹여 살릴 수십 만 개의 바닥을 필요로 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살아가기 위해, 아니 즐거운 삶을 위해, 위를, 요컨대 권력을, 부를, 명예를, 안락함과 평화를, 따뜻한 음식과 부드러운 베개, 고급 사치품과 섬세한 서비스에 대한 욕망을 돌보기 위해 마련된 거대한 가르강튀아이자 라리사 정거장이자 위고인 것이다. 필요 이상의 것을 충족하기 위해 만들어진 힘의 세계인 것이다. 권력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제국인 것이다. 나의 아칸, 나의 제국, 아름다운 계절감이 흐르는 아이오워스의 평온함 이면에 감추어진 민낯인 것이다!
저 시신들은 무엇을 위해 죽었나? 저들은 무엇 때문에 위고에 있었지? 저들이 위고에 타야 한다고 명령을 내린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나? 그 명령으로부터 무엇을 얻어 생활하고 있나? 제국의 시민들이 아름다운 파란빛 원피스와 화려한 꽃무늬 셔츠를 입고 돌아다니는 동안 저 사병들은 무엇을 위해 싸웠단 말인가? 위고는 어느 나니아를 주둔하는 함선이었지? 그 나니아는? 그 나니아에서 살던 이들은 어떤 옷을 입고 무엇을 먹고 어디에서 자고 있지? 싸워서 이기고 지배하여 제공한 달콤한 디저트와 아름다운 식기, 유려한 찻잔과 단단한 구두를 누리며 살아가는 이들은 평화를 어떤 식으로 발음하는가? 그 반대의 삶은? 나의 평화는 어디에 있는가. 그들의 평화는 어디에 있는가. 저들의 평화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 모두의 평화는 어디에 있는가.
나는 시신들을 보았다. 팔과 다리가 등을 향해 젖혀진 채 죽어있었다. 그것들은 비틀리고 우그러져 기형적으로 꺾인 손바닥과 발바닥을 등 뒤로 젖히고 있었다. 드문드문 흰 제복을 입은 그것들은 징벌을 위해 강림한 천사 무리처럼 보였다. 그것들은 녹아내린 섬유와 엉겨 붙은 새빨간 생살, 부러진 뼈에 빨래처럼 늘어진 얇은 피부, 탁한 우윳빛 눈물을 흘리며 위를 향해 고개를 쳐든 수백 명의 천사들이었다. 하얀 새처럼 부유하고 있었다. 폭력적으로 뒤엉켜 붙은 응집체였다. 그것은 새로운 존재였다. 완전히 새로운 존재였다. 어디선가 찢어질듯 삑삑거리는 날카로운 경고음이 들려왔다. 시신 한 구가 외벽에 부딪쳤다 퉁 소리를 내며 튕겨져 오른 건 그때였다. 마치 신호탄처럼, 마침내 내가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처럼, 기다렸다는 듯 그곳에 있던 수백 구의 시신이 일제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머리를 감싸 쥐고 입을 벌렸다. 헐떡이며 뒤로 천천히 물러났지만 축축한 제라스의 피 웅덩이를 밟고 멈추어 섰다. 그때 창가 아래쪽에서 콩콩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다 말고 누군가 창가를 두들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내 눈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바로 룬진 중위였다! 우주복을 입고, 추진 버튼을 누른 채 신경질적으로 나를 노려보며 창가를 두들기고 있었다. 아까 데크에 부딪쳐 퉁겨져 오른 사람은 바로 룬진 중위였던 것이다. 그녀는 기적적으로 죽지 않고 우주복에 내장된 추진기를 이용해 이곳까지 날아온 것이다. 중위가 손가락으로 내 등 뒤를, 제라스 부함장의 시신을 보며 비웃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더니 손가락을 움직여 나를 가리키고 엄지손가락을 펼쳤다.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 상황이 말도 안 되게 웃겼다. 중위가 내게 손짓을 하며 안에 들여보내달라는 사인을 보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관제부스로 달려가는 동안 중위는 계속해서 창을 두드리며 내게 어떤 사인을 보냈지만 당장이 급했으므로 부스에 들어서자마자 패드를 작동시켰다. 암호가 걸려 패드 조작기능이 전부 잠겨 있었다. 접근금지 화면에 중력조절장치 오류 메시지 수십 개가 떠있었다. 의아해진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이렇게나 수십 번 오류가 발생했는데도 왜 경고음이 제대로 울리지 않은 거지? 그러나 관제부스 기능이 고장 난 게 아니었다. 패드는 아까부터 줄곧 삑삑거리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날카로운 삑삑 소리가 귀청을 뚫고 휴게실 전체에 울려 펴졌다. 나는 다급하게 룬진 중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중위는 거기 없었다. 아니, 아까보다 아래쪽으로 미끄러진 채 늘어져있었다. 나는 부스에서 뛰쳐나와 미친 듯이 창가 앞으로 내달렸다. 거세게 얼굴을 박았다. 두 손바닥을 펼치고 중위 맞은편에 몸을 바싹 붙였다. 중위의 이름을 부르며 창을 두들겼다. 무언가 이상했다. 우주복인 줄 알았던 것은 잔뜩 부풀어 오른 장교복이었다. 불현듯 나는 중위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녀는 얼굴 전체가 찢어져 피가 흐르다 말고 갈색으로 쪼그라들어 있었다. 눈은 가늘게 찢어졌고 입술은 보랏빛으로 퉁퉁 부어올라 있었다. 황급히 손을 떼어내고 뒷걸음질 쳤다. 이 사람은 대체 누구지? 룬진 중위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 중위가 아니었다. 그녀는 애초부터 여기 없었다. 이것은 위고의 이름 모를 장교였다.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것은 오래 전에 죽은 시체였다!
주변이 갑자기 놀랄 만큼 조용해졌다. 관제부스에서부터 지독하게 울리던 중력장치 경고음이 멈춘 것이다. 내 숨소리가 지나치게 잘 들렸다. 웅웅거리는 작은 소음조차 없었다. 이 순간 이곳은 완벽한 진공상태였다. 나는 멍하니 내 머리 위에 매달린 수백 구의 시신들과 눈을 마주쳤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이 나를 쳐다보고 나 역시 그들을 쳐다봤다. 다음 순간, 중력장치가 안정되었다는 경쾌한 패드 알림음과 함께 시스템 동작음이 울려 퍼졌다. 갑자기 데크 전체가 덜컹거리며 진동했다. 중력 막이 씌워지면서 반경 500m 안에서 부유하던 수십 만 개의 파편이 비처럼 두두두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왔다. 수백 구의 시신이 일제히 나를 향해 떨어졌다.
철퍽.
이명이 닥쳐왔다. 수백 개의 얼굴이 창가에 짓눌린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나에게 질문하고 있었다. 도무지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복도를, 계단을, 브릿지를, 엔진실을 활보하다 말고 닥쳐온 죽음 앞에서 멈추어 선 그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내 곁에 있었다. 응시하고 있었다. 감시하고 있었다. 발견하고 있었다. 나를. 내 몸과 마음을. 나의 자아를. 나의 투명한 세계를. 파헤치고 마침내 남김없이 알아차린 것 같았다. 내 정체를 벗겨낸 것 같았다. 내 이름은 그곳에 없었다. 나를 보호해줄 나를 이루는 내가 정의한 그 무엇도 내게는 없었다. 5년 동안 속아왔고 콘스탄틴을 잃었고 마침내는 나를 정의해줄 가장 형편없는 남자마저 내 손으로 죽여 버렸으므로. 내 이름은 파괴된 지 오래였으므로. 인형이었으므로. 사람도 시체도 아니었으므로. 사유한다고 믿었지만 빈 껍질이었다. 누군가들의 의지에 몸을 떠맡겼고 그것이 진짜 내 의지인줄 알고 충실했다. 그 믿음 아래서 죽였다. 이들을 죽였다. 남김없이 죽였다. 나는 레안드로스를 보았다. 시신들 틈에서 죽어있는 그의 퉁퉁 부어오른 얼굴을 보았다. 다른 얼굴들도 보았다. 심문실에서 마주했던 수많은 얼굴들이 응집되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나는 내가 입을 벌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언제부터였는지 입을 벌리고 뭔가 외치고 있었다. 나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아, 부함장님!! 부함장님!! 부함장님!! 부함장님!! 부함장님!!”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휴게실을 빠져나와 복도를 정신없이 내달렸다. 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사물이 움직이고 풍경이 흐물거리며 무너져 내렸다. 나는 축축한 흙냄새를 맡았다. 어두컴컴한 천장을 볼 수 있었다. 한밤의 라리사 정원 위에 뜬 달빛이 나를 비추며 떨어졌다. 정신없이 화단을 헤치고 나아가던 나는 벽에 부딪쳐 바닥을 굴렀다. 벌떡 일어나 다시 달렸다. 이제 어디선가 무도회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에오르 우주 정거장에서 풀벌레들이 울었다. 일직선으로 뻗은 복도에 몸을 부딪칠 때마다 풍경이 뒤바뀌었다. 인공광원이 내 머리 위를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천장을 보며 미친 듯이 달렸다. 프웨이 정원이 무너져 내리더니 곧이어 시냇물이 나타났다. 발밑을 축축하게 적시며 어딘가로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ACOTS의 벤치가 곳곳에서 나를 향해 몸을 벌렸다. 벽에 부딪쳤다. 습윤한 공기가 들이닥치더니 넓은 그림자가 나를 에워쌌다. 나는 무릎으로 기어 잎사귀 아래로 다가갔다. 그러자 마침내 그곳에 있었다. 아주 작은 모습으로. 코스챠가 패드를 내밀며 말했다.
“기다렸어. 또 늦었구나!”
나는 그 애의 손을 붙잡고 무릎을 꿇었다. 나는 코스챠에게 그때처럼 안전한 곳으로 나를 데려가 달라고 말했다. 나를 구해달라고 말했다. 여기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말했다. 살려달라고 말했다.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해달라고 애원했다. 나를 버리지 말라고 빌었다. 제발 나를 남겨놓지 말라고 울면서 매달렸다. 코스챠의 작은 손에 매달리며 몸을 기울이는 순간 그 애가 거칠게 나를 밀쳐내더니 돌연 내 손을 아플 정도로 세게 붙잡아 쥐었다. 겁에 질린 나는 뒤로 물러나다 말고 다리를 버둥거리며 비명을 질렀다. 콘스탄틴은 보라색 베일 속에서 그 본모습을 드러냈다. 노파는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호통을 쳤다.
“어떻게 그런 걸 기대할 수 있단 말입니까?”
두 눈을 번뜩이며 되물었다.
“기대하십니까?”
몸부림을 치며 노파를 뿌리치자마자 벌떡 일어나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미친 듯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동안 쉼 없이 부딪치고 바닥을 구르고 다시 일어났다. 복도는 일직선으로 혹은 직각으로밖에 뻗어있지 않아 어디를 달려 나가도 똑같은 풍경이었고 어디를 달려 나가도 같은 곳을 빙빙 돌았다. 내 인생처럼 그것은 쭉 뻗어있었고 어디로도 달아날 수 없었다. 정신없이 달리던 나는 거세게 얼굴을 부딪쳐 바닥에 뒤로 넘어졌다. 쓰러진 채 고개를 젖히자 휴게실의 천장이 보였다. 나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수백 구의 시체는 서로 엉겨 붙은 채 데크 외벽에 달라붙어 있었다. 바깥 풍경이 보이질 않았다. 짓눌린 수많은 얼굴과 텅 빈 눈동자를 마주한 채로 눈을 깜빡이자 금세 뺨이 축축해졌다. 레안드로스도, 내가 죽인 그 얼굴들도 보이지 않았다. 위고의 장교들은 그냥 거기 죽은 채 늘어져 있었다. 나는 흐느끼듯 울었다. 나를 관통한 수십 개의 생각이 파편화되어 빙글빙글 떠돌다 마침내 내 머릿속에 하나의 형태로 자리 잡은 것을 느꼈다. 나는 하나도 잊지 않았다. 잊어버린 척하고 있지만 결코 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른 척했지만 결코 무지하지 않았다. 나는 헤로 대위를 통해 어째서 콘스탄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불행에 맞서 싸우고,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앞에서도 흔들림 없이 자신을 지켜낼 힘을 발휘한 두 사람은 닮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보여 지기를 원하는 바로 그 모습대로 그곳에 존재하게끔 만드는 사유의 힘을 어떤 사람들은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가져야만 했던 힘이었다. 그때, 죽어가는 레안드로스의 곁을 지키던 헤로 대위를 보며, 나는 콘스탄틴의 어떤 순간들을 떠올렸다. 심문실에 앉아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던 그를, 상냥한 말투로 작별을 고했던 그를, 삶의 답을 찾았다고 말하던 그를. 나를 밀쳐놓고 외롭게 만들던 모든 순간의 콘스탄틴을 떠올렸다. 내가 엉망으로 우리의 관계를 망쳐놓은 순간에조차, 피 묻은 곤봉을 쥔 채 내려다보는 내 시선을 마주할 때조차 오로지 그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존재했던 그 애를.
이제 고백해야겠다. 그 순간마다 콘스탄틴이 가진 이름의 힘을 느꼈다. 그 순간마다 그 애가 존엄해보였다. 그래서 결국 나는 의무실에 누운 콘스탄틴을 찾아갔었다. 사과하려고 했다. 용서를 구하려고… 그러니까 나는 결국 그때 그 애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미안해.
네 존엄성을 훼손해서 미안해. 네 모든 걸 망쳐버려서 미안해. 널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고 그 형태 없는 힘에 나의 손과 나의 발과 나의 입을 빌려준 내 어리석음을 용서해줘. 이제 모든 게 끝나버렸구나. 미안하다는 말조차 네 것이 되었구나.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으니 앞으로 어떡하면 좋을까.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불타는 열대우림에서, 노동하는 엔진실 부사관들에서, 죽은 시체들 틈에서, 무너지는 나니아 행성의 건물들 사이에서, 얼어붙은 스카디의 절벽에서, 반란군들이 치켜든 횃불에서, 흩날리는 흙먼지 속에서 빛나는 나흐트의 도시에서부터 솟구쳐 올라 이곳으로 쏜살같이 날아왔다. 그 깨달음으로 우주 전역에 흩뿌려진 수만 개의 함선들을, 제국의 손과 발과 입과 시선을 보았다. 그것들은 함선들을 깨부수며 둥그렇게 펴져나가는 충격파처럼 궤도를 가지고 있었다. 둥그렇게 돌고 있었고 시작도 끝도 없었다. 그러므로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 속에 편입되어야만 했다. 콘스탄틴 역시 그곳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로 했고 나 역시 그를 살리기 위해 필요로 했던 것이며 기대야 했던 굴레였다. 제국도 나니아도 가지고 있는, 아니 그 무엇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별개의 세계조차 가지고 있을 가장 기본적인 성질이었다. 나는 우주의 가장 밑바닥을 이루는 질서를 마주했다. 우주의 한 형태가 압축되어 내 몸으로 흘러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이제 나는 폭력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굴레를 볼 수 있었다. 내 안의 정의가 궤도를 이루며 돌고 있는 것을 보았다. 행성과 함선들을 보았다. 태양과 달과 위성들을 보았다. 장교들의 목소리와 시민들의 노랫소리와 나니아민들의 중얼거림이 있었고 가장 고귀한 음식과 부드러운 손수건과 깨끗한 물과 바람이 있었다. 초목이 자라는 정원들과 평온 속에서 눈감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의 우주였다. 정의의 궤도였다. 나는 깨달았다. 지금이라면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아주 간단했다. 온 우주를 내 안으로 압축한 지금이라면, 이 진리를 획득한 지금이라면 벗어날 수 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벼락처럼 내 몸을 뚫고 환희가 솟구쳐 올랐다.
죽자! 나 자신의 의지로! 지금 당장 죽어서 나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이 우주를 통째로 없애버리고 이 굴레를 끊어 버릴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방법은 바로 지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다. 폭력의 굴레가 내 안으로 흡수된 지금이야말로 이 모든 걸 끊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때다. 내게 주어진 마지막 절호의 기회다! 아아, 지금 죽어버리는 일이야말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올바른 선택이다. 유일한 희망인 것이다!
나는 지금 당장 목숨을 끊어버리기로 결심했다. 해방감으로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허리에 찬 총을 꺼냈다. 기쁨으로 손가락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침착하게 총을 쥐고 장전을 했다. 총구를 관자놀이에 댔다. 엄숙하게 천장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안녕! 안녕, 모두들! 창가에서 몸을 떼어낸 시신들이 나의 선택을 축복하며 박수갈채를 쏟아냈다. 그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이 모든 연극이 마침내 나로 인해 막을 내렸다는 것처럼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런 뒤 공중으로 고개를 쳐들고 날개를 펼쳤다.
눈부시고 아름답게 날아갔다. 하얀 새처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하얀 새들처럼 시신들이 높이 솟구쳐 올랐다. 나는 눈을 감았다. 방아쇠를 당기려는 그때, 삑삑거리는 소음이 들이닥쳤다. 다음 순간 데크가 크게 출렁이며 왼쪽으로 기울었다. 총성이 울렸다. 탄환은 내 머리를 스치고 그대로 날아가 벽에 박혔다. 나는 바닥으로 넘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벽에 등을 부딪치는 순간 비명이 절로 나왔다. 고통 때문에 몸을 웅크리고 눈을 꽉 감았다.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데크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제자리를 찾는 동안 얌전히 누워있었다. 잠시 후 진동이 멈췄다. 나는 조심스럽게 몸에 힘을 풀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바깥 풍경이 깨끗했다. 시야를 가득 메우던 시신들이 없었다. 이제 보이는 것은 광활한 우주와 하얀 파편 찌꺼기들 너머로 보이는 푸르고 둥근 행성뿐이었다. 관제부스로부터 시스템 오류를 알리는 경고음이 쏟아지고 있었다. 중력조절장치가 다시 오류를 일으킨 것이다. 중력이 사라지는 바람에 외벽에서 떨어져 나온 시신들이 데크 주변을 천천히 돌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멍하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리가 부러진 채 뒤집힌 소파, 쏟아진 화분들, 구석에 처박혀 고개를 숙이고 죽어있는 중년 남성의 시체 한 구. 내 손 끝에 방아쇠가 걸려있었다. 총은 탄환과 몸체가 분리되어 바닥에 눕혀져 있었다.
모든 풍경이 나의 현실로써 재구성될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마침내 정신을 차린 나는 총을 저 멀리 집어던지고 관제부스로 기어갔다. 의자를 붙잡고 힘겹게 기어올라 패드를 확인했다. 오류가 지속된 까닭인지 시스템 보안코드가 삭제되어 있었다. 손으로 화면을 밀어 넘겼다. 데크에 남은 연료와 외벽 손상 정도가 수치화 되어 나타났다. 나는 추진기능을 점검하면서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다. 뒤죽박죽으로 솟구쳐 올랐던 사고가 한 줄씩 접혀 머릿속으로 말려들어갔다. 비약적인 사고 속에서 환희에 차올랐던 몸이 납덩이처럼 점차 무거워지고 고통과 절망이 되돌아왔다.
방금 무슨 짓을 저지르려고 한 것일까. 그러나 마음 한 구석에는 여전히 두근거림이 남아있었다. 데크 추진 기능에 이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나는 관제부스 너머로 보이는 푸르스름한 행성의 좌표를 눈대중으로 어림잡아 판단한 뒤 수치를 입력하고 바깥으로 기어 나왔다. 바닥에서 덜덜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데크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소파가 묵직한 소리와 함께 내 쪽으로 미끄러졌다. 올바른 방향을 잡을 때까지 주변의 사물을 마구잡이로 밀어내던 데크는 잠시 후 추진하며 파편과 시체더미들을 헤치고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허우적거리며 몸을 일으킨 뒤 총을 자루에 집어놓고 제라스의 시신을 뒤져 곤봉을 챙겼다.
복도는 더는 환상의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더는 나를 위협할 수 없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행성을 보며 비품실로 내달렸다. 이제 보니 행성은 전혀 푸르스름하지 않고 자갈색과 적갈색으로 뒤덮여 있었다. 주변을 감싼 대기층이 푸르스름해서 그렇게 보인 것뿐이었다. 나는 비품실에 쌓인 통조림과 식수를 정신없이 바깥으로 치워내고 마침내 원하는 버튼을 찾았다. 비상 탈출용 캡슐이었다. 시간이 얼마 없었지만 동시에 타이밍이 중요했다. 나는 훅훅 숨을 몰아쉬며 복도 창으로 흐르는 풍경을 주시했다. 행성의 중력에 걸려든 데크가 천천히 우현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발이 점점 붕 뜨는 것을 느꼈다. 몸이 기울어지며 발이 미끄러졌다. 나는 캡슐을 열고 그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입구를 닫고 눈을 감았다. 속으로 40초를 셌다. 캡슐 바깥에서 통조림들이 서로 부딪치며 복도를 쏜살같이 내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30초. 벽 너머에서 벌어지는 개인실의 소란을 어렴풋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도미노처럼 침대와 서랍이 쓰러졌다. 20초. 캡슐 위로 비품실 물건들이 쏟아졌다. 몸이 위로 뒤집혀지면서 정수리로 체중이 쏠렸다. 10초. 데크 바닥이 미친 듯이 덜덜거리는 바람에 위 아래로 턱이 딱딱 부딪쳤다. 눈을 질끈 감은 채 마지막 숫자를 세고 캡슐 버튼을 눌렀다.
캡슐이 데크 바깥으로 발사되었다. 그 순간 시야가 넓어지고 빛이 쏟아졌다. 모든 진동과 소음으로부터 나는 자유로워졌다. 있는 힘껏 던져진 공처럼 캡슐은 잠시 붕 떠있었다. 흰색으로 물들었다가 서서히 주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보인 건 광활한 대지였다. 발 아래로 추락하는 데크가 보였다. 불이 붙은 채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나온 아이보리색 외벽이 캡슐을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떨어지기 직전 나는 지평선 너머로 펼쳐진 거대한 협곡을 보았다.
무게 중심이 아래로 이동했다. 추락과 동시에 압력이 내 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착륙 버튼을 누르고 발로 캡슐 내부를 지지하며 자세를 바꾸어보려고 애썼다. 고통 때문에 자꾸만 몸이 움츠러들었다. 낙하산이 제대로 펼쳐진 것 같지 않았다. 속도가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없었다. 가속도가 붙은 캡슐이 거대한 탄환마냥 무시무시한 소리를 냈다. 진동이 극심해졌다. 누군가 내 캡슐을 쥐고 마구잡이로 흔들고 있는 것 같았다. 턱이 딱딱거리며 부딪치고 시야가 다시 하얗게 물들었다. 나는 이제 추락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가능성을 점치기를 포기했다. 그러자 몸에서 천천히 힘이 빠져나갔다.
정신을 잃기 전에 나는 환상을 보았다. 마지막으로 보는 환상임을 알았다. 나는 처음 보는 정원에 서있었는데, 혼자였다. 아름다운 초목과 잘 가꾸어진 화단을 응시하다 말고 그곳에서 걸어 나왔다. 문을 닫고 걸쇠를 걸어 잠갔다. 그러자 아무도 더는 그곳을 침범할 수가 없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