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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처음에는 어렴풋한 소근거림에 불과했다. 그러다 점점 모든 게 뚜렷해지면서 등을 받친 딱딱한 표면과 건조한 바람, 공간을 감싼 축축한 냄새를 느낄 수 있었다. 목소리들도 한결 가까워졌다. 낮은 목소리가 둘, 높은 목소리가 하나였다. 귀를 기울이며 팔을 움직여보려다 큰 충격을 받았다. 몸이 말도 안 되게 무거웠다. 심지어 다리 한 쪽에 감각이 없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일정한 힘을 어깨로 분배하는 상상을 하며 침착하게 왼쪽 팔을 들어 올려보려고 했다. 그 순간 날카로운 통증이 벼락처럼 어깨를 강타하는 바람에 절로 입이 벌어지고 신음이 새어나왔다.

  소곤거리던 이들이 말을 멈췄다. 나는 무의식중에 뒤척이다 신음한 것처럼 눈을 감은 채 얌전히 누워있었다. 누군가 다가와 내 곁에 앉았는지 가까운 인기척이 느껴졌다. 잠시 후 어떤 차가운 감촉이 내 얼굴 위를 훑어 내렸다. 단 한 번도 그런 종류의 차갑고 부드러운 표면을 경험해본 적 없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옆자리의 누군가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머리가 터질 듯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 행성의 주민일까? 토착민? 아니면 이주민? 미끈한 손가락이 인중을 신중하게 건드리고 지나갈 때, 나는 참지 못하고 속눈썹을 움찔거리고 말았다. 손가락이 인중에서 떨어지더니 한동안 침묵이 있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곧이어 손바닥이 내 몸을 짓눌렀다. 일반적인 인간보다 손바닥 면적이 반 뼘쯤 컸다. 제복을 뚫고 낯설고 차가운 체온이 느껴졌다. 낮은 목소리로 누군가 동료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들은 높거나 낮은 목소리로 몇 마디를 짧게 주고받았다. 전혀 모르는 언어였다. 언제라도 공격이 날아올 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온몸을 긴장시킨 채 잔뜩 곤두서있었다. 잠시 후 여러 명이 우르르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주변이 완벽히 조용해졌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와 내 앞머리를 흔들었다.

  한참 뒤 그가 공용어로 말했다.

  “깬 거 알아.”

  나는 대답 없이 누워있었다.

  “안 일어날 거야?”

  “…….”

  “우리는 네 처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어.”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었다. 나는 감각을 곤두세웠다. 멀지 않은 곳에 바깥과 연결된 출구가 있었다.

  “계속 그렇게 자는 척을 할 거라면 말리지 않을게. 하지만 다시 그들이 오면 뭐라도 말해놓는 편이 좋을 거야. 올로즈비와 쿠르셀은 널 죽이자고 해.”

  나는 시험 삼아 오른쪽 손가락을 움직여보았다.

  “음, 날 공격하려고? 지금 네 몸이 어떤 상태인지 전혀 모르는구나. 넌 아주 만신창이야. 제대로 일어나기는커녕 총구에 손가락 하나 걸기도 힘들 걸. 네 몸 상태를… 공용어로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자세한 건 외젠이 돌아오면 알게 되겠지.”

  그가 뭐라고 떠드는 동안 나는 점점 감각을 되찾았다. 자잘한 고통과 생리적인 찝찝함이 점차 형상을 갖추고 내 몸의 부위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한기가 느껴졌다. 제복 군데군데가 축축하게 젖어있었고 허벅지와 허리가 끔찍하게 아팠다.

  “나는 네가 탈영한 제국군일 거라고 생각해. 대체로 너처럼 걸레짝이 되어서 오거든. 떨어진 데크에서 네… 동료로 보이는 시체를 발견했어. 직접 쏴죽였더군. 우리가 널 바로 죽이지 않은 이유는 그것 때문이야.”

  내가 계속해서 대답이 없자 그는 몇 가지 이야기를 조금 더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러더니 공용어가 아닌 알 수 없는 부드럽고 가벼운 발음으로 어떤 단어를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몸을 짓누르던 손바닥이 떨어져나가고 호흡이 한결 가벼워졌다 싶었을 때 갑자기 아래쪽에서 철컥 소리가 났다. 그가 내 오른쪽 발을 어딘가에 묶어놓은 것이다.

  “이렇게라도 안 해놓으면 올로가 잔소리를 할 거거든.”

  발소리가 공간을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한순간 빛이 쏟아지던 방은 순식간에 다시 어두워졌다. 주변이 완벽히 조용해졌다는 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좌측 벽 안쪽에 비스듬하게 세워진 파란 색깔의 둥근 접시들이었다. 그 다음으로 들어온 건 그 찬장의 구조였다. 벽을 파내어 공간을 만든 뒤 판판한 나무 같은 것을 얼기설기 짜 맞추어 만들어놓은 것이었는데 이러한 양식의 가옥을 사용하는 종족들은 당장 떠오르는 것만 이 우주에 어림잡아 쉰 종정도가 떠올랐다. 7할은 쿠르나 행성계에 분포하고 2할은 클라이놋 행성계에, 나머지 1할은 에오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행성에서 살고 있었다. 나는 가르강튀아의 마지막 좌표를 떠올리면서 표류되었던 기간을 계산해보았다. 제국 수도의 영향권에 드는 곳은 아닌 것 같았다.

  패드도 없고 번역기도 잃어버린 현재로서는 공용어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공용어로 이루어지지 않은 대화는 모조리 이해하지 못했다. 아까는 단어 하나조차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생도시절에 비슷한 상황을 상상하거나 심지어 모의훈련 중에 대처해본 적도 있었지만 막상 현실이 되니 겁이 났다. 몸은 점점 아파오는데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곳을 나간 후 어떡하면 좋을지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수행할 뚜렷한 목표가 없다는 사실이 나를 소심하게 만들었다.

  이 행성은 주민들과 간단한 의사소통을 주고받기 힘들 만큼 언어와 언어 사이의 연결고리가 멀리 떨어진 곳인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아칸의 공용어를 학습한 나니아 행성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큰 위안을 주는 사실은 아니었다.

  빠르게 눈을 굴려 샅샅이 주변을 훑어보았다. 천장이 낮고 창문이 컸으며, 방은 세 개쯤 나있었다. 방마다 화려한 천들이 입구를 가리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단단하고 폐쇄적인 문은 이 집에 존재하지 않았다. 출입구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기억해둘만한 특징으로써 출입구만 하얀색 천으로 가려져있었다. 슬슬 내가 속한 행성계가 어딘지 짐작할 수 있었다. 특정할 수 있는 문화범위가 좁아지자 이곳도 전령소나 사령본부가 아닌 평범한 일반 가정집처럼 느껴졌다. 식탁과 의자가 많이 놓여있기는 했지만 먹다 남은 음식이나 컵 같은 게 놓여있어서 작은 만찬이 벌어졌다가 갑작스러운 일로 사람들이 식사 중에 급히 자리를 비운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그들은 내 생사를 두고 의논하고 있었을 것이다. 긴장이 풀어지다 말고 다시 온몸이 빳빳해졌다.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나는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몸이 걸레짝만도 못했던 것이다. 여러 번 구르고 깨지고 다쳐봤지만 몸을 이렇게까지 통제할 수 없는 건 처음이었다. 달랑 오른발만 구속된 채 감시인원도 없이 이곳에 방치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상태에서 얼마나 움직일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한참을 끙끙거리던 나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우고 숨을 골랐다. 고통 때문에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있었다. 어깨, 허리, 허벅지와 사타구니, 발목이 욱신거리고 아팠다. 부위마다 통증으로 만들어진 작은 심장이 힘차게 뛰고 있는 것 같았다. 족쇄를 걷어차기 시작했을 때는 결국 눈물이 나왔다. 훌쩍이며 온 힘을 다해 여섯 번 정도 걷어차자, 족쇄는 결국 수명을 다하고 나를 놓아주었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밖으로 나오자 뜨겁고 날카로운 햇볕이 쏟아졌다. 얼굴을 찡그리고 주변을 정신없이 둘러보았다. 빛이 충분히 눈에 익을 때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곧이어 눈이 시릴 정도로 새파란 하늘과, 그에 대비적인 새빨간 지평선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경미한 오르막을 따라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었고, 아득한 곳까지 지평선이 펼쳐졌다. 하늘 위에는 거대한 제국 함선이 떠있었지만, 따로 어떤 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오고가는 수송선이나 정찰선 같은 게 없었기 때문이다. 함선의 이름을 파악할 수 있을까 싶어 열심히 관찰했지만 너무 멀리 있어 특별한 소득이 없었다. 단지 최신형 함선이 아니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시민들도 보이지 않았다. 드문드문 들어선 집집마다 인기척이 느껴질 법도 한데 놀랄 만치 조용했다. 처음에 나는 이곳이 버려진 마을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다리를 절뚝이며 힘겹게 걷는 동안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민들은 멀쩡히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다만 지금 낮잠을 자고 있는 것뿐이었다. 창문 옆을 지나갈 때,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잠든 어린 토착민을 보았다. 몸집이 나의 절반이었고,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힘껏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경미한 오르막길을 오르고 또 올랐다. 시민들이 돌아다니지 않아서 그런지 오히려 마음이 조급해졌다. 최대한 조용히 빠져나가서 제국군에 연락을 취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제국군에게 연락을 취한 그 다음에는 뭘 어떻게 하려고? 넌 상관을 죽였잖아. 제국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했잖아. 그리고 그건 거의 진실이야.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체감되지 않았다. 나는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절뚝거리는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숨소리가 가빠지면서 머리가 멍해졌다. 그때 내가 도망쳐 나온 그 집에서 누군가 달려 나오는 게 보였다. 그녀는 다소 얼이 빠진 얼굴이다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얼굴을 찡그렸다.

  어디서 그런 초인적인 힘이 발휘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곧장 그녀를 등지고 반대편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한순간 발목의 고통과 허벅지의 욱신거림이 씻은 듯 사라지는 것 같았다. 등 뒤에서 고함을 치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나는 어디로 뛰는지도 모르고 달리고 또 달렸다. 뜨거운 볕 때문에 목이 타는 듯했다. 정신없이 보이는 대로 달렸고, 길이 끊어진 후에는 전적으로 몸이 이끄는 방향을 따랐다. 얼마나 달렸을까, 갑자기 길이며 땅이 뚝 끊어지더니 낭떠러지가 나타났다. 나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멈추어 섰다. 모래먼지가 일면서 시야가 뿌옇게 변했다. 누군가 작게 기침을 하는 바람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나는 다소 멍청한 얼굴로 내 옆에 앉은 여자애를 내려다보았다. 여자아이는 흙장난을 치던 중이었고-이렇게 말한 건 그 애 손에 흙이 묻어있었기 때문이다-내 등장에 무척이나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그러다 피로 얼룩진 내 제복을 알아보고 소스라치게 놀란 얼굴로 발딱 일어났다. 겁먹은 아이를 달래려고 다급하게 단어를 웅얼거렸지만, 반사적으로 내뱉은 제국어 때문에 아이의 경계심을 부추기는 꼴이 되고 말았다. 등 뒤에서 고함을 지르는 소리, 발소리들이 가까워졌다. 주민들이 나를 찾고 있었다. 나는 낭떠러지와 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설치된 간이 엘리베이터가 눈에 들어왔다. 아래로 내려갈 수 있도록 도드래와 밧줄을 이용해 철 구조물을 공중에 매달아놓은 것이었는데, 낭떠러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단단한 철심을 박아 기계 전체를 지지하고 있었다. 아치형으로 둥글게 만들어놓은 천장 때문에 엘리베이터는 꼭 거대한 새장처럼 보였다. 올로! 올로! 누군가 언덕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곧이어 무장한 주민들이 언덕 저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주민들이 낭떠러지를 둥글게 포위하고 점점 거리를 좁혀왔다. 나는 잔뜩 겁먹은 아이를 지나쳐 엘리베이터로 뛰어들었다. 밧줄 몇 개로 위태롭게 매달려 있던 엘리베이터는 내 무게와 반동 때문에 추처럼 좌우로 흔들거렸다. 흥분한 주민들이 고함을 치며 토착어로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그들은 이제 엘리베이터를 지지하는 철심에서 불과 100m밖에 떨어져있지 않았다. 나는 조작할 버튼이나 수동손잡이 따위를 찾아 눈을 굴렸지만 정작 엘리베이터 내부에는 아무것도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오로지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사용하는 일종의 화물운송 장치에 불과했다. 이제 나는 까마득한 협곡 아래로 추락하기 일보직전인 거대한 새장 속에 들어가 있는 셈이었다. 뒤늦게 철심 옆에 설치된 도르래 조작 장치가 눈에 들어왔다. 손을 뻗어도 닫지 않는 거리였으므로 나는 총을 꺼내들었다. 여차하면 주민들을 모조리 쏠 생각이었다. 아니면 조작 장치를 폭발시켜 시간을 벌거나.

  돌이켜보면 그것은 너무나 극단적인 생각이었고 어느 쪽이든 살아남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수세에 몰리게 되면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주민들은 내가 무장한 것을 보고 덩달아 총을 들었다. 대부분이 긴 장총이었고, 몇몇은 석궁 비슷한 것을 들고 있었다. 낡고 오래된 무기였지만 장전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주민들이 철심 바로 앞까지 거리를 좁혔을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 포위망 속으로 뛰어들었다. 주민들도 예측하지 못했던 인물이었다. 손에 흙을 묻힌 여자아이는 겁에 질려 꼼짝 못했던 아까와는 전혀 다른 행동을 했다. 조작 장치에 어떠한 접촉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처럼, 내가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장치를 부숴버리는 것도 결코 허락하지 않겠다는 완고한 태도로 손잡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도르래가 날카로운 소리를 냈고 한순간 엘리베이터가 크게 덜컹거렸다. 내가 비틀거리며 넘어지는 순간 주민들 중 한 사람이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쳐들자 도르래의 상태가 보였다. 낡아빠지다 못해 녹슬어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밧줄이 빠질 것처럼 덜렁거리며 매달려 있었다. 아이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그 밧줄에 매달렸다.

  엘리베이터가 아래로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이의 발이 질질 끌리며 흙먼지가 일더니 마침내 공중으로 붕 뜨게 되었다. 주민들은 이제 아이를 향해 비명을 지르고 고함을 치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나 역시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엘리베이터 벽면에 몸을 붙인 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러다 한순간 주변이 조용해졌다. 언덕 너머에서 누군가 성큼성큼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보리색 가디건을 입고 헤진 청바지를 입은 채였다. 그는 햇빛 속에서 눈을 가느다랗게 뜨더니 곧이어 엘리베이터를 에워싸고 어쩔 줄 모르는 무장한 주민들과 밧줄에 매달린 아이를 살펴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 중얼거렸다. 그의 곁에는 아까 집에서 뛰쳐나오자마자 나와 눈이 마주쳤던 그 주민, 아마도 내가 기절했을 당시 곁에서 공용어로 상황을 설명해주었던 그 자가 서있었다. 나는 가디건을 입은 남자가 바로 그들이 설명했던 외젠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만이 달랐다.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제국민이었다. 그는 인간이었다.

  상황을 살피던 외젠의 시선이 마침내 새장 속에 처박힌 내게 닿았을 때, 나는 운명이 바로 귀 뒤편에 붙어있음을 느꼈다.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어떠한 속삭임, 머릿속을 스쳐간 그 생각 하나가 우리 두 사람을 뒤흔들어놓았고 그 순간 세상은 어쩔 도리 없이 멈추어 섰다. 바람이 부는 속도, 빛이 떨어지는 속도, 입을 벌리고 목소리를 내기 위해 목을 울리는 속도 하나하나를 나는 조율하고 제압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순간은 나의 것이었다. 눈앞의 모든 것을 의심하고,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리는 동안에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어떤 마법 같은 순간이 그 안에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 순간 엘리베이터가 덜컹거렸다. 밧줄을 붙잡은 아이가 완전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현실의 위험은 그 모든 비논리적이고 마법적인 법칙을 현실로 되돌렸다. 외젠이 현장에 뛰어들었고 그와 동시에 나는 총을 발포했다. 외젠의 고함과 주민들의 비명, 총소리가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었다. 내가 발사한 탄환은 낡아빠진 도르래를 정통으로 강타했다. 밧줄이 끊어지면서 아이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추락 직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얼빠진 주민들과 바닥에서 막 얼굴을 들어 올리는 아이의 정수리였다. 엘리베이터는 그 직후 10m가량 수직 낙하하다 협곡의 튀어나온 부분에 부딪쳤고, 그 충격으로 퉁겨져 오른 무게추가 협곡마다 층층이 늘어선 길을 막아놓은 울타리에 걸리면서 최악의 사고를 막아냈다. 나는 짧은 순간 기절했지만 곧이어 정신을 차렸다. 계단을 뛰어내려온 이들이 나를 엘리베이터에서 꺼내는 동안에도, 외젠과 주민들이 토착어로 대화를 주고받을 동안에도, 그들이 내 몸을 어딘가로 옮겨놓을 때에도 제정신이었다. 눈을 뜨고 몸을 움직이려고 들자, 누군가 손바닥으로 내 흉부를 누르면서 움직이지 말라고 말했다. 그 손은 낯설거나 차갑지 않았고, 목소리는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함이 있었다.

  외젠은 나를 침대로 옮겨놓고는 내 붕대를 풀고 상처를 확인하고 진료하고 응급처치를 했다. 나는 연거푸 제국어로 뭔가를 중얼거렸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단어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중간에 나가고 싶다고 속삭였던 것 같다. 외젠은 잠깐 머뭇거리며 손을 멈췄다가, 이해할 수 없는 기묘한 자연현상을 목격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내 몸 상태가 얼마나 걸레짝인지 설명했다. 왼쪽 어깨가 골절되었고 허리에 경미한 관통상을 입었으며, 발목 염좌가 심각하다고 했다. 대체 이 몸으로 어떻게 움직였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외젠 선생은 그것을 제국어로 말했고, 그가 사용하는 용어는 까마득한 옛날 내가 사관학교에서 배운 것이었다. 특히 내 전신에 타박상이 있는데, 얼마나 심각한지 특발성 혈소판 감소성 자반증 환자 같다고 했다. 실제로 발병을 의심 중이라고도 했다. 얼마나 심각한지 알겠냐는 것처럼 외젠 선생이 나를 내려다보았고, 나는 끙끙거렸다.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그러자 외젠 선생이 짤막하게 대꾸했다.

  “당분간 움직이지 말라는 뜻이야.”

  나는 싫다고 말하려고 했고, 실제로 그렇게 대답했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그 직후에 기절했다. 일어났을 때 외젠 선생은 그곳에 없었고 대신 유난히 손이 크고 눈이 부리부리한 솔레크 시민이 내 머리맡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눈을 뜬 직후 줄곧 머리맡을 지켜주었던, 나에게 공용어를 통해 간단하게나마 상황을 설명해주었던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자신을 에스클린이라 소개했다.

  “앞으로는 공용어를 써. 남들 앞에서 제국어를 사용하지 않는 게 좋아. 여기서는 특히.”

  에스클린은 몸이 회복될 때까지 자신이 옆에서 도와주겠다고 했다. 외젠 선생의 부탁을 받은 것이라고, 동시에 자신이 어느 정도는 자원했다고 했다. 에스클린은 또, 이곳에서 지내기 위해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수칙 몇 가지를 안내하기도 했다. 낮잠을 자는 집에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되고, 아이들에게 다가가거나 말을 걸어서도 안 되고, 제복 차림으로 시내에 내려가서도 안 됐다. 총이나 곤봉은 따로 그녀에게 보관해야만 거동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주민들이 나를 무서워하거나 경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외젠에 대해 묻자 에스클린은 모호하게 말을 흐리더니 접경지대로 떠났다고 말해주었다.

  “원래 그는 이 시기에 바빠.”

  그러더니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에스클린이 외젠이 내게 남긴 어떤 말을 전해줄 거라고 생각했지만, 에스클린은 그 이상 말하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식사 가지고 올게.”

  나는 외젠 선생이 언제 돌아오는지 물어보려다 그만두었다.

13

  에스클린은 쉰다섯 살로, 제국민으로 따지면 중년기에 접어든 여성이었다. 상체를 휘감고 하반신으로 부드럽게 늘어지는 주황색 원피스와 하늘색 재킷을 즐겨 입었고, 요리를 잘했지만 썩 좋아하지는 않아서 정작 본인의 식사는 다른 이의 식탁에서 얻어먹었다. 그녀는 내게 미음이나 죽을 끓여줄 때만 부엌으로 들어갔다. 내가 잠이 든 후에는, 그러니까 내가 잠이 들었다고 확신한 후에는 테이블에 앉아서 통신을 주고받거나 글을 썼다. 특별히 숨기려고 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밤중에 주로 뭘 하고 있냐고 물어보면 언제든 대답해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저항군이라는 사실을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의 암시는 남겨주었다. 대부분의 글도 그 활동을 바탕으로 한 수기인 듯했다. 나는 에스클린이 테이블에 얹어둔 종이를 들여다보며 낯선 글자와 친숙해지려고 애썼다. 요리책, 신문, 하다못해 물건 포장지에 쓰여 있는 글자도 읽어보았다.

  몸이 회복기에 접어들고, 침대에서 몸을 뒤척여도 더는 허리며 허벅지가 고통스럽지 않자(미묘한 욱신거림은 남아있었지만), 에스클린은 내가 집안을 돌아다니는 것을 허락해주었다. 집밖으로 나가면 족쇄를 채우거나 묶어놓을 거라고 엄포를 놓았지만 정작 내가 앞마당에 앉아있거나 어슬렁거리는 것을 보고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얼마 뒤 나는 마을을 돌아다니기 시작했고, 에스클린은 내 총과 곤봉을 슬쩍해 서랍 안에 넣어두었다.

  나는 먹기 싫어도 최선을 다해 먹었고, 움직일 수 있으면 최선을 다해 움직였다. 에스클린은 내 경이로운 회복 속도에 놀랐다. 적어도 이주일은 꼬박 누워있어야 할 몸이 일주일 만에 기능하는 것을 보고 내가 정말로 인간인 것인지 의심하기도 했다. 내 몸은 부상과 회복에 익숙했고, 나는 정해진 루틴 속에서 규칙적으로 생활하는데 길들여진 사람이었다. 데크에 고립되어 있을 때조차 시간표를 만들어서 생활했었다. 에스클린은 내 습관이 다소 병적인 것 같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지나치게 강박적인 구석이 있고, 습관이 나를 통제하려 드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다.

  “외젠 선생은 이렇지 않던가요?”

  내가 물었다.

  “제국군들은 원래 다 그런 식인가?”

  에스클린은 묘하게 핵심을 회피해 대답했다.

  “외젠은 성실한 사람이지.”

  하지만 빠른 속도로 회복하던 내 몸에도 정체기가 왔고, 결국 나는 다시 침대 신세를 지게 되었다. 발목 염좌가 악화된 것이다. 에스클린은 적당히 쏘다니는 편이 좋을 거라고 충고했다. 한동안 나는 침대 혹은 테이블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고, 그 시간을 견디기 위해 솔레크어를 독학하기 시작했다. 특징적으로 자주 보이는 단어를 기록해놓고 에스클린이 어떤 글을 읽거나 가리킬 때 기억해두었다가 사물이나 현상, 인물과 매치해 암기하는 식이었다. 에스클린의 집을 드나드는 주민들의 대화를 귀 기울여 들어두기도 했다. 관용구, 자주 언급되는 짧은 인용구, 감탄사와 욕설이 귀에 익었을 무렵부터는 내가 습득한 언어 구조를 동원해서 문장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솔레크어는 표음문자를 사용했고, 42개의 낱말을 암기하자 그 뒤에는 대부분이 수월했다. 표음문자였다면 그보다 두 배는 가까이 시간을 쏟아야했을 것이다. 성조가 있었지만 노래하듯 높낮이가 뚜렷한 음들뿐이라서 발음하는 것만 어렵지 청음으로 구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관생도 시절 행성 단위로 언어학을 공부해둔 것이 이 무렵에 큰 도움이 되었다.

  공부를 시작한 후부터는 목이 마를 때 의식적으로 솔레크어를 사용해 “물.”이라고 말했다. 배고플 땐 “식사.”, 고통스러울 땐 “붕대.”라고 말했다. 그러다 점점 “물 좀 주세요.” “식사합시다.” “붕대를 갈아야 해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 문장을 완벽히 발음했을 때 에스클린은 덤덤한 얼굴로 “그래, 제국군들 중에 너 같은 종류가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어.”라고 대답했지만, 그 뒤로는 테이블에 놓인 자신의 수기나 기타 기록물을 의식적으로 치우거나 감추어놓았다.

  에스클린은 주민들이 자신의 집을 방문했을 때에도 가능하면 나를 멀리 보내기 시작했다. 인근 주민들이나 이웃들이 방문했을 때에는 내가 침대에 누워있던 앞마당에 앉아있던 별 상관을 쓰지 않았지만, 올로즈비와 쿠르셀, 혹은 그들과 함께 드나드는 이들이 오면 분위기부터 달라졌다. 그들은 나를 무감한 얼굴로 응시하며 경계와 감시의 눈빛을 익숙하게 감추었지만, 태도에 벤 배척-그것은 배신의 가능성을 포함한 적의였다-만큼은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는 에스클린이 저항군에서 활동하는 세력 중 하나이며, 주축까지는 아닐지라도 기밀을 소유한 자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에스클린은 내가 평범한 제국군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 체계적으로 학습된, 전문화된, 미지의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자마자 생활 전반에서 보여준 느슨함과 온화함을 언제 그랬냐는 듯 감쪽같이 감추었다. 가르강튀아에서 내가 겪어왔던 배척의 종류는 아니었다. 그것은 전적으로 에스클린이 보호하는 솔레크 시, 개중에서도 그녀가 살고 있는 특정 구역의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에 가까웠다.

  에스클린이 이러한 태도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드러내거나 표현한 것은 아니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대하지는 않았다. 그런 면에서, 에스클린은 외젠 선생이나 콘스탄틴을 닮아있었다. 솔직한 언어를 사용했으나 사실관계를 전부 드러내지는 않았으며, 상냥했으나 명확한 선이 존재했다. 그녀는 내게 “할 일이 있으니 이제 그만 나가줄래?”라고 말하는 대신 “베삭에게서 버터를 얻어왔으면 해.”라고 부탁했다. 내게 할 수 있는 일, 혹은 해야 할 다른 일과를 만들어줌으로써 자연스럽게 어떤 상황이나 장소에서 배제시켰다. 나는 에스클린의 태도가 싫지 않았다. 서운함을 느끼지도, 우울해하거나 분노를 느끼지도 않았다. 그럴 이유도 없었다.

  에스클린이 처음으로 나를 집밖으로 내보냈을 때, 나는 베삭의 집을 찾아 내리막을 걷다 말고 낡은 흰 집 측면에 의자를 두고 앉은 늙은 노인을 보았다. 햇볕 아래서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채 빼빼마른 다리를 벌리고 벽에 온몸을 기대어 늘어져있었다. 표정은 심술궂었고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나에게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나는 그가 품에 안고 있는 기묘한 덩어리를 관찰하다 말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노인이 안고 있는 것은 피부가 다 벗겨져 분홍빛이 도는 작은 강아지였던 것이다. 시선을 느낀 그가 몸을 뒤척이며 눈을 굴렸다.

  나는 고개를 돌리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내리막을 걸어 내려갔다. 그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혐오스러웠다. 육신에 전시된 날 것의 노화, 낡아빠진 옷가지와 낯선 행색, 초라한 짐승은 내가 알고 경험해온 세계와 완벽히 동떨어져있었다. 제국의 빛, 젊음, 눈부신 기술과 세련된 옷들, 편리한 운송수단들이 그리웠다. 그랬다, 제국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깨달은 그 순간에조차 나는 그것을 욕망하고 있었다. 노인의 육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야말로 내가 획득한 진실 그 자체였는데도 그를 마주한 순간 거짓의 세계로, 조형된 그 세계로 도망치고 싶었다.

  이곳의 모든 것들이 갑자기 낯설게 다가왔다. 주민들이 나를 포위할 때 썼던 낡아빠진 장총들, 먼지가 쌓인 지붕들과 모래가 낀 창문틀, 믿을 수 없이 열약한 도르래를 매달고 화물을 운반하던 새장 같은 엘리베이터, 100여 년 전에나 유행했을 법한 옷차림, 밋밋한 향기가 나는 비누와 담백하다 못해 심심한 맛이 나는 곡물들은 물론이고 태울 듯 내리쬐는 뜨거운 태양열과 끝없이 펼쳐져 막막하기만 한 붉은 지평선까지 이곳을 구성하고 생활을 지탱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혐오감이 몰려왔다. 낯선 것, 새로운 것, 무지한 것에 대한 혐오였다. 무지하고 싶은 자의 욕망이 만들어낸 거울 같은 감정이었다. 이곳의 모든 요소가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진실을 반영했고 아무리 애써도 외면할 수 없게 만들었다.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내내 나는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은 욕망을, 그리고 그 충동에 몸을 맡기고 도망치는 모습을 상상하는 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 노인은 언제나 그 자리에 앉아 자신의 작은 짐승과 함께 볕을 쬐고 있었고, 나는 내리막길을 내려갈 때면 혐오스러움을 감추려고 앞만 보고 걸었다.

  주민들은 나를 보며 이와 유사하면서도 전혀 다른 감정을 느끼고 있던 것 같다. 내가 내리막을 걷거나 길을 따라 에스클린의 집으로 돌아갈 때면 어김없이 한 둘은 집밖으로 나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창문에 붙어서 내가 지나갈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들에게 제국군은 아주 익숙한 존재인 동시에 불편한 존재였다. 특정한 거리가 있어 원한다고 해도 그 이상 다가갈 수 없었다. 제국군과 그들의 물리적 거리가 좁혀지는 건 오로지 제국군이 그들을 검문하거나 감시하거나 협조를 구할 때뿐이었다. 요컨대 솔레크 시민들은 물리적 거리를 좁힐 권력조차 소유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 피 묻은 흰색 장교복은 붉은 협곡 어디에서도 쉽게 눈에 들어왔고, 난 총을 반납한, 소속이 불분명한 군인이었다. 어떤 시민들은 내가 탈영병이라고 믿었고 또 어떤 시민들은 내가 첩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운 나쁘게 폭탄 테러에 휘말려 간신히 생존한 군인일 거라고 추측하는 쪽도 있었다. 그러다 (에스클린의 말이 새어나간 것인지는 몰라도) 나를 ‘그것’으로 분류하는 목소리가 늘더니 마침내는 아이들마저 내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두려움과 호기심을 능숙하게 감추지 못하는 편이었다. 내 주변을 맴도는 아이들 대다수가 내 허리에서 가슴께까지 오는 키를 가지고 있었는데, 어른들이 적극적으로 나와 자신들의 접촉에 개입하지 않자 점점 거리를 좁혀오더니 마침내는 코앞에서 딴청을 부리며 저들끼리 속닥거리거나 손 놀이를 했다. 그러다 내가 시선을 주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재빨리 등을 돌리고 앉았다. 처음부터 나에게 관심 따위는 없었다는 것처럼, 나와 저들 사이의 거리는 우연의 산물인 것처럼 연기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집 근처를 맴돌며 노래를 부르는 아이들을 창 너머로 바라보면서 에스클린이 타주는 아주 쓰고 차가운 차를 마셨다.

  “아이들이 너한테 겁을 먹지 않네.”

  에스클린이 말했다.

  “제국군들이 아이들은 해치지 않아서 그런가보죠.”

  에스클린은 한동안 침묵하더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여긴 다른 행성보다는 제국군의 태도가 유순한 편이야. 하지만 그걸 상냥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설령 상냥하다고 한들, 그 상냥함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자원을 어디서 얻는지 우리는 잊지 않아.”

  그녀는 그 말에 냉소나 체념을 담지 않았다. 단지 평소와 같은 상냥하고 부드러운, 그러나 분명한 선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을 뿐이었다.

  어느 늦은 오후, 에스클린이 잠시 시내로 내려갔을 때, 나는 그녀가 처방한(정확히는 외젠 선생이 처방하고 에스클린에게 맡긴 약이었다) 수면제를 먹고 잠들어 있었다. 일곱 명의 침입자들이 미끄러지듯 기어들어와 내 팔과 다리를 묶는 동안에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몰랐다. 그들은 내 얼굴에 자루를 뒤집어씌운 뒤 화물과 함께 지프 트렁크에 태웠다. 한참을 달려 포장된 도로를 벗어났을 때, 지프가 심하게 덜컹거리기 시작했다. 그 소음 때문에 잠에서 번쩍 깨어났다. 약 기운 때문에 몽롱한 와중 큼지막한 화물들이 발밑에서 나를 눌러왔고, 머리맡에서 요동치는 바퀴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공포와 당혹감이 순차적으로 지나가고, 팔다리가 포박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몇 가지 가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나는 주민 일부가 에스클린이 내린 대기 명령을 무시하고 나를 제거하려 드는 거라고 생각했다. 혹은 에스클린 자체가 마음을 바꾸어먹은 걸 수도 있었다고 생각했다.

  덜컹거리는 지프 바닥 때문에 애를 먹었지만, 꽁꽁 묶인 팔다리를 뒤틀며 몸을 꿈틀거린 끝에 간신히 자세를 뒤집을 수 있었다. 그 순간 차가 돌부리에라도 걸린 건지 공중으로 솟구쳐 오르는 바람에 칸 끄트머리까지 데굴데굴 굴러갔다. 매연이 인중을 흥건하게 적셨고 바퀴소리가 바로 머리맡에서 들려왔다. 나는 최대한 몸을 안쪽으로 말고 웅크린 채 버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심하게 흔들리던 지프가 다시 한 번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한순간 기울어진 접시에 놓인 빵 부스러기 신세가 된 셈이었다. 지프에서 맥없이 굴러 떨어질 때, 나는 이번에야말로 죽는 줄 알았다.

  지프는 곧바로 멈추어 섰다. 나는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바닥에 아무렇게나 엎어져 있었다. 다급하고 초조한 발소리들이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누군가 엎어진 내 몸을 바로 눕히고 자루를 벗겼다. 작은 손바닥이 뺨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나를 납치한 연령대를 확인하고 충격을 받았다. 유아기를 막 벗어났거나, 많아봤자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을 법한 솔레크 시의 아이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창가 앞이나 내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바로 그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순서대로 눈꺼풀을 들어 올리거나 인중 밑으로 지저분하고 통통한 손가락을 들이대 내 생사를 확인하려고 들었다. 솔레크 시민들의 특성상 손들이 다 축축하고 차가웠다. 그곳에서 뜨겁고 날카로운 햇볕 때문에 눈이 따갑고 목이 타는 건 나뿐인 것 같았다. 잠시 후 아이들이 내 귓불을 잡아당기며 공용어로 말했다.

  “죽은 척 하지 마.”

  “맞아, 살아 있잖아.”

  나는 얼굴을 찡그린 채 공용어로 대답했다.

  “바닥이 너무 뜨거워.”

  “불평하기는.”

  억센 손아귀가 낑낑거리며 내 몸을 앉혔다.

  “일어나서 다시 저기 타. 넌 너무 무거워.”

  “싫어. 힘들어.”

  “우리가 더 힘들어.”

  나는 주저하다 눈을 활짝 떴다. 얼굴 위로 그늘이 져있어 시야를 확보하기 어렵지 않았다. 일곱 명의 아이들은 여전하게도 나를 신중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늘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 애들의 그림자였다. 아이들의 등 뒤로 끝없이 펼쳐진 붉은 지평선과 흩날리는 모래 먼지가 보였다. 바람이 아주 천천히 불어왔다.

  “아무것도 없네.”

  내가 말했다.

  “왜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야? 뭘 할 거야?”

  아이들은 나를 흘끔거리며 저들끼리 토착어로 속닥거리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가장 덩치 작은 아이가 딴청을 부리며 공용어로 말했다.

  “모르겠는데.”

  “아, 그러셔.”

  나는 더는 묻지 않기로 했다. 주변을 둘러보려고 고개를 빼들자 아이들이 경계하듯 흠칫 물러났다. 내가 무슨 독사라도 되는 것처럼 쳐다보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내 행동거지에서 위험한 결심의 징조가 있나 샅샅이 살펴보는 얼굴들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아이들의 몸과 몸 사이로 어렴풋하게 보이는 거대한 자연물을 보려들었다.

  “좀 비켜.”

  아이들이 멀뚱멀뚱 서있자, 나는 아칸어로 말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공용어로 정정해 다시 한 번 발음했다.

  “비켜줄래?”

  아이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다 말고 슬금슬금 비켜났다. 눈 따가울 만큼 새파란 하늘과, 그와 대조적인 새빨간 토양이 펼쳐졌다. 몇 마일 떨어진 곳에 깊고 거대한 협곡이 있었다. 입구는 비좁아보였지만 폭이 적어도 5km는 돼보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저곳이 바로 파파차 협곡이었다. 아이들은 나를 지프에 태우고 이십여 분을 달려 솔레크 시 반대편에 막 도착한 참이었던 것이다.

  파파차 협곡을 좀 더 눈에 담고 싶었지만, 아이들이 나를 보챘다. “일어나서 지프에 타.” 나는 아이들에게 꽁꽁 묶인 손발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아이들 중 어느 누구도 그것을 풀어줄 마음이 없는 듯했다. “그거 마음대로 풀 수 있잖아, 아냐?” 주황색 셔츠가 미심쩍게 말하자 아이들이 연달아 눈을 굴리며 동의를 표했다. 나는 일어서보려다 말고 주저앉은 채 끙끙거렸다.

  “내가 무슨 톱니 달린 안드로이드라도 되는 줄 아는구나.”

  보라색 두건을 쓴 아이가 머뭇거렸다.

  “하지만 너는… ‘그거’잖아.”

  고개를 들자 잔뜩 긴장해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들과 마주쳤다. 나는 아이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보라색 두건이 초조하게 물었다.

  “정말로 ‘그거’들은 남들보다 힘이 두 배나 세?”

  “아니. 너희랑 비슷해.”

  “그 밧줄 혼자 못 풀어?”

  “못 풀어. 다른 인간들하고 똑같아.”

  아이들 사이에 술렁임이 있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하얀 원피스를 입은 아이가 주황색 셔츠 뒤에 숨어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에스클린이 그러는데, 네가 족쇄를 부수고 뛰쳐나갔대. 외젠은 네가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무시무시한 힘으로 절벽까지 달려갔다고 했는걸.”

  “외젠 선생은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거야.”

  하지만 나는 외젠이 아이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외젠 선생이 나에 대해 또 뭐라고 했어?”

  “별로.”

  주황색 셔츠가 의심스럽게 대답했다.

  “외젠이랑 아는 사이야?”

  “아니.”

  “외젠한테 네가 ‘그거’냐고 물어봤는데 대답 안 해줬어.”

   나는 끙 소리를 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입에 흙이 들어가는 바람에 침을 두어 번 뱉어야했다.

   “너희 외젠이랑 친해?”

   “당연하지.”

   모래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얼굴을 찡그린 채 생각에 잠겼다. 아이들을 어떤 식으로 회유해야 원래 장소에 데려다줄지 확신이 없었다. 날 여기까지 데리고 온 이유조차 몰랐다. 아이들 쪽에서 알려줄 마음도 없는 듯했다.

   “너희들 말대로, ‘그거’들이 보통 사람들보다 뛰어나기는 해.”

   “어떤 면에서?”

   “태어나자마자 공부하거든. 몸을 쓰는 법을 배우고, 연산도 하고, 지각능력도 키워.”

   아이들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치였다. 나는 그 얼굴들을 둘러보았다.

   “나 풀어주면 너희들에게 싸우는 법 가르쳐줄게.”

   나는 솔레크어로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총을 다루는 법이랑 군인이랑 싸워서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려줄게.”

   아이들은 쑥덕거리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싫다’와 ‘좋다’가 튀어나오다가 저들끼리 짧은 언쟁이 있었다. 그러다 개들 중에서 나름대로 대장 노릇을 하는 주황 셔츠가 어색한 얼굴로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손을 내밀었고, 아이들은 밧줄을 잘라주었다. 어찌나 세게 묶었던지 손목이 새빨갰다.

   아이들이 발목을 묶은 밧줄을 자르는 동안 나는 욱신거리는 허리 통증을 느끼며 파파차 협곡을 응시했다.

   “저 협곡은 처음 봐. 저렇게 큰데 왜 여태까지 저게 있는 줄도 몰랐지?”

   “도시 뒤편에 있는 거거든.”

   밧줄을 자르며 한 아이가 웅얼거렸다.

   “너는 에스클린 집 근처나 쏘다니니까 몰랐겠지만.”

   밧줄이 전부 바닥으로 떨어지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시범삼아 팔다리를 움직여보았다. 아이들은 조금 상기된 표정이었다. 눈빛은 잔뜩 긴장해있었지만 내게 겁을 먹지는 않았다. 아이들을 시선으로 훑어본 뒤에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가르쳐주는 것들은 기본적인 체력을 필요로 해.”

   “우리는 튼튼해.”

   “튼튼한 것 이상으로 강해야해.”

   나는 협곡을 가리켰다.

   “저기까지 달리기 시합을 해서, 날 이긴 사람만 가르쳐줄 거야.”

   “왜?”

   “군인을 상대하려면 대담하고 재빨라야하거든.”

   아이들은 확신 없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네가 당연히 이기는 시합 아니야?”

   “나 다쳤어.”

   나는 아주 명료하고 간단한 솔레크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방금 너희가 지프차에서 떨어뜨렸잖아.”

   우리는 발끝으로 그어놓은 출발선 앞에 나란히 섰다. 아이들은 신발 끈을 점검하고 머리를 틀어 올리거나 겉옷을 벗었다. 동쪽에서부터 느릿느릿 모래를 실은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뻐근한 허벅지를 주무르면서 간단한 준비운동을 했는데, 염좌가 채 다 가라앉지 않았던 건지 발목이 조금 욱신욱신했다. 아이들이 솔레크어로 숫자를 셌다. “셋에서 뛰는 거야.” 주황 셔츠가 말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둘, 에서 튀어나갔고 나는 덩그러니 남겨져 한 박자 늦게 출발했다.

   ‘비겁하다는 말이 솔레크어로 뭐더라?’

   하지만 그런 생각은 곧 잊혀졌다. 바람이 불어왔던 것이다. 동쪽에서부터 끝없이, 서두르지 않고 모래를 운반하거나 뒤적이며 파도처럼 움직이는 행성 아르고의 바람이. 머리에 피가 도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눈앞이 맑아지고 시야가 한순간 그 어느 때보다 뚜렷해졌다. 내 머리 위로는 새파란 하늘이, 내 발밑에는 수십 만 년 동안 퇴적되어 만들어진 붉고 아름다운 토양이 깔려있었다. 앞서 뛰는 아이들의 옷가지 사이로 바람이 통과하며 제각각 등이 이스트처럼 부풀어 올랐다 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는 달음박질을 멈추지 않았다. 두 팔을 좌우로 흔들며 점차 속도를 높였다. 한 발 한 발 땅을 박차고 날아오를 때마다 거대한 에너지가 몸을 관통해 순환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풍경이 점점 단단해졌다. 그것이 나의 존재를 지탱해주었다. 흐물흐물하게 녹아내리도록 내버려두지도, 혼란스럽게 만들지도 않았다. 나는 이 몸으로 어디로든 갈 수 있었다. 아무리 달려도, 방향을 꺾어도, 부딪칠 복도도 벽도 천장도 없었다. 나는 자유로웠다. 두 다리를 마구 움직여 튀어 오르거나 부드럽게 곡선을 그리며 돌 수도 있었다. 환상도, 거기서 파생된 증오도, 그리움도 없었다. 나는 환희의 숨을 토해내며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거대한 협곡을 경이로운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꼭대기를 보려면 고개를 힘껏 젖혀야만 했다. 반으로 쪼개진 계곡 사이로 보이는 하늘이 한줄기 강처럼 남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미 나는 협곡의 입구에 진입해있었다. 아이들과 약속한 거리를 훌쩍 넘겼다는 것을 깨닫고 달리기를 멈췄다. 고개를 돌리자 까마득한 곳에 세워진 지프차가 보였다. 거의 점처럼 보였다. 아이들은 내가 달린 거리의 반도 따라잡지 못했다. 뛰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중간에 시합을 멈추고 지프차로 돌아가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숨을 고르며 바위에 기대앉았다. 몇 분쯤 지났을까, 보라색 두건이 근성 좋은 얼굴로 헐떡이며 골인지점에 도착했다. 어찌나 힘들었는지 구슬 같은 땀이 얼굴 군데군데에 맺혀있었다. 숨을 고르느라 한동안 내게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바위 근처에 간신히 손만 짚은 채 헐떡였다. 그러다 큰 숨을 들이마시고는 나를 노려보며 반칙이라고 했다. 다친 건 다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 나는 대답 대신 퉁퉁 부어오른 발목과 손목을 보여주었다.

  그로부터 몇 분 뒤에, 근성이 있었던 세 아이들이 마저 골인지점으로 들어왔다. 주황색 셔츠도 껴있었다. 그 애는 골인한 아이들 중에서 꼴찌였다. 나름 대장노릇 중인 입장으로서 자존심을 구겼다고 생각한 건지 주황색 셔츠는 신경이 다소 날카로워져있었다. 툴툴거리면서 ‘그거’들은 거짓말쟁이라고 우겼다.

  “로봇이 만들고, 유전자 조작을 한다고 했어.”

  주황색 셔츠가 확신에 차서 말했다.

  “그런 뒤에 50명 정도가 동시에 성교를 해서 한 세대를 낳는 거지.”

  “상상력이 너무 추잡해.”

  내가 얼굴을 찡그리고 바위에서 내려왔다.

  “외젠 선생이 그래? ‘그거’들을 그렇게 만든다고?”

  외젠이 그럴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가령 솔레크시 아이들 성교육을 위해서 엉뚱한 가정을 했다던가. 의사가 성교육도 담당하던가? 나는 문득 외젠이 경험이 있는지 궁금해졌으나, 한 번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신경 쓰게 될 것 같아 애써 털어냈다.

  “외젠도 ‘그거’야?”

  골인한 아이들 중 가장 어려보이는 아이가 물었다. 연두색 머리띠를 하고 있었다.

  결국 외젠의 성경험, 구체적으로는 연애 여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나는 의기소침하게 대꾸했다.

  “나도 몰라. 외젠이 ‘그거’인지 아닌지 내가 어떻게 알아.”

  아이들은 바위에 엎어져서 잠시간 땀을 식혔다. 나는 그들 곁에 앉아 지프로 돌아간 나머지 아이들이 차 상태를 점검하고 화물을 주워 올린 뒤 시동을 거는 것을 지켜보았다. 세 아이를 태운 지프가 몇 번 흙먼지를 날리며 원을 그리다가, 남쪽으로 비스듬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쟤네 왜 이쪽으로 안 와? 어디로 가는 거야?”

  바위에 엎어진 채 주황색 셔츠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도로가 따로 있어.”

  “그럼 우리는 어떡해?”

  “여기서 올라가야지.”

  아이들은 협곡 안쪽에 겹겹이 쌓인 바위산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바위를 타고 위로 올라가면 곧장 시내 뒤쪽으로 이어지는 샛길이 나온다고 했다. 나는 아이들과 협곡 깊은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보라색 두건이 어렴풋하게 보이는 울퉁불퉁한 지대를 가리키며 저기라고 말했다. 평소에 아이들은 협곡 안쪽에서 노는 일이 잦은 것 같았다. 길을 알고 있는 듯 확신에 차서 그 좁고 깊은 골짜기를 구불구불 나아갔다.

  바위산은 가까이서 보니 위쪽 지대가 무너져 내리며 발생한 협곡 사이의 돌담이었다. 주황색 셔츠가 앞장서 가장 낮은 바위 위로 기어 올라갔다. 한꺼번에 올라가면 우르르 떨어질 수도 있다면서, 아이들은 순서를 지켜 바위 위에 올랐다. 내가 가장 마지막이었다. 나는 앞코가 조금 닳은 부츠를 바로 신고는 심호흡을 한 뒤 겅중겅중 바위산을 뛰어올랐다. 바위를 기어오르던 아이들의 시선이 내게 내리꽂혔다.

  보라색 두건이 투덜거렸다.

  “왜 아칸의 ‘아이들’이라고 부르는 거야? ‘괴물들’이라고 부르라고 해.”

  나는 군복에 진 얼룩을 발견하고 손바닥으로 그것을 매만지면서 대답했다.

  “몸이 좀 더 괜찮아지면 무술을 가르쳐줄게. 총 쏘는 법도.”

  아이들은 작게 불만을 토했다가 다시 바위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후 희미한 악취가 나기 시작했다. 악취는 올라갈수록 점점 짙어지더니 어느 지대에서부터는 견딜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무언가 심하게 부패한 것 같은 끔찍한 냄새였다.

  “이게 무슨 냄새야?”

  아이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넓적한 바위로 뛰어올라갔다. 순간 나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바위산이 막고 있던 협곡의 반대편으로, 수십 개의 새까만 점이 다닥다닥 붙어있었던 것이다. 아니, 점들은 적어도 수천 개는 되어보였다… 바닥은 촛농을 흘린 것처럼 누리끼리한 하얀 색으로 뒤덮여 있었고, 계곡의 측면은 온통 새까만 점들로 둘러싸여 원래 형태가 무엇이었는지조차 알아볼 수 없었다. 벽마다 독성 알레르기가 징그러우리만치 우둘투둘 올라온 것처럼 보였다.

  “저게 뭐야?”

  아이들은 이미 저만치 올라가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싶었다. 들었는데 대답하고 싶지 않았던 걸 수도 있었다. 다만 연두색 머리띠를 쓴 아이가 내게 선심을 쓰듯 소리를 쳤다.

  “여기서부터 발밑 조심해!”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채 우두커니 서있자, 주황셔츠가 나를 흘끔거리다 말고 조심조심 내려와 바위에 매달렸다. 그 애가 손을 내밀었다.

  “그냥 새 떼야.”

  “새라고?”

  “새 처음 봐? 사막까마귀 말이야.”

  나는 그 애의 손을 잡고 다음 바위에 발을 디뎠다. 그 순간, 무슨 심경의 변화였건 건지는 몰라도 한순간 주황셔츠가 배신을 결심한 듯했다. 내가 붙잡고 있던 그 애의 손등으로 차갑고 미끌거리는 진액이 뿜어져 나왔다. 그 손에 반쯤 몸무게를 싣고 있던 나는 발을 헛디뎌 그대로 떨어졌다. 하얗고 질척질척한 악취의 근원지 위로 추락하는 순간, 질퍽한 감촉과 함께 오물이 튀어 올라 내 제복이며 얼굴을 흥건하게 적혔다. 고약한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얼이 빠져서 그대로 엎어진 채 움직이지 못했다. 아이들이 나를 내려다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정작 나를 떨어뜨린 주황셔츠는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재빨리 바위 위를 기어올라 사라져버렸다.

  “유감이야!”

  “안 됐다!”

  나머지 아이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협곡 너머로 사라졌다. 주변이 조용해진 후에도 한동안 나는 입을 벌린 채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쳐다보며 누워있었다. 그러다 헛구역질을 하며 침을 뱉었다. 오물이 입 속으로까지 튀었던 것이다.

14

  “까마귀 똥이야. 이맘때쯤이면 협곡에 빼곡하게들 싸대지.”

  에스클린이 말했다.

  “그 시기엔 가지 않는 게 좋아.”

  “아, 똥을 싸는 시기가 따로 있나 봐요?”

  내가 젖은 머리를 털며 냉소적으로 대꾸하자 에스클린은 손가락을 꼬았다.

  “사막까마귀들은 무리지어 사는 철새야. 초여름 무렵 날아와서는 한동안 머물다가, 가을이 오기 직전에 떠나지. 한꺼번에 대규모로 이동하는데다가 장기간 비행해야하기 때문에 떠나기 서너일 전부터 배설을 해. 몸을 가볍게 하려고. 아마 내일쯤에 잠깐 비가 오겠군. 운이 나쁘구나. 이틀 뒤에 갔으면 비에 씻겨 내려가서 악취 걱정은 없었을 텐데.”

  대답 대신 무뚝뚝한 표정으로 허공을 쏘아보았다.

  에스클린이 부드럽게 혀를 굴렸다.

  “떠나는 걸 보면 기분이 좀 나아질 걸. 장관이거든. 난 이제 그런 풍경도 심드렁하지만, 가끔 드물게 관광객들이 와서는 감탄을 하더구나.”

  “관심 없어요.”

  나는 서랍을 열었다.

  “옷 좀 빌려주세요.”

  “이미 꺼내놨어.”

  에스클린이 의자에 걸린 보라색 재킷을 가리켰다. 나는 까만 나시에 손을 집어넣다 말고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재킷을 들어 올린 뒤에도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옷 전체에 감도는 미묘한 광택과 200년 전쯤에나 유행했을 법한 구시대적 패치들은 시각적으로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내가 항의하고 싶은 것처럼 입을 벌리자, 에스클린이 지나가는 말처럼 덧붙였다.

  “외젠이 돌아왔어.”

  외젠 선생이 왔을 때, 나는 코끝까지 담요를 뒤집어쓴 채 등을 돌리고 누워있었다. 외젠은 에스클린과 짧게 솔레크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에스클린은 내가 혼혈 같다고 말했다. 회복 속도가 너무 빨라서 도무지 보통 인간 같지 않다고 했다. 망아지처럼 여기저기 쏘다니고 싶어 하고 도통 말을 듣지도 않는다면서 점심 무렵에는 협곡을 오르내리다가 떨어지는 사고가 있었다고 속속들이 고해바쳤다. 나는 에스클린의 말을 일부 정정해주고 싶었지만, 외젠의 얼굴을 정면으로 쳐다보게 될까봐 그냥 벽을 쏘아보며 애꿎은 자리만 뒤척였다.

  외젠은 에스클린에게 접경지대 병원 상황을 이야기했다. 주제가 좀 더 구체적이고 비밀스러운 정보로 빠지려고 할 때, 에스클린이 제지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내가 솔레크어를 안다고 했다. 독학한 척 꾸며내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독학한 것인지 모르겠다고, 아무래도 ‘그거’ 같다고 덧붙였다.

  “독학일 거예요. 심심했나 봐요.”

  우스갯소리인지 진지한지 구분되지 않는 모호한 어조로 외젠이 말했다.

  에스클린이 밖으로 나간 뒤, 외젠은 주변을 정돈해놓고 침대로 다가왔다. 그에게서 희미한 화약 냄새와 약품 냄새가 났다. 나는 갑자기 내 몸에서 비린내와 악취가 나지는 않는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비누로 벅벅 문지르고 씻어댔는데도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외젠은 의자를 놓고 앉아서 한동안 침묵했다. 나는 그가 어떤 말이든 꺼내기를 기다리다가, 아무 반응도 없자 결국 입을 열었다.

  “엄청 바쁜가봐.”

  외젠은 내 솔레크어에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응… 한동안 바빴어.”

  그가 물었다.

  “몸은 이제 괜찮아?”

  나는 그렇다고, 에스클린의 말대로 협곡도 다녀왔다고 말했다.

  “어디 협곡?”

  콘스탄틴이 물었다.

  “파파차?”

  “시내 뒤쪽에 있는 거.”

  “파파차야.”

  따라서 발음해보았다. 파파차….

  “거기까지 다녀왔어?”

  “여기 애들이 날 끌고 갔어. 지프 트렁크에 짐짝처럼 태우더라.”

  빈정거리듯 말했지만 기분이 상해서는 아니었다.

  내가 말했다.

  “콘스탄틴.”

  잠깐 침묵이 있었다.

  “응.”

  그는 나를 어떻게 불러야 좋을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마침내 그가 대답했다.

  “아나렉샤.”

  침을 삼키다 말고 목구멍이 깔깔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콘스탄틴을 쳐다봤다. 구린 재킷을 걸치고, 머리는 젖어서 제대로 말리지 않은 상태였다. 내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지만 심장은 어느 때보다 강하게 뛰고 있었다. 어떤 말을 꺼내면 좋을지, 그런 다음에는 또 어떤 말로 대화를 이어나가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예전처럼 그를 대할 수가 없었고, 심지어는 그를 미워하는지 무서워하는지조차 확신이 없었다.

  그러다 그냥 원래 주제로 되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내가 물었다.

  “너 사막까마귀 떼 알아?”

  무슨 말인가 하려고 머뭇거리던 콘스탄틴이 그렇다고 했다.

  “날아가는 거 보려고 거기 간 거야?”

  나는 그를 쏘아보다가 그렇지 않다고 했다. 날아가는 걸 보려면 적어도 이틀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고, 게다가 애초에 그런 데에 관심이 없어진지 오래라고 했다.

  “그래도 떠나기 전에 보고 갔으면 좋겠네. 일 년에 한 번이야.”

  콘스탄틴이 말했다.

  “나도 아직 본 적은 없지만, 에스클린은 그게 근사하다더라.”

  “내가 떠날 거라고 생각해?”

  내가 날카롭게 물었다.

  콘스탄틴은 그 말을 천천히 곱씹어보는 듯했다. 그 안에 함의된 뜻과, 그렇게 되면 벌어질 가능성들을 점쳐보는 것 같았다. 내가 이곳에 머물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가 옳았다. 내가 여기 계속 머물 이유가 없었으니까.

  갑자기 심사가 뒤틀렸다. 어디서 그런 분노가 치솟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직까지 내게 그런 힘이 있다는 게 놀라웠다. 그를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용서하기로 마음을 먹은 지도 오래 되었는데, 그가 살아있는 것만으로 모든 죄의식이 역전된 줄로만 알았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 분노 앞에서 무척이나 침착했다. 심지어는 그 분노의 원인을 눈앞의 콘스탄틴이 아니라 나를 배설물 구덩이에 자빠뜨리고 도망간 아이들에게서 찾고 있었다. 나는 공격적으로 말을 꺼냈다.

  “나 오늘 납치를 당했어. 네가 없는 동안 말이야.”

  나는 아이들이 내 얼굴에 자루를 씌우고 팔다리를 묶어서는 트렁크에 짐짝처럼 던져놓고 지평선을 향해 달려갔노라고 했다. 협곡을 올라가던 도중에 나를 까마귀 둥지에 버려놓고 갔다고, 나를 배설물 둥지에 처박아놓고 떠났다고 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의 행동은 내게 어떠한 위협도 되지 못했다. 그들에게 정말로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그 정도는 모욕 축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내가 입으로 직접 아이들의 행동거지를 묘사하기 시작하자, 이른 오후에 벌어졌던 모든 일들이 간사하고 잔혹하게 들렸다. 그 일로 상처 받은 게 아니었는데도 그 일에 상처받은 것처럼 구는 태도가 스스로도 이해되질 않았다. 사실 정말로 화를 내고 따져야 할 대상은 바로 콘스탄틴이었다. 그에게 퍼붓고 싶은 사적이고 치졸한 말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대신 나는 아이들 때문에 모든 게 엉망이 되었다고 말했고, 그들의 태도를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에스클린이 그들을 계속 감싸며 오후의 일을 없던 일로 덮어둔다면 그 애들을 당장에 총으로 쏴 죽이겠다고 했다. 정말로 그렇게 말했다. 분노를 표출하는 그 방식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몸에 남겨진 힘의 소유물이었다. 나는 그것의 방식으로 대화하고 있었다. 그것은 권력의 것이었다.

  콘스탄틴은 처음에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혹은 듣지 않은 척했다. 내가 그 일을 실행할 거라고 믿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내가 점점 말을 부풀려 빈정거리기 시작하자, 콘스탄틴도 어느 순간 눈앞의 아나렉샤가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그 사람이 아니라 다른 무엇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러지 마.”

  콘스탄틴이 내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네가 그러지 않을 거란 거 알아.”

  하지만 이미 눈 뒤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악의로 가득 찬 열기가 내 머리를 멍하게 만들고 판단력을 흐렸다. 시야가 무너지면서 공간이 헝클어졌다. 모든 사물이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었다. 나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콘스탄틴을 쳐다봤다.

  “나는 네가 아니야.”

  나는 콘스탄틴에게 이만 나가달라고 했다. 콘스탄틴은 별다른 말없이 가디건을 걸치고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그러더니 약을 잘 챙겨먹으라고 덧붙였다.

  “보안이 걱정되면 내 집을 써도 괜찮아. 잠금장치가 있는 문이 설치된 몇 안 되는 곳이거든.”

  떠나기 전, 콘스탄틴이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스클린이 돌아왔다. 신문다발을 쥐고 있었는데, 오자마자 커피를 타더니 소파에 걸터앉았다. 그녀는 생각보다 재킷이 나와 잘 어울린다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는 다시 벽 쪽으로 돌아누우며 제국어로 내 자신이 싫다고 말했다. 에스클린은 눈을 가늘게 뜨고 신문을 한 장 넘기며 커피를 마셨다. 그러더니 지나가는 말투로 아까 아이들을 만났다고 덧붙이면서 내일 시내에 나가서 기분전환이나 하라고 했다. “할카가 안내해줄 거야.” 아무렇지 않게 에스클린이 말했다. 나는 할카가 누군지 몰랐고, 시내에 가고 싶지도 않았지만, 그냥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 날 밤 나는 협곡에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달을 만져볼 수 있었다. 차갑고 축축했는데, 솔레크 시민들의 피부처럼 느껴졌다. 아주 거대해진 몸을 협곡 위에 가로로 뉘였다. 파파차 강이 마르기 전까지 수 십 만년 흐르고 흘러 만들어낸 깊은 계곡 틈으로 얼굴을 들이밀자, 그것들이 보였다. 사막까마귀들은 날개를 정돈하며 벽에 붙은 채로 쉬고 있었다. 주술에 걸려든 것처럼 나는 그들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까마귀들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들은 단순한 새가 아니었다. 인면조였다. 인간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들은 언젠가 보았던 사람들을 닮아있었다. 나는 새들 틈에서 레안드로스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축축하고 까만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면서 날카로운 소리로 울었다. 다음 순간, 수천 마리의 까마귀 떼가 우후죽순 고개를 쳐들었다. 그 얼굴들. 내가 언젠가 죽이고 학대했던 그들. 잠재의식 속에서 깨어난 악마적인 힘. 나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개인적인 권력. 그 협곡 아래에 있는 건 내가 저지르고 묻어둔 모든 죄의 얼굴들이었다. 그 협곡 아래에 나의 죄의식이 있었다. 오물이 되어, 쾌쾌하고 지독한 악취를 풍기며 그곳에 고여 있었다. 그 순간 까마귀 떼가 나를 향해 돌진했고 갑자기 장면이 바뀌었다. 나는 작아져있었고, 그것들은 위에서 아래로 추락했다. 철퍽, 소리를 들으며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나는 새벽 내내 잠을 설치다 서랍에서 총을 꺼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불안해서였다.

  할카는 나를 까마귀 배설물에 처박고 달아난 바로 그 주황셔츠였다. 에스클린 앞에서 딴청을 피우는 그 애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애는 내 시선을 모른 척했지만, 잠시 후 결국 벌컥 화를 내며 자신의 무안을 감추려고 들었다. 에스클린은 할카가 도시의 시설물이나 공공장소에 대해 설명해줄 거라고 했지만, 나는 딱히 그곳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할카 역시 내가 그런 곳을 돌아다닐 거라고 기대하지 않는 눈치였다. 집밖을 나오자마자 할카는 내 옷차림을 살피더니 꼭 30년 전 유행하던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반항기 청소년 같다고 했다.

  “바이크를 타고, 한 손에 열쇠고리를 돌리고 있는 사람들 말이야.”

  나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런 영화는 제국에도 있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내리막길을 걸어 내려갔다. 심술궂은 얼굴의 노인이 의자에 앉아서 어김없이 피부병에 걸린 것처럼 보이는 그 분홍색 개를 안고 햇볕을 쬐고 있었다. 나는 그를 최대한 못 본 척했는데, 할카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노인을 향해 혀로 딸깍거리는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꼬았다. 노인은 미동도 없이 앉아서 퉁명스레 할카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손바닥을 들어 올려 손가락을 같은 모양으로 꼬아주었다. 내리막길을 다 내려갔을 때, 나는 할카에게 뭘 한 거냐고 물었다. 할카는 그냥 인사를 했다고 했다.

  할카가 나를 돌아보며 공용어로 물었다.

  “인사 몰라? 우리 말 배운 거 아니었어?”

  “몰라. 너네 말 그냥 외운 거야.”

  “혼자? 에스클린이 곤란해 하겠다.”

  할카는 어쩐지 즐거운 목소리였다.

  내가 솔레크어로 물었다.

  “에스클린이 곤란한 게 좋아?”

  “응. 난 에스클린이 싫거든. 좋을 때는 엄청 좋지만.”

  “뭐 때문에?”

  “에스클린은 내 마마지(엄마)거든.”

  나는 할카의 얼굴을 쳐다봤다.

  “거짓말. 왜 같이 안 살아?”

  “가출했어.”

  “에스클린이 뭐라고 안 해?”

  허! 할카는 한쪽 입 꼬리를 올리며 기묘한 한숨소리를 냈다.

  “별로. 올로랑 내가 언제 돌아올지 내기하던데.”

  “그럼 지금은 어디 사는데?”

  “빨간 지붕 집.”

  “옆집이잖아.”

  어이없어진 내가 말했다.

  “그건 가출이 아니야. 외출이지.”

  “집을 나가서 62일째 돌아오지 않으면, 그건 가출이야.”

  “이 재킷은 네가 입어야겠다.”

  내리막길이 끝나갈 무렵 정류장이 나타났다. 거기서 사각형으로 생긴 바퀴달린 버스를 타고 몇 분 정도를 더 달리자, 허허벌판이 끝나고 도시라고 할 수 있을 법한 풍경이 펼쳐졌다. 마천루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빌딩이라고 부를 수는 있을 법한 키 큰 건물들과 거대한 간판들, 수많은 시민들과 구불구불한 골목들이 보였다. 할카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쏜살같이 내달려 한 무리의 아이들 속으로 뛰어들었다. 나는 아이들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어제의 그 납치범들이었던 것이다. 아이들끼리 협의가 되어있지 않았던 것인지 나를 두고 할카와 아이들 간에 짧은 언쟁이 벌어졌다.

  정류장 옆에 서서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이야기가 끝나기를 심드렁하게 기다렸다. 할카가 에스클린의 핑계를 댔다. 고민하던 아이들이 마침내 나를 불러들였다. 그러더니 심문하듯 어디를 갈 건지, 시청 쪽으로 갈 건지, 얼마나 머물 건지, 같이 다녀줘야 하는지 따위를 물어보았다. 나는 시청 같은 관공서에는 흥미가 없고 그냥 쇼핑가나 둘러보고 싶다고 했다. 혼자 다녀도 충분하다고 했다. 그러자 할카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돈이 있어?”

  정말 오랜만에, 나는 계좌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떠올려보았다. 복무하기 시작한 이래 계좌잔액을 신경써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필요한 생필품은 대부분 함선에서 보급을 받았고, 값나가는 사치품을 구매해본 것도 까마득한 옛날의 일이었다. 사관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는 근무시간이 너무 빠듯하고 감찰도 잦아서 쇼핑을 할 시간이 없었다. 대부분의 주급이 계좌에 고스란히 저축되어 있었다. 마맛산 헤어오일을 충동 구매할 수 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돈이 빠져나갈 일이 없었기 때문에 과소비를 한다고 갑작스럽게 가난에 시달릴 거라고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나 돈 많아.”

  내가 덧붙였다.

  “쓰진 않을 거지만.”

  계좌에서 돈이 빠져나가면 제국의 추적을 받게 될 테니까. 나는 이곳에 줄곧 머무를 것을 염두하는 내 자신을 깨닫고 내심 놀랐다. 할카는 내가 돌아다니는 걸 내버려두겠다고 했지만, 돌아올 때는 함께여야 한다고 했다.

  “널 혼자 두면 에스클린에게 혼날 것 같아.”

  할카는 쇼핑가를 둘러보고 두 시간 뒤에 협곡으로 빠지는 샛길에서 만나자고 했다. 파파차 협곡이 언급되었을 때, 아이들은 딴청을 부리다가 코를 잡고 냄새가 난다는 시늉을 했다. 나는 할카를 비롯한 아이들을 흘겨보았다.

  “나중에 봐.”

  할카는 내게 손가락을 두 번 꼬았고, 나는 제국식으로 그냥 손을 흔들었다. 우리는 골목에서 갈라졌다.

  나는 비교적 넓고 깨끗한, 포장된 길을 따라서 걸었다. 상가건물 뒤편으로 빠져나오자 본격적인 쇼핑가가 나타났다. 쇼핑가라고 해봤자 제국에서 봐온 것의 절반도 채 되지 않았다. 노상에 세워둔 마네킹들과 옷걸이들이 지저분하게만 보였다. 그 풍경은 차라리 제국 시내 뒤편으로 펼쳐진 시장 골목을 훨씬 닮아있었다. 그 증거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음식 냄새가 났다. 나는 옷 가게와 간식을 판매하는 노상이 한 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인파가 북적이는 거리 한복판을 걷던 나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열을 맞추어 걷는 제국 사병들을 발견하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옷가지를 뒤적이는 동안 사병들이 등 뒤로 지나가면서 제국어로 대화를 나누었다. “생선 먹고 싶다.” “저녁까지 2시간이나 남았어, 얼간아.” 나는 아무 문제도 없는 것처럼 밖으로 나와 다시 거리를 어슬렁거렸다. 근처에 제국군이 보이면 능숙하게 옷과 옷들 사이로, 장신구를 판매하는 노점상 사이로 숨어들어가서는 보석을 들여다보는 척하며 그들이 지나갈 때까지 딴청을 부렸다.

  쇼핑가를 누비는 동안 기분이 점점 나아졌다. 예쁜 옷들과 이국적인 구두와 클래식한 색조 화장품들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거울 앞에서 머리모양을 다듬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화장품 가게로 들어가서 낯빛을 감추고 눈썹을 정돈했다. 점원은 제국인인 나를 그냥 내버려두었다. 괜히 곁에서 거들며 상품을 추천했다가 시비가 걸릴까 봐 걱정하는 것 같았다.

  협곡으로 빠지는 샛길로 올라갔을 때, 아이들은 긴 벤치에 앉아서 다리를 흔들며 차가운 과자를 먹고 있었다. 할카는 내 얼굴을 보더니 자기가 어렸을 때 유행하던 영화에 비슷한 화장을 한 제국인이 나왔었다고 했다. 손가락을 빨면서 영화 속 장교와 솔레크인이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비극적으로 죽었다는 스포일러를 늘어놓았다. 그것은 오래 전의 기억을 불러왔다. 어릴 적에는 낯선 행성에 불시착한 장교들이 거의 필연적인 확률로 그 지역에서 살고 있는 선량한 시민과 사랑에 빠지고 만다고 믿었다. 콘스탄틴은 그런 종류의 비극을 좋아했다. 극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얼굴을 붉히고 머리카락을 배배 꼬던 게 떠올랐다.

  이제 더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던 콘스탄틴도 떠올랐다. 더는 어리지 않고 키가 많이 자라있을 때였다. 나는 빗소리와 어두컴컴한 복도, 차가운 소파의 촉감, 프롬을 앞두고 춤 연습을 하는 동기들 때문에 복도에서부터 희미하게 들려오던 음악소리들을 기억했다. 그때 우리는 정말이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런 일들이 벌어질 거라고, 그래서 모든 게 산산조각 나버릴 거라고 그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이곳이 꼭 그때의 로맨스 영화 속의 무대처럼 느껴졌다. 사랑을 거부하거나 원하던 시절을 지나쳐 사랑을 탐색하던 시기로 되돌아온 것만 같았다. 하지만 영화와 현실은 다르다. 그것이 소유한 환상은 현실의 상처와 닮아있던 적 없다. 나는 상처를 다루는 법을 몰랐다. 사랑을 다루는 법도 몰랐다.

  “롤로카가 너한테 줄 게 있대.”

  할카가 말했다.

  “롤로카가 누군데?”

  “얘.”

  할카가 연두색 머리띠를 한 여자아이를 가리켰다.

  벤치에서 내려온 롤로카가 내게 까만 리본을 내밀었다. 내 거였다.

  “잃어버린 줄 알았어.”

  “네가 엘리베이터에 떨어뜨렸어.”

  롤로카는 엘리베이터 밧줄에 매달려 모두를 혼비백산하게 만들었던 바로 그 여자애였다. 롤로카는 그때 내가 아래로 내려가지 못하게 막으려고 했다고 했다. 내가 도망치게 되면 어른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면서, 그때 자길 두고 떨어져줘서 고맙다고 했다.

  “구해줘서 고맙다는 거야. 얜 원래 이렇게 말해.”

  할카가 말했다.

  나는 까만 리본으로 머리를 정돈했다.

  “외젠이랑 정말로 아는 사이 아니야?”

  보라색 두건이 물었다. 그 애의 이름은 브로베였다.

  “아니. 왜?”

  “롤로카가 까만 리본을 주워왔더니 그게 네 거래.”

  “엘리베이터에 떨어져 있었으니까 그렇겠지.”

  브로베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너 외젠 선생한테 관심 있지?”

  “왜 그렇게 생각해?”

  “외젠은 제국인이고 잘생겼잖아. 제국 영화배우처럼 생겼어.”

  “외젠이 그래? 자기가 배우처럼 잘생겼다고?”

  “아니.”

  “그럼 어디 가서 그런 소리는 하지 마.”

  “그럼 외젠은 못생겼어?”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었다. 나는 이 주제에서 도피하고 싶었다.

  “모르겠어. 외젠 얼굴에 대해 깊게 생각해본 적 없어.”

  하지만 거짓말이었다.

  “외젠이 너한테 사과하래.”

  외젠과 내 사이를 추궁한 진짜 이유였다.

  할카가 마지못해 덧붙였다.

  “에스클린도.”

  “그래, 너희가 날 지프 트렁크에 태웠잖아.”

  나는 샛길을 따라 내려오는 하얀 장교복을 보았다.

  내가 물었다.

  “왜 그랬어?”

  “거기서 널 죽이려고.”

  할카는 증오를 학습하기 시작한 아이의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

  “넌 제국이 만든 군인이잖아.”

  나는 할카를 돌아보았다. 할카를 비롯한 아이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에 내가 말했다.

  “미안해.”

  할카가 물었다.

  “여기 계속 머물 거야?”

  “나니아를 위하여. 잠깐 신분검사 좀 하겠습니다.”

  아이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나는 습관처럼 제복에 달린 소매와 어깨 견장부터 확인했다. 그녀는 소위였고, 딱딱하게 서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제국어로 물었다.

  “무슨 일인데요?”

  “관광객이 현지주민과 접촉하려면 관할 함선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허가 받으셨습니까?”

  “그런 법이 있는 줄 몰랐어요.”

  나는 가르강튀아 출신이었고, 군법을 포함한 아칸의 전 함선이 지켜야 할 법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언급한 법은 개척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니아에서나 적용되는 것이었고 실질적으로는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관광객이 현지주민과 접촉했다고 처벌받는 일도 거의 없었다.

  내가 겁먹거나 긴장한 기색이 없자, 소위가 강하게 나왔다.

  “신분증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잃어버렸어요.”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시민.”

  소위가 말했다.

  “이건 제국군의 명령입니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소위가 할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공용어로 물었다.

  “무슨 대화를 하고 있었나?”

  “아이스크림 이야기요.”

  할카는 겁을 먹은 것 같기도 했고, 그녀를 업신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제국군이라고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그 애는 저항하거나 분노하거나 경멸하는 일들이 익숙해보였다. 혹은 그런 행동들을 흉내 내는데 익숙해보였다. 나는 할카의 그런 태도가 좋지 않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거들먹거리기를 좋아하는 제국군 앞에서 태도를 감추지 않으면 곤란해질 수도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는 솔레크어로 속삭이듯 말했다. “그만해.” 그러자 할카가 한순간 머뭇거렸고, 소위가 눈을 부라렸다.

  “방금 신호를 주고받았군.”

  소위가 빈정거리며 나를 쳐다봤다.

  “시민, 관광객이라면서 토착어를 아는군요.”

  소위가 할카를 벤치에서 끌어냈다.

  “본 솔레크 시민은 조사에 응하도록.”

  나는 할카의 팔을 붙잡고 소위를 노려보았다.

  “제국군답게 굴어요.”

  소위는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내가 대체 뭘 알고 있겠냐는 것처럼 업신여기는 눈으로 그녀가 말했다.

  “단순한 조사일 뿐입니다.”

  “난 괜찮아.”

  공용어로 할카가 말했다.

  “전에도 한 번 갔다 온 적 있어.”

  할카는 아이들을 한 번 둘러본 뒤에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으쓱이고 소위를 따라나섰다. 소위는 할카를 데리고 샛길에서 도로변으로 내려가는 계단까지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벤치에 앉은 아이들이 숨을 삼켰다. 아이들은 뚫어져라 할카가 군인에게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나는 손바닥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계단을 내려가기 직전, 할카가 갑자기 소위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소위는 뒤로 물러나다 말고 반사적으로 총을 뽑아들었다. 온몸의 털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할카는 총구를 노려보며 뻣뻣하게 섰고, 소위는 할카를 향해 화를 냈다. 할카가 지지 않고 맞서자 소위는 점점 흥분하기 시작했다. 총을 든 손을 내리기는커녕 할카에게 들이대며 당장에라도 쏴버릴 것처럼 소리 질렀다. 허공으로 손을 높이 들고 경고사격을 했다. 나는 다급하게 주머니에서 총을 꺼내들었다. 머뭇거리던 순간 할카가 소위에게 덤벼들었고,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총성이 울려 퍼졌고, 할카가 쓰러졌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나는 멍하니 내 총을 내려다봤다. 방아쇠가 당겨져 있었지만 걸리는 감각이 없었다. 나는 패닉상태에 빠져 덜컥거리는 방아쇠를 연거푸 당기기 시작했다. 발사될 리가 없었다. 총은 텅 비어있었다. 에스클린이 탄환을 분리해놓은 것이다. 빌어먹을 에스클린이 내 총을 비워놓은 것이었다!

  다음 순간 나는 이성을 잃고 총을 집어던진 뒤, 자리를 박차고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당황한 소위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그녀의 뺨을 온힘을 다해 후려갈겼다. 소위는 그대로 기절해 계단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 떨어졌다. 벤치에서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주변 소리가 수면 너머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먹먹하게 들렸다. 나는 쓰러진 할카 쪽으로 시선조차 주지 못했다. 헐떡이며 그 곁을 겨우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아이들과 할카를 그곳에 내버려둔 채 도망치듯 그 현장을 떠났다.

  마을로 돌아온 나는 에스클린의 집으로 향하는 대신 콘스탄틴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웅크린 채로 몇 시간쯤 구석에 처박혀 있었을까, 문이 열리고 누군가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그림자가 내 등 위로 내려앉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제국어로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나는 그제야 콘스탄틴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콘스탄틴이 선택하고 지켜낸 이곳은 정말이지 끔찍하다고 말했다.

  이곳의 더위, 하늘, 토양의 색깔, 사람들, 그들이 낳은 아이들, 그들이 생산하고 만든 물건, 요리, 옷가지 하나하나가 싫다고 했다. 그가 지켜낸 것들은 보잘 것 없다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혐오감이 든다고 했다. 이곳이 견딜 수가 없다고도 말했다. 콘스탄틴이 살아가는 이유가 나를 괴롭게 만든다고, 이곳에 있으면 그런 것들만 떠오른다고 으르렁거렸다. 잠시 후 다가온 콘스탄틴이 내 어깨를 붙잡았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콘스탄틴이 아니라 에스클린이었다. 그녀는 화장이 번져 엉망진창이 된 내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빗나갔어.”라고 했다. “그 애는 괜찮아.” 나는 울기 시작했다.

  “진심이 아니었어요. 죄송해요.”

  에스클린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그녀는 내가 울음을 정돈할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너 탈영병이 아니구나.”

  에스클린이 말했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에스클린이 나에게 뜨겁고 신 차를 타주었다. 내가 지나치게 신 맛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에스클린은 침대 맡에 누워있는 할카를 보여주었다. 할카는 어깨에 반창고를 붙이고 대자로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 코를 골면서 다리를 쭉 뻗고 이를 갈아대고 있었다. 할카는 총에 맞은 게 아니라 기절한 척 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정말 위험했어요.”

  내가 말했다.

  “여기 아이들은 공포를 흉내 낼 줄 알아야 해요.”

  “무엇에 대한?”

  그녀가 물었다.

  “권력에 대한.”

  “폭력에 대한 것이로군.”

  에스클린이 정정했고,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에스클린은 내게 떠날 거냐고 물었다. 나는 창밖을 응시하다가 외젠은 어디 있냐고 물었다.

  “외젠은 베삭 집에 있어. 내가 버터를 부탁했거든.”

  “오래 걸릴까요?”

  “인사하고 싶다면 불러올게.”

  나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그럴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에스클린은 한동안 침묵하며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외젠이 여기 온 건 딱 이맘때쯤이야. 너처럼 걸레짝이 된 몸으로 도착했지. 그는 다시 걸을 수 있게 될 때까지 책상에 앉아있었어. 그러더니 어느 날 내게 솔레크어로 물었지. ‘목이 마른데 컵을 사용해도 될까요?’”

  나는 콘스탄틴이 써내려간 단어를 손끝으로 짚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었다. 세계를 이해하고 누군가와 소통하기 위해 공을 들이는 그의 모습은 내게 무척이나 익숙했다.

  “너를 그 캡슐에서 꺼낸 건 나야. 올로와 쿠르셀은 널 죽이자고 했지만, 나는 네가 탈영병일 거라고 주장했지.”

  에스클린이 조용히 말했다.

  “너를 보면 외젠이 떠올라.”

  “그만 가봐야겠어요.”

  나는 눈가를 닦아내며 말했다.

  “외젠에게 새 떼를 보고 싶었다고 전해주세요.”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진 소위가 노발대발하며 함선으로 돌아갔을 무렵, 나는 그곳을 떠났다. 소위가 내 정체를 수색하기 위해 함선에 보고를 올리기 전에, 한 무리의 사병들이 솔레크 시를 이 잡듯 뒤지는 사태가 벌어지기 전에, 나는 버스에 올라서 셔틀 정거장으로 향했다. 정류장 앞에서 에스클린이 손가락을 길게 꼬았다.

  “우리의 인사법이야.”

  나는 그녀를 껴안았다. 에스클린은 놀랄 만큼 차갑고 부드러웠다. 그녀는 파파차 협곡에서 날아오르는 새들의 이야기를 속삭여주었고, 나는 어떤 형식으로든 그곳에 있을 거라고 맹세했다. 외젠에게 내 포옹을 전해달라고, 나를 기다려달라는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에스클린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전부 전해주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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